2) 지주제의 변동
(1) 농촌사회 분해와 토지의 상품화
중세 전시기에 걸쳐 전개되어 온 지주제는 17세기 이후 커다란 변화를 맞게 되었다. 그러한 변화는 사적 토지소유의 발달을 배경으로 만개되어 나타났다. 사적 토지소유의 전개 발달의 형태는 곧 농촌사회 분해와 지주제의 역사적 존재형태에 대한 이해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따라서 한국 중세의 지주제 일반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사적 토지소유 일반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것이 중요하다. 지주제를 축으로 하는 중세의 생산관계야말로 소경영을 잠식하면서 끊임없이 분해되고 있었고 그것의 전개 발전형태를 통해 봉건적 토지소유의 붕괴와 근대적 토지소유의 발생을 전망해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 때 중요한 것은「王土思想」과 같은 관념적 형태가 아니라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토지의 소유·비소유에 대한 보다 명확한 이해가 필요하다. ‘무릇 하늘 아래 王土가 아닌 곳이 없다’고 추상화된 王土思想은 중세 전시기에 걸쳐 관념화되어 왔지만, 그러한 관념의 이면에 현실적인 사적 토지소유구조가 자리하고 있었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0165)
초기의 연구자들은 왕토사상이라는 관념을 ‘國有論’으로서 이해하는 가운데 농민의 사적 토지소유를 간과하고 있었다.0166) 이후 이같은 한국 중세의 토지소유구조의 특징이 유럽과 다르고 또 일본의 그것과도 다르다는 점이 주목되면서 사적 토지소유의 발달형태가 검토되었다. 그 결과 사적 토지소유에 입각한 中世史像이 구체화되게 되었고 기존의 국유론은 비판되었다.0167)
그 후 왕토사상에 대한 역사적 실체를 收租權的 土地分給制로 정리해냄으로써 소유권적 토지지배를 설명할 수 있게 되었고 이러한 연구가 심화되면서 중세의 토지소유구조에 대한 이해는 보다 분명해질 수 있게 되었다.0168) 이같은 수조권적 토지분급제는 조선 초기 職田法을 계기로 소멸되었고 이로써 이전부터 발전해온 소유권에 입각한 토지지배는 더욱 확대·발전하게 되면서 근대적 소유로 전환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조권적 토지지배에 대한 이해는 논자에 따라 차이가 있다. 그 주된 차이는 국유론의 입장은 아니지만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규정적 성격을 강조한다는 점에 있다. 예컨대 사적 토지소유권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사적 토지소유권을 수조권적 토지지배의 테두리 안에 있는 것으로 파악하는 방식이 그것이다.0169) 이러한 입장에서는 사적 토지소유란 늘 통치체제의 규정을 받는다고 이해된다. 그러한 이해는 아시아적 특질론의 입장에서 또다른 형태로 이론화되어 나타났다. 소농경영의 생성-발전-해체로서 중세를 이해하려는 입장으로 사적 토지소유를 철저하게 비판하면서 제기된 ‘국가적 토지소유론’이 그것이다.0170)
이같은 연구를 통하여 중세 토지소유의 구조에 대해 보다 깊은 이해를 갖게 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역사적 실체이다. 지주제의 구조와 변동을 보다 명확히 설명해줄 수 있는 관건으로서 토지 매매의 역사적 성격을 추적하는 것도 그와 같은 작업의 일환이다. 그것은 곧 토지상품화 과정의 일환이기 때문이다.
18세기 중엽 이래 농법 개량이나 농업생산력 발달에 수반하여 나타난 농촌사회 분해는 토지소유의 분해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빈익빈 부익부 현상은 토지를 중심으로 가속화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현상은 전국 차원의 場市를 배경으로 한 상품화폐경제 발달이 토지로부터의 농업생산물뿐 아니라 토지 자체를 상품화시켜 가고 있었다는 점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그것은 토지사유를 기반으로 한 봉건적 토지소유의 구조적 특질에서 연유한 것이다. 그것은 우선 토지상품화의 계기가 무엇이고 나아가 토지상품화가 어떻게 진행되면서 농촌사회가 분해되었는지를 검토할 때 비로소 명확해질 수 있다.
토지가 상품화되기 시작한 계기는 토지의 사적 소유와 매매에서 찾아질 수 있다.0171) 토지소유와 매매가 활발해지고 있었다는 점은 조선 후기 토지소유의 구조적 특질로서 주목된다.
토지나 노비에 대한 소유권 취득 방법에 대해서는 법전에 잘 나타나 있다.≪經國大典≫에 규정된 법 조문에 따르면 토지에 대한 소유권 취득은 관청으로부터 立案을 발급받음으로써 완료된다. 즉 田地와 家舍, 노비에 관한 매매는 100일 내에 官에 신고하고 입안을 받아야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0172) 입안을 받기 위해 매수인은 財主나 증인·筆執의 날인을 받아 매도인이 거주하는 관청에 입안 신청을 하면 해당관의 서명을 받아 입안을 발급받을 수 있다. 따라서 양반 관료의 경우는 수조지로 받은 토지 외에 매매·상속 등을 통해 대토지소유자가 될 수 있었다.
한편 매매 관행상 거래되던 賣買文記는 입안과 무관하게 유통되고 있었다. 매매문기에 기재된 일정한 형식을 통해 자신의 소유를 보호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관에서는 100일이 지난 후에도 신청만 하면 입안을 발급해주기 때문에0173) 점차 입안을 받지 않는 白文 매매가 성행하게 된 배경이 되었다. 예컨대 노비 매매 외의 전답문서는 중앙과 지방을 막론하고 관에서 입안 증명을 받지 않았고 그러한 관행이 일반화되고 있음이 그러한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0174) 그러나 입안을 통한 소유권 취득은 소유권 분쟁이 있을 때 강력한 공증력을 갖고 있었다. 때문에 매매문기로 소유권 판정이 어려울 때는 입안을 한 경우가 최종 판결에서 승소할 수 있었다.
입안과 매매문기 외에 소유권 행사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했던 것은 量案이었다. 국가적인 차원의 양전으로서 인조 12년(1634)의 갑술양전과 숙종 46년(1720)의 경자양전은 조선 후기 토지소유권의 결정적 근거를 제공해주고 있었다.0175) 양란 후 황폐화된 陳田 개간이나 閑曠地를 배경으로 한 소유권 취득 과정은 17세기 이후 소유권 분쟁의 주요인이 되고 있었으며 이 때마다 매매문기와 입안·양안의 기재 여부가 소유권 판정의 근거가 되고 있었다.
無主地인 진전이나 한광지 개간에 따른 소유권 취득은 17세기 농업생산력 발달을 배경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었다.0176) 소유권 행사에 있어 문제가 되고 있었던 것은 크게 세 가지 경우이다. 본래 양안에 소유주가 존재하던 有主陳田과 소유주가 없던 無主陳田, 그리고 양안에 파악되지 않았던 한광지인 新墾田이 그것이다.
첫번째 경우는 3년이 지난 진전은 다른 사람으로 하여금 경작케 한다는 조선 초기 이래의 법 규정이 있다.0177) 질병으로 인해 경작하지 못하는 경우도 친족 및 이웃 사람에게 경작토록 하고 있었다.0178) 이 때 타인에게 경작토록 한 것은 소유권 급여가 아니기 때문에 본래의 소유주가 원하면 되돌려주어야 했다.0179) 두번째와 세번째의 경우가 소유권 분쟁의 주요인이 되고 있었다. 국가는 전국적인 양전을 통해 稅源을 확정하고 나아가 개인 소유지를 파악하는 과정에서 量主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었다. 나아가 소유권의 연원을 분명히 하기 위해, “진전은 모두 陳主名을 기록하고, 주인이 없으면 역시 無主라고 懸錄한다. 양전 후 만일 경작하기를 원하는 자가 있으면 本曹에서 입안을 받은 후 법에서 정한 대로 자기의 소유로 한다”0180)고 하여 양안에 소유주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양주와 같이 진주·무주를 기록하여 소유권 행사에 있어 분쟁의 소지를 없애고자 하였다.0181) 진전·무주전은 입안을 받아 경작할 때 자기의 소유지로 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양반 세력가들은 입안을 통해서만 토지를 탈점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단지 입안을 통해 자신의 소유지로 만들어 놓고 경작하지는 않고 있다가 起耕者가 나타나 개간하면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섰다.0182) 국가에서는 한 장의 문서만으로 경작자로부터 토지를 탈취하거나 입안을 매매해 버리는 것을 원치 않고 있었다. 따라서 분쟁이 있을 때는 양안에 어떻게 기록하고 있는가를 근거로 판정하였다. 양안에는 입안을 받고 경작하는 자를 소유주로 등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양안에 등재되지 않았던 海澤地나 한광지의 경우도 ‘立案者’보다 ‘起耕者爲主’로 개간을 유도하고 있었다.0183) 이 때문에 “한광지는 기경자를 소유주로 하며 미리 입안만 내놓고 경작하지는 않으면서 경작자의 토지를 빼앗으려는 자 및 입안을 근거로 매매해버리려는 자는 侵田田宅律로 논한다”0184)고 법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살펴본 대로 양안과 입안·매매문기를 근거로 행사되던 토지소유 자체는 하나의 권리로서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물론 농업생산력 발달에 따른 토지 집적의 욕구와 그 생산물의 상품화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단계라야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었다. 17·18세기의 토지 개간과 활발한 매매 과정은 매매형태를 넘어 토지 자체를 상품화시키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토지 매매는 조선 후기 농민층의 존재형태를 그대로 반영해 주고 있었다. 정약용은 당시의 호남지방의 농민을 대략 100호로 볼 때 지주가 5호, 자작농이 25호, 작인이 70호에 달한다고0185)고 분석하였다. 이같이 토지를 갖지 못한 농민을 70%로 본다는 것은 농민층의 토지가 여러 가지 요인에 의해 지주층에 매도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첫째 요인으로서 직전법 붕괴와 더불어 수조권적 토지분급제가 소멸되면서 토지매매가 가속화되고 있었다는 점이 주목된다.0186) 양반 관료조차 국가로부터 분급되던 토지가 사라지고 급료가 지급되기 시작하자 토지소유와 경영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같은 현상은 물론 이전부터 확대되어 오던 토지매매를 전제로 더욱 확대되었다. 이 때 토지를 방매하는 자는 노비·서민층에서부터 양반에 이르기까지 다양했다. 토지를 매입하여 대지주가 될 수 있는 자도 왕실이나 宮房·衙門 등뿐 아니라 양반 관료·상인·서민·노비 등 모든 계층에 이르고 있었다. 양반층도 이제는 경영에 주력하지 않으면 몰락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양반도 몰락하면 작인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그것도 안되면 품을 팔아야만 하는 雇工이 되어야 했다. 신분에 의해 유지되던 사회는 점차 토지소유의 정도에 따라 지주 또는 부농, 중소농, 빈농, 몰락농이나 임노동층으로 구분되기 시작했다.
두번째 요인으로는 상업적 농업이 발달함에 따라 토지에 대한 투자가치가 한층 높아졌다는 점을 들 수 있다. 농산물의 상품화가 일반화됨에 따라 농업경영에 더욱 몰두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미곡이 전국 시장을 대상으로 富商들에 의해 거래되고 있었고, 콩이나 담배·인삼·麻·木棉 등도 재배지역을 중심으로 점차 확대되고 있었다. 그것은 상품작물이 점차 시장을 대상으로 재배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특히 농산물의 주류를 이루던 미곡은 17세기 이후 전국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이앙법을 배경으로 더욱 빠르게 상품화되었다.0187) 이앙법은 모내기나 제초작업이 편하기 때문에 수리관개만 해결되면 광작농에게는 더할 나위없는 농업기술이었다. 또 노동력이 크게 절감될 뿐 아니라 노동력을 효과적으로 이용할 수 있었기 때문에 더욱 널리 보급되었다.
지금까지 토지의 사적 소유에 기반을 둔 토지매매와 소유권 쟁탈의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고, 그것이 수조권적 토지분급제의 소멸과 생산력 발달에 따른 토지상품화의 진전에 따라 더욱 확대되어 나타날 수밖에 없었던 상황도 검토해 보았다.
이러한 결과 조선 후기 토지소유는 점차 신분과 무관하게 나타나기 시작했다는 점이 확인되었다.0188) 양반 관료의 경우는 수조지를 받지 못하게 되면서 매매·개간·증여·상속 등의 방법을 통해서만 토지집적이 가능하게 되었다. 이같은 방식은 양반이라도 토지를 소유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고 나아가 몰락할 가능성을 내포하게 된다. 반대로 양민층의 경우는 자신의 노력으로 토지를 집적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다. 서민층 가운데서도 지주가 나올 수 있고, 노비층 가운데서도 대토지소유자가 나타날 수 있게 되었다.
사적 소유에 기반을 둔 토지소유와 신분으로부터 유리되기 시작한 토지소유형태는 결국 농촌사회를 변화시키는 주요인이 되었고 구체적으로는 가장 기본적인 생산관계인 지주제를 변화시키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지대는 경제외적 강제를 매개로 실현되고 있었지만, 점차 경제적 강제를 통한 지주경영으로 변화하게 되었다. 신분적으로도 지주와 작인은「奴主之分」에서 벗어나게 되었고 점차 계약적인 관계로 이행하고 있었다.
17세기 이후의 사회변동은 이같은 신분제 내의 상호관계의 진전과 더불어 신분간의 이동이 확대되는 형태로 나타났고, 자유로운 사적 토지소유를 매개로 더욱 활발하게 신분상승을 꾀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사회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동을 맞게 되었다.
0165) | 李成茂,<公田·私田·民田의 槪念>(≪朝鮮初期兩班硏究≫, 一潮閣, 198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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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6) | 중세의 토지소유와 경영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이 참고된다. 李世永,<조선후기 토지소유형태와 농업경영 연구현황>(≪韓國中世社會 解體期의 諸問題≫下, 近代史硏究會編, 한울, 1987). 李榮昊,<조선시기 토지소유관계 연구현황>(위의 책). |
0167) | 金容燮,<前近代의 土地制度>(≪韓國學入門≫, 學術院, 1983). |
0168) | 李景植,≪朝鮮前期 土地制度 硏究-土地分給制와 農民支配-≫(一潮閣, 1986). |
0169) | 宮嶋博史,<李朝時代の地租制度と私的土地所有の展開>(≪朝鮮土地調査事業史の硏究≫(東京大學 東洋文化硏究所, 1991). |
0170) | 李榮薰,≪朝鮮後期 社會經濟史≫(한길사, 1988). |
0171) | 周藤吉之,<朝鮮後期の田畓文記に關する硏究>(≪歷史學硏究≫7-7·8·9, 1937). 朴秉濠,≪韓國法制史特殊硏究-李朝時代의 不動産賣買及擔保法-≫(韓國硏究院, 1960). |
0172) | ≪經國大典≫戶典 賣買限. |
0173) | ≪大典續錄≫刑典 私賤. |
0174) | ≪英祖實錄≫권 28, 영조 6년 2월 계해. |
0175) | 金容燮,<量案의 硏究>(≪증보판 朝鮮後期農業史硏究≫Ⅰ, 지식산업사, 1995). 吳仁澤,<量田과 土地所有權>(≪17·18세기 量田事業 硏究≫, 釜山大 博士學位論文, 1996). |
0176) | 李景植,<17世紀의 農地開墾과 地主制의 展開>(≪韓國史硏究≫9, 1973). |
0177) | ≪經國大典≫戶典 田宅. |
0178) | ≪經國大典≫戶典 務農. |
0179) | ≪受敎輯錄≫戶典 諸田. |
0180) | ≪新補受敎輯錄≫戶典 量田. |
0181) | ≪續大典≫戶典 量田. |
0182) | ≪新補受敎輯錄≫戶典 量田. |
0183) | ≪新補受敎輯錄≫戶典 諸田. ≪受敎輯錄≫刑典 聽理. |
0184) | ≪續大典≫戶典 田宅. |
0185) | 丁若鏞,≪與猶堂全書≫1, 권 9, 文 擬嚴禁湖南諸邑佃夫輸租之俗箚子. |
0186) | 金容燮, 앞의 글(1983). 李景植,≪朝鮮前期 土地制度硏究-土地分給制와 農民支配-≫(一潮閣, 1986). |
0187) | 金容燮,<朝鮮後期의 水稻作技術>(≪朝鮮後期農業史硏究≫Ⅱ, 一潮閣, 1971). |
0188) | 허종호, 앞의 책. 金容燮,<朝鮮後期 身分制의 動搖와 農地所有>(앞의 책, 1995). ―――,<朝鮮後期 身分構成의 變動과 農地所有>(위의 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