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주요수산물
한반도의 3면을 둘러싸고 있는 연안 어장은 황금 어장이라고 불릴 정도로 다종 다양한 수산자원이 매우 풍부하였다. 남획으로 자원이 고갈되고 있는 오늘날에는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어류는 많은 어군이 연안에 서식하거나 육지에 가까운 연안까지 來游하였으므로 비교적 쉽게 많이 잡을 수 있었다. 특히 漁具의 규모가 큰 경우에는 단기간에 대량으로 어획하였다. 그 양은 생산지의 국지적 수요를 훨씬 초과하는 것이었으나 상품화폐경제의 발달로 광범위한 지역에서 판매될 수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대량 생산이 가능하였다. 대량으로 생산되어 염가로 팔림으로써 많은 사람이 소비하는 어류를 多獲性 大衆魚라고 한다. 조선 후기의 다획성 대중어를 대표하는 것은 명태·조기·청어·대구·멸치 등이었고, 갑각류에 속하는 새우도 많이 잡혔다. 이들의 양산 상황을 개별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가) 명 태
조선 후기의 다획성 대중어의 왕자는 명태였다. 명태는 함경남도를 중심으로 하여 함경북도와 강원도에서 어획되었다. 명태는 17세기에 이미 많이 생산되어 閔鼎重은 “내가 元山을 지날 때 물고기(명태)가 五江(漢江·龍山·麻浦·玄湖·西江)에 땔나무 같이 쌓여 있는 것을 보았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0537)고 하였다. 19세기초 徐有榘도, 함경도에서 생산되는 명태는 마른 명태로 만들어져 사방의 상인이 모이는 원산에 집하되고, 거기에서 배에 실어 동해를 돌아 운수하거나 말에 실어 鐵嶺을 넘는데 밤낮없이 人馬의 왕래가 끊이지 않았으며, 그 수량이 많아 전국에 넘쳐 흘렀는데 우리 나라 해산물 중에서 명태는 청어와 더불어 가장 많은 것이라고 하였다.0538) 원산은 바닷길로 六鎭과 통하므로 6진과 연해 여러 읍의 상선이 모두 여기에 정박한다고0539) 하였는데, 이 원산이 명태의 집산지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李圭景은≪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마른 명태가 전국에 두루 유통되고 그 값이 1尾에 數文인데 사방의 값이 같다고 하여 명태가 염가로 널리 유통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또 그는 명태는 날마다 먹는 반찬으로, 여염의 빈민은 제사지낼 때에 쓰고, 儒家에서도 가난한 사람은 역시 제수용으로 쓰는데 천하게 쓰면서도 귀한 것이라고 하였다.0540) 19세기 중엽에도 명태는 어족 중 많이 잡혀 깊은 산골과 僻邑일지라도 모두 이를 싫도록 먹는다고 하였고0541) 그 후엽에도 매년 수천 石씩 잡혀 전국적으로 꽉 찼다고 한다.0542)
명태는 산지가 동해안 북부지역에 한정되어 있었으나 대량으로 어획되어 그 건제품이 광범위하게 유통되었던 것이다. 마른 명태인 北魚는 경상도는 물론, 생산지에서 멀리 떨어진 충청도의 恩津과 황해도의 新溪지방 시장에도 출하되었다.0543)
나) 조 기
조기는 石首魚라고 표기하였는데 이는 주로 참조기를 가리킨다. 조기는 전라도의 서부 해안을 중심으로 하여 서해안 일대에서 많이 잡혀, 과거에는 ‘전라도 명태’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전라도에서 함경도 명태처럼 많이 잡히는 물고기라는 뜻이다. 서해안의 다획성 대중어를 대표하였던 조기는 생산량에 있어서 명태와 백중지간이었다.
조기는 조선 초기부터 많이 잡혔으나 후기에는 보다 많이 잡혔다. 19세기초 조기를 어망으로 잡을 때 내유하는 어군을 만나면 산더미처럼 많이 잡혀 배에 다 실을 수 없을 정도였다고 한다.0544) 대어군이 회유하면 延坪島 바다의 조기 우는 소리가 우레소리처럼 시끄럽게 서울에 들려왔다고 한다.0545) 참조기는 산란기에는 떼를 지어 바다 바닥 가까이 헤엄쳐 다니다가 개구리 소리와 비슷한 울음소리를 내는 특성이 있으므로 이러한 표현을 한 것이다. 조기가 시끄러운 소리를 내면서 농밀한 대어군을 이루며 내유할 때 대형 어망으로 잡으면 대량으로 잡을 수 있었다.
서유구는≪난호어목지≫에서 조기의 북상 회유경로를 설명한 뒤 “장사하는 사람이 운집하여 배로 사방으로 운수한다. 굴비와 조기젓이 전국에 흘러 넘친다. 귀한 사람이나 천한 사람이 모두 이를 진중시한다. 海族 중에서 가장 많고 가장 맛이 있는 것이다”0546)라고 하여 조기의 가공품이 전국에 유통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조기가 많이 잡혔던 群山島(古群山群島)에서는 해상에서 조기를 매매하는 波市가 열리기도 하였다. 즉 “앞에는 魚梁이 있는데 매년 봄과 여름의 어기가 되면 각 읍의 상선이 구름이나 안개처럼 빽빽히 모여들어서 해상에서 판매한다. 주민은 이로써 부유해져 집과 의복을 다투어 다듬는데 그 호사함이 육지 백성보다 심하다”0547)고 하여 많은 상선이 어장에 나가 어선으로부터 조기를 사가지고 와서 팔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상선 중에는 冷藏船 또는 氷藏船이라고 하여 빙장 시설을 갖춘 것도 있었다.
다) 청 어
청어는 지금은 우리 나라 연안 어장에서 거의 잡히지 않는다. 수온의 상승으로 冷水性 어류인 청어가 연안에 내유하지 않는 것이 주된 원인으로 생각된다. 조선시대에는 전라남도의 남해안을 제외하고는 전 연안에서 청어가 잡혔고, 그 생산량도 많았으나 17세기초에 청어의 내유가 한때 중단되는0548) 등 자원의 변동이 심하였다.0549) 18세기에는 청어가 많이 잡혀 흔히 먹는 생선으로 손꼽혔고0550) 19세기초에도 초여름에 청어가 사방 수백 리 사이의 바다를 메우고 이를 먹지 않는 사람이 없었는데 海州·延安·白川·安岳·信川 사이에 가장 많았다고 한다.0551) 청어가 회유하여 마지막으로 해주 앞바다에 이르면 더욱 살이 찌고 맛이 있었는데, 그것이 회유할 때에는 무수히 많은 청어가 떼를 지어 조수를 따라서 바다를 메웠고 3월이 되면 회유를 그쳤다고 한다.0552)
다음의 기록에서 이와 같은 해주를 중심으로 한 청어의 대량 생산과 자원 변동상황을 상세히 알 수 있다.
대개 연해에서 나는 곳에는 모두 그 시기가 있으나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사시로 언제나 있으며 초여름에 해주에 이르러 그친다.…대체로 해주에서 생산되는 것이 나라 안에 넘친다. 기미년(1799) 이후부터 20미를 엮어서 1級으로 하여 동전 2∼3문과 바꾸었다. 순조조의 경인·신미년(1830∼1831)간에는 1급의 값이 40∼50문이었고 점차 등귀하였다. 헌종조 을미년(1835) 이후에는 다시 점차 흔하여졌으나 끝내 기미년 이후만은 못하였다(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11, 鱅魚辨證說 附帶魚).
한편 정월에 갯가에 들어와 해안을 따라 회유하면서 산란하는 청어는 영남에서 나는 것과 호남에서 나는 것이 각각 척추골 수가 달랐다.0553) 청어는 서해안산과 동·남해안산이 계통군을 달리하는 어류이기 때문이다.
서해안의 청어는 19세기 후반부터 점차 감소되었다. 蝟島 앞바다에서는 19세기 중반부터 청어 자원이 감소하였고,0554) 그 뒤 서해안의 각처에서 청어의 내유가 점차 중단되었다. 그러나 경상도의 남해안과 동해안에서는 계속하여 청어가 잡혔다.
라) 멸 치
멸치가 오늘날과 같은 명칭으로 문헌에 등장하는 시기는 18세기 중엽부터이다.≪均役行覽≫에 의하면 영조 26년(1750)말 전라도 均稅使의 稟議에 ‘滅致網’이라는 것이 보인다.0555) 조선 전기에는 보이지 않았던 멸치라는 명칭이 후기에는 사용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어보류 중에서 멸치가 처음으로 실려 있는 것은 1803년에 저술된≪牛海異魚譜≫이다. 이 책에는 멸치를 鱴兒라고 하고, 지방민은 이를 幾라고 하는데 이는 방언인 鱴을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다.0556)≪오주연문장전산고≫에서도 멸치를 幾魚 혹은 旀魚라고 한다고 하였다.0557) ‘기’는 ‘몃’과 통한다.≪자산어보≫에서는 멸치를 鯫魚라고 하고 그 속명을 蔑魚라고 한다고 하였다.0558)
19세기 이전의 멸치 어획 상황은 잘 알 수 없으나 19세기로 넘어온 뒤에는 멸치가 많이 잡히고 있었음을 실학자들의 저서를 통하여 알 수 있다.≪난호어목지≫에는 멸치를 한자로 鮧鰌라고 쓰고 한글로는 ‘몃’이라고 썼는데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설명을 하고 있다. 즉 멸치는 동·남·서해에 모두 있다는 것, 동해의 멸치가 방어에 쫓겨 대량으로 몰려올 때에는 그 세력이 바람·물결과 같아서 어부는 이를 보고 방어가 온 것을 안다는 것, 큰 그물로 이를 포위하여 잡으면 온 그물이 모두 멸치로 차므로 그 중에서 방어를 골라내고 멸치는 사둘(攩網)로 퍼내어 모래사장에서 말려 육지에 파는데 값이 한 웅큼에 1전이라는 것, 비가 계속 내려 부패될 때에는 비료로 쓴다는 것, 서·남해산은 동해에서 많이 생산되는 것보다는 못하나 역시 나라 안에 흘러 넘치고 野人이 먹는 식품이 된다는 것 등이다.0559)
전연안에서 멸치가 잡혔으나 동해안에서 가장 많이 잡혔고 19세기초에는 대량 생산되어 이를 건조한 마른 멸치가 전국적 규모로 유통되고 있었던 것이다. 멸치는 한 그물로 배를 채우고 산처럼 많이 잡는다고 표현할 정도로 어획량이 많았고 마른 멸치는 매일 먹는 반찬이 되었으나 마른 명태인 북어가 전국에 두루 넘치는 것보다는 못하였다고 한다.0560)
마) 대 구
한자로 㕦魚라고 쓰는 대구는0561) 동·서·남해안에서 모두 잡혔다.≪惺所覆瓿藁≫에서 대구에 대하여 “동·남·서해에서 모두 생산되는데 북쪽 지방 것이 가장 크고 빛깔이 누렇고 살이 쪄 있다. 동해 것은 빛깔이 붉고 작은데 중국인이 이를 가장 좋아한다. 서해 것은 더욱 작다”0562)고 하여 우리 나라 연안에 분포하는 대구가 동해계와 서해계의 2계통이 있고, 서해계는 동해계보다 작음을 전하고 있다.
조선 후기에 대구가 대량으로 어획되었음을 직접적으로 전하는 문헌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대구의 주산지였던 鎭海를 중심으로 한 경상남도 남해안에 후술하는 바와 같이 청어·대구 어획용 대규모 防簾이나 대규모 정치망이 많이 설치되었던 것을 볼 때 대구도 다획성 대중어의 하나였음을 알 수 있다. 구한말에 대구 생산 금액은 청어의 생산액과 큰 차이가 없을 만큼 많았다.0563) 명태가 동해안을, 조기가 서해안을 대표하는 어류였다면 대구는 남해안을 대표하는 어류였다고 할 수 있다.
바) 새 우
갑각류에 속하는 새우도 많이 잡혔다. 앞서 본 바와 같이≪여지도서≫에 의하면 새우는 大蝦·中蝦·紅大蝦·白蝦·紫蝦 등 여러 가지가 잡혔는데, 많이 잡힌 것은 새우젓 가공용 새우였다. 곤쟁이젓(紫蝦醢)은 조선 초기부터 생산되고 있었고 19세기초에는 새우를 젓갈로 가공한 것이 전국적으로 널리 소비되고 있었다.
새우젓을 담그는 소형 새우는 주로 서해안에서 잡혔는데 이것을 糖鰕라고 하였다. 당하는 쌀새우를 말하며, 쌀새우는 細鰕라고도 하였는데, 이것이 곧 젓새우이다. 젓새우는 마른 새우로도 많이 가공하였는데 이것을 米鰕라고 하였다.0564) 새우를 잡으러 갈 때에는 어선에 독과 소금을 미리 싣고 나가서 새우를 잡는 즉시 젓갈을 담갔는데, 모두 서남해산이었고, 해주 앞바다에서 생산되는 것이 보다 잘고 부드러워 맛이 좋았다고 한다.0565)
0537) | 李裕元,≪林下筆記≫권 27, 春明逸史 明太.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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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538) | 徐有榘,≪蘭湖漁牧志≫魚名攷 海魚 明鮐魚. |
0539) | 李重煥,≪擇里志≫八道總論 咸鏡道. |
0540) | 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11, 北魚辨證說. |
0541) | 趙在三,≪松南雜識≫3, 漁獵類 14, 魚鳥類 北魚明太. |
0542) | 李裕元,≪林下筆記≫권 27, 春明逸史 明太. |
0543) | 徐有榘,≪林園十六志≫倪圭志 권 4, 貨殖 八域場市. |
0544) | 丁若銓,≪玆山魚譜≫권 1, 鱗類 石首魚. |
0545) | 丁若鏞,≪經世遺表≫권 14, 均役事目追議 1, 海稅. |
0546) | 徐有榘,≪蘭湖漁牧志≫魚名攷 海魚 明鮐魚. |
0547) | 李重煥,≪擇里志≫卜居總論 山水. |
0548) | 許筠,≪惺所覆瓿藁≫권 26, 說部 5, 屠門大爵 靑魚. |
0549) | 청어 자원 변동에 관해서는 朴九秉,<韓國청어漁業史>(≪釜山水産大學論文集≫17, 1976), 1∼38쪽. |
0550) | 李瀷,≪星湖僿說≫萬物門 靑魚. |
0551) | 徐有榘,≪林園十六志≫倪圭志 권 3, 貨殖 八域物産 總論. |
0552) | 徐有榘,≪蘭湖漁牧志≫魚名攷 海魚 靑魚. |
0553) | 丁若銓,≪玆山魚譜≫권 1, 鱗類 靑魚. |
0554) | ≪備邊司謄錄≫241책, 철종 5년 10월 11일. |
0555) | ≪均稅行覽≫報備局稟議成冊. |
0556) | 金鑢,≪牛海異魚譜≫魚烝魚糵. |
0557) | 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11, 鰮魚辨證說. |
0558) | 丁若銓,≪玆山魚譜≫권 1, 鱗類 鯫魚. |
0559) | 徐有榘,≪蘭湖漁牧志≫魚名攷 海魚 鮧鰌. |
0560) | 李圭景,≪五洲衍文長箋散稿≫권 22, 鯨鰐辨證說. |
0561) | 徐有榘,≪蘭湖漁牧志≫魚名攷 無鱗魚 㕦魚. |
0562) | 許 筠,≪惺所覆瓿藁≫屠門大爵 大口魚. |
0563) | 農商工部水産局,≪韓國水産誌≫1(1908), 256·259쪽. |
0564) | 徐有榘,≪蘭湖漁牧志≫魚名攷 無鱗魚 鰕. |
0565) | 徐有榘,≪林園十六志≫佃漁志 권 3, 弋獵 取細鰕法.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