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공인의 활동과 그 추이
공인들은 관부의 막대한 수요물품을 독점적으로 조달하는 특권을 누리면서 상업활동을 펴 나갔다. 공계인들은 이러한 특권을 바탕으로 관아에 조달할 물품을 매점하기 위하여 도고를 차리고 이를 통해 관부에의 납부를 구실로 상품생산자로부터 헐값에 강제 매입하기도 하였다.0813) 또한 紙契공인과 같은 상인적 공인들은 생산자를 장악하기 위하여 先貸制的인 지배를 가하려고도 하였다. 공인들은 공가면에서도 매우 후한 가격을 지급받도록 법제적인 지원도 받고 있었다.0814) 대동법 실시 초기 공인을 위하여 시가의 10배를 공가로 지급하였다는 이야기0815)가 있을 정도였다. 물론 이와 같은 후한 공가가 계속해서 지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보이지만, 적어도 일정 시기까지는 공인에게 시가보다 후한 공가를 주어 이들의 활동을 경제적으로 지원해주려는 움직임이 대세였을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정부의 지원과 보호, 그들 스스로가 도고라 불렀던 독점적 매점활동을 통해 공인들은 상당한 부를 쌓아 갔다. 영조 45년(1769)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6도에서 공인들에게 지급한 공가가 미곡 130,656석, 布木 97,823필, 錢貨 249,688냥에 달하고 있었다.0816) 목재공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外繕工監공인의 경우 원공가 2,200여 석, 별무가 560∼800석 정도의 공가를 지급받고 있었다.0817) 수공업자적 공인 중에는 공물뿐만 아니라 사사로운 수용물품까지 제조·판매함으로써 더욱 많은 이익을 누리기도 하였다. 생산시설을 보유한 부민들로서 공장을 고용, 公私수용품을 제조·판매하던 三南月課火藥契공인의 경우를 보면, 삼남월과화약을 공가로 지급받아 납품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관·사수용 화약을 私造·판매함으로써 상당한 이익을 남기고 있었다.0818)
정부로부터 부여받은 공인권은 상업활동을 보장하는 특권으로서의 가치를 지녔던 만큼 상업적 이윤을 추구하려는 사람들에게는 매력의 대상이자 투자의 효용성이 매우 높은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다. 광범한 공인권 매매의 사례가 이를 대변해주지만, 공인권의 소유권과는 별개의 경영권인 分主人權이 성립되기도 하였으며,0819) 17세기말 이후에는 새로운 공인권 창설운동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0820) 경주인권과 영주인권 역시 일정한 이익을 담보한 권리로서 고가로 매매되었다.
그렇지만 공인들의 자본집적이 순탄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앞서 예로 들었던 삼남월과화약계공인의 경우 영조 4년 李麟佐의 난을 계기로 다음해 화약의 사조·私賣가 금지되자 사적 판로를 잃게 되었고, 이후 이들은 겨우 명맥만 유지한 채 민간인들의 潛造·潛賣가 주류를 이루게 되었다.0821) 물론 삼남월과화약계공인의 경제적 처지가 변화하게 된 주요 원인은 이인좌의 난이라는 외부적 계기에서 찾을 수도 있다. 그러나 공인이 안고 있던 문제는 공인의 발생과 기능 유지가 정부의 필요와 재정적 지원에 바탕을 두고 있다는 보다 근본적인 구조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즉 대동법 실시 초기와 같은 후한 공가의 지급과 같은 재정 지원이라든가 국가의 공물정책의 일관성과 지속성, 공물상납과정에서의 貢弊 유무에 따라 공인의 활동 자체가 심대한 영향을 받게 되어 있던 것이다. 또한 공인의 활동에 대항하여 상업적 이윤을 잠식하려는 상인집단의 존재 여부도 공인의 지속적인 영업활동에 무시할 수 없는 변수로 작용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우려는 결국 현실로 나타나게 되었고 적지 않은 공인들이 공계를 떠난다거나 공계 자체가 해체되는 결과를 맞기도 하였다. 공인에게 있어 가장 큰 관심사는 이윤이 보장되는 수가와 進排, 즉 시가보다 후한 공가의 수납과 납부해야 할 공물의 원활한 조달이었다. 하지만 시가보다 헐한 공가가 지급된다든가 상납해야 할 공물의 구입이 어려워지게 되면 공인의 경제적 처지와 사정 역시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인삼을 납부하던 공인의 경우 초기에는 비교적 후한 공가가 지급되어 인삼의 상납과정에서 일정한 이윤을 누릴 수가 있었다.0822) 그렇지만 점차 인삼의 품귀 현상이 나타나면서 蔘價가 지속적으로 앙등하게 되자 공인이 받고 있던 원공가로서는 삼가의 상승을 당해낼 수가 없는 형편이 되고 말았다. 이에 공인들은 원공가 이외에 다음해의 공가까지 미리 지급받아 해결해보려 하였지만, 결국은 나라에 대한 부채만 늘어나는 결과만을 가져오고 말았다.0823) 인삼납부공인의 하나였던 獤蔘契人 역시 시가와 應役價의 차이를 감당하지 못한 채 위조인삼을 상납하였다가 行首가 유배되는 경우까지 겪게 되었다.0824) 시가와 공가와의 현격한 차이는 분명 공인에게는 貢弊였다. 정부에서도 이 점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정부가 택한 길은 공가의 증가가 아닌 私貿였다. 공인 발생 초기에 정부가 채택했던 공물정책이 변화하게 된 것이다. 즉 원공으로부터 공가가 낮은 별무로, 별무로부터 사무의 방향으로 전환하게 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공인의 지속적인 경제적 성장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일이었다.
이같은 경우는 선혜청 57공 속에 들어 있던 關東蔘契人 경우에 극명하게 나타나고 있다. 영조 35년(1770)에 창설된 관동삼계는 창설될 당시 이미 인삼의 시가가 공가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더구나 관동삼계가 관동인삼을 京貿하기 위하여 설립된 것인데도 다른 지역의 인삼까지 납부해야 하는 처지에 있었다. 또다른 형태의 공폐였던 셈이다. 결국 관동삼계는 헌종 11년(1845) 16만 냥의 엄청난 부채를 탕감받은 채 혁파되고 말았다.0825)
이와 같은 양상은 목재를 조달하던 공인의 경우도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시가의 변동에 따른 공가의 부족이라든가, 본래의 예에도 없는 공가의 지급없이 납부해야 하는 경우, 혹은 上司의 點退, 지방 營邑의 강제적인 수세 등 여러 형태의 공폐로 인하여 공인들의 사정은 처음과는 달리 점차 어려운 상태로 되어 나갔다. 예컨대 상사의 횡포로 말미암아 유한한 재력의 공인이 무한한 주구를 어떻게 견디겠느냐 라는 말0826)은 목재공인의 사정이 어떠했는가를 잘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형편 속에서 공인들 가운데에는 상당액의 부채를 지게 된 사람들이 나오게 되었고, 국용 목재의 공급을 포기하는 일까지도 생겨나게 되었다. 영조 25년 목재공인 가운데 가장 규모가 컸던 외선공감공인이 1차 혁파되었고, 6년후 외선공감공인의 일부의 요청에 따라 다시 목재공납이 수행되었지만, 같은 왕 44년 균역청·濬川司·각 軍門 등에 진 42,000냥의 공·사부채만을 안고 완전 혁파되게 되었다. 공가가 목재시가의 절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공폐의 시정 내지 극복이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다.0827)
숙종 20년(1694) 水牛角 조달을 위하여 창설된 弓角契 역시 초기에는 공계라는 합법적 공간을 통해 수우각무역을 독점할 수 있었다. 궁각의 원활한 조달을 바라는 정부의 뜻과 수우각무역을 독점하려는 東萊商賈와 역관의 의도가 합치되어 성립된 궁각계는 일본 對馬藩으로부터 公貿易으로 수입되는 동과 납 가운데 生銅 20,836근 8냥, 常鑞 15,613근 8냥을 동래부로부터 공가로 지급받았다. 1710년대 이후에는 동의 공무역 수입량의 70% 이상이 공가로 주어져 동전 주조의 원료로 판매되기도 하였다.0828)
그러나 궁각계공인들은 점차 수우각무역이 부진해지면서 공폐를 겪게 되었다. 공폐는 주로 공가 지급의 부족에서 빚어졌다. 더욱이 일본동의 수입 부진으로 말미암아 공가를 제대로 지급받지 못한 채 ‘無價進排’를 해야 하는 일까지 생겨나게 되었고, 이러한 공폐는 더욱 증가하는 양상을 보이게 되었다. 결국 1830년대 이후 대마번으로부터의 공무역 수우각수입은 중단되게 되었다. 물론 이후에도 궁각계가 혁파되거나 궁각계공인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적어도 철종 12년(1861)까지는 궁각계가 존속하고 있었다. 조달 공물이 수입되지 않는 상태에서도 궁각계가 존재하고 있었던 것을 보면,0829) 궁각계공인들이 과거의 독점무역에서의 막대한 이윤을 뒤로 한 채 새로운 돌파구를 열어 나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수우각을 통한 궁각계공인의 상업적 이익은 더 이상 기대할 수 없는 것이었으며 이들의 경제적 사정 역시 여전하였던 것으로 단언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공인들의 경제적 처지와 사정이 초기와는 다른 모습을 띠게 되었다는 점을 언급하였지만, 모든 공인이 그러했던 것으로 단정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특히 18세기 이후 공물상납의 營作貢이 추진되면서 지방의 營貢을 담당하고 있던 영공인들은 공물진상에서 얻어지는 상당한 상업적 이윤을 누리고 있었다. 예를 들면, 관동인삼의 상납을 맡고 있던 인삼 영공인들의 경우 수령과 결탁하여 공납권을 장악하고 원가의 수 배에 이르는 添價를 지급받으면서 인삼진상에서의 상업적 이익을 충실하게 얻고 있었다.0830) 경공인에게는 인삼공인들의 호소에도 불구하고 여간해서는 지급되지 않던 첨가가 지방의 영공인에게는 충분하게 지급되고 있었다. 이는 영공인들이 대부분 營下人으로서 감영과의 결탁이 용이하였고, 그 결과 원가보다 훨씬 높은 첨가를 책정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0831) 수령과 결탁한 이들은 후한 첨가 이외에도 궐봉을 구실로 한 橫侵과 거간조종 등의 농간을 통하여서도 이윤을 획득하였다. 공삼상납이라는 점에서는 경공인과 동질적이었는지 모르나, 공납 수행과정에서 얻어지는 이윤의 수취와 경제적 처지는 사뭇 달랐던 것이다.0832)
0813) | 崔完基, 앞의 책, 5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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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14) | ≪續大典≫권 2, 戶典 歲貢. |
0815) | ≪備邊司謄錄≫98책, 영조 11년 12월 12일. |
0816) | ≪增補文獻備考≫권 153, 田賦考. |
0817) | ≪度支志≫6책, 권 10, 版籍司 貢獻部 2, 貢弊 貢契改式. |
0818) | 柳承宙,<朝鮮後期 貢人에 관한 一硏究-三南月課火藥契人의 受價製納實態를 中心으로-(上·中·下)>(≪歷史學報≫71·78·79, 1976·1978). |
0819) | 吳美一,<18·19세기 貢物政策의 변화와 貢人層의 變動>(≪韓國史論≫14, 서울大, 1986). |
0820) | 吳美一,<18·19세기 새로운 貢人權·廛契 창설운동과 亂廛活動>(≪奎章閣≫10, 서울大, 1987). |
0821) | 柳承宙, 앞의 글 참조. |
0822) | 吳 星, 앞의 책, 11∼12쪽. |
0823) | 吳 星, 위의 책, 13쪽. |
0824) | 吳 星, 위의 책, 13∼15쪽. |
0825) | 吳 星, 위의 책, 16∼18쪽. |
0826) | ≪備邊司謄錄≫156책, 영조 50년 4월 30일. |
0827) | 吳 星, 앞의 책, 65쪽. |
0828) | 수우각무역과 궁각계공인에 대해서는 金東哲, 앞의 책, 25∼72쪽 참조. |
0829) | 金東哲, 위의 책, 70쪽. |
0830) | ≪正祖實錄≫권 16, 정조 7년 11월 정유. |
0831) | 吳 星, 앞의 책, 20∼22쪽. |
0832) | 吳 星, 위의 책, 19∼23·56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