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공인자본의 성격과 공인층의 변화
앞서 본 바와 같이 공인들은 대동법 실시 초기부터 일정기간까지는 관부 수요품의 독점적 조달과 시가보다 후한 공가의 수납 등으로 상당한 자본을 집적할 수가 있었다. 하지만 특권의 형식과 내용이 점차 괴리를 보이면서 그들의 상업활동 역시 지장을 받게 되었고 상인으로서의 위치도 자연 일정할 수가 없었다. 공인에서 벗어나려는 사람들도 나오게 되었고, 거액의 부채만을 지고 혁파되는 공계도 생겨나게 되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하여 공인이나 공계가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상당수의 공계는 어떠한 방식으로든 유지되고 있었으며, 새로운 공계 창설의 움직임도 있었다. 이러한 현상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까. 이 점과 관련하여 무엇보다도 먼저 언급되어야 할 것은 정부의 공물정책의 변화와 이에 대한 사상층 등 부호민들의 공인권 획득과 그에 따른 도고상업활동에의 의지, 이와 같은 움직임을 뒷받침해줄 수 있을 정도로 변화된 상품유통경제의 발달상 등일 것이다.
먼저 조선 후기의 공물정책에 대하여 살펴보면, 공물수요의 증가로 인하여 공가의 추가 지출이 과다해짐에 따라 정부로서는 공가지급을 줄이려는 의도를 갖게 되었다. 이러한 정부의 의도는 비싼 공가를 지급할 필요가 없이 시가로도 공물의 구입·조달을 가능케 했던 유통경제의 발달이라는 객관적인 조건의 성숙에 뒷받침되어 공물조달정책이 점차 원공→별무→사무의 방향으로 전환되어 갔다.0833) 이러한 과정 속에서 제도적으로 보장된 공가 자체만의 이윤을 추구하던 사람들은 18세기 이후 점차 도태되어 갔으며, 공가 자체의 이윤 외에 유통 및 물품제작과정에서 적극적으로 상품유통에 개입했던 상인층은 계속 공인권에 투자하면서 활동을 벌여 나갔다.0834) 18세기 이후 별무공인의 창설이 증가한 것은 바로 위와 같은 움직임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즉 공가 자체보다 공인권이 보장해주는 특권을 자신들의 상업활동에 이용해 보려는 사람들이 늘어났던 것이다. 별무공인은 양반관료·부상·부민 등 다양한 계층에 의해 창설되었고, 별무공인 창설의 증가에 따라 공인은 물론 京江상인이나 경강변의 富民, 東萊상인 등 기왕의 사상이었던 사람들의 상인으로서의 성격에도 변화가 오게 되었다.
예를 들면, 앞서 언급된 외선공감공인이 1차 혁파된 뒤 이들을 대신하여 목재조달을 담당하게 된 사람들은 外都庫貢人이었다. 그런데 외도고공인들은 본래 목재를 사사로이 매매하던 목재상인이었으며, 공인은 아니었다.0835) 즉 경강지역에서 목재상업에 종사하던 ‘근실’한 사상이었던 것이다.0836) 따라서 이들은 공인권을 획득함으로써 기왕의 자본력과 새로운 권리를 바탕으로 유통과정에서의 우위를 확보, 보다 활발한 상업활동을 전개해 나가려 했던 것이다.
본래 목재는 국가의 강력한 통제하에 놓여 있었다. 비변사나 각 아문에서 발급하는 벌목허가증인 關文이 없이는 누구도 합법적인 벌목을 할 수가 없었다. 따라서 사상이었던 사람들이 외도고공인이 되었다는 것은 벌목에 필요한 관문을 원활하게 발급받을 수 있는 이점을 확보한 셈이며, 경강변의 근실한 부민들이 외도고공인으로 나서게 된 근본적인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었다. 바꾸어 말하면, 조선 후기의 공물정책이 원공에서 별무로 변화해가는 움직임 속에서 공인권이 보장하는 특권을 상업활동에 이용하기 위해 경강의 사상들이 외도고를 창설한 것이다.0837) 목재를 조달하는 공인은 계속 존속되었으나, 공계의 구성원은 이전과 전혀 다른 성격의 상인들로 대체된 셈이다.
경강의 부민들을 중심으로 숙종 32년(1706) 성립된 馬契 역시 坊役制의 변동과 함께, 일정한 경제력을 가진 사람들이 공인권이라는 특권의 획득을 통하여 경강지역 하역운송업에서의 우위 독점권을 장악하려는 의도가 맞물려 이루어진 새로운 공계였다.0838) 18세기초 負指軍役을 담당하게 된 折草廛이나 治道軍役을 맡게 된 燻造契의 경우도 廛契 창설이나 새로운 공물을 통해 획득된 권리를 상업활동에 필요한 특권으로 이용하려는 양상을 보여주는 예이다.0839)
18세기 초반경부터 행해지기 시작한 위와 같은 새로운 공인권 창설의 경향은 공물상납제와 공인층의 변화, 나아가 이 시기 상업계의 구조와 상인층의 변동을 가져온 것으로 매우 주목되는 현상이라 하겠다. 하지만 정조 15년(1791) 辛亥通共에 의해 금난전권·공인권 등 특권을 바탕으로 한 도고활동이 혁파되면서, 또한 난전활동 등에 말미암은 상품유통구조의 변화에 따라 19세기 이후에 가서는 새로운 공계의 창설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은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될 것이다.0840)
0833) | 吳美一, 앞의 글(1986), 121∼131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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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34) | 吳美一, 위의 글. 鄭亨芝,<朝鮮後期의 貢人權>(≪梨大史苑≫20, 1983) 참조. |
0835) | ≪貢弊≫2, 外繕工木物差人. |
0836) | ≪備邊司謄錄≫153책, 영조 45년 4월 2일. |
0837) | 吳 星, 앞의 책, 66∼67쪽. 金東哲, 앞의 책, 81∼84쪽 참조. 오미일은 외도고공인이 된 목상을 京江船商으로 보고 있는데(吳美一, 앞의 글, 1986, 173쪽), 사상들이 외도고공인이 된 것으로 파악하고 있는 점에서는 거의 동일한 견해로 보여진다. 다만 德成外志子는 외도고공인이 된 사람들을 市廛市民으로 보고 있다(德成外志子, 앞의 글, 46쪽). |
0838) | 金東哲, 위의 책, 127쪽. |
0839) | 金東哲, 위의 책, 124∼127쪽. |
0840) | 吳美一, 앞의 글(1987). 金東哲, 위의 책, 25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