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서울지역에서의 사상의 활동과 신해통공
조선 후기 전국적인 규모로 유통경제가 발달하고 상업활동이 번창해짐에 따라 서울·평양·대구와 같은 대도시들은 행정도시로서의 성격을 유지하면서도 상업도시로서의 면모와 기능이 강하게 부각되어 갔다. 특히 서울은 최대의 소비도시로서 전국 각지의 생산물이 집하·거래되는 곳으로, 시전상인들이 자리잡고 있던 鐘樓 이외에 梨峴(배오개)·七牌·마포·용산 등지에 새로운 상품 교역처가 생겨나게 되었다.
그렇지만 사상도고는 처음부터 사상으로서의 활동을 벌이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들 역시 어느 정도의 자본을 축적하게 되면 시전을 설립하고자 하였다.0869) 이는 무엇보다도 시전을 설립할 경우에는 상행위가 합법화되고 정부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어 유리하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折草廛의 경우에서 보듯이 사상들이 정부와 교섭하여 시안에 편입, 시전이 된 예도 있었고,0870) 적지 않은 시전이 새롭게 생겨나기도 하였다. 일부 무뢰배들까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시전의 설치에 가담할 정도였다.
그러나 시전의 금난전권 행사로 인한 물품의 매점과 물가앙등 현상이 심화되고 이에 따라 소상인·소비자들이 막대한 피해를 입게 되자, 정부의 정책이 新廛 규제의 방향으로 바뀌게 되었다. 기존의 시전상인들도 신전의 증가가 자신들의 이익을 침해하는 것이기 때문에 여러모로 신전의 설립을 제지하였다.0871) 이처럼 신전의 설립이 규제되고 기존의 시전체계가 고정화되어 가자 시전화에 실패한 사상인들은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제 그들은 금난전권이 적용되는 서울 경내를 벗어나 상행위를 벌이든가, 아니면 시전상인과 대립하면서 상업적 투쟁을 벌여 나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이현과 칠패·용산·마포·서강 등 서울 곳곳에 사상들의 활동 거점이 생성되었고, 나아가 서울의 상업계의 구조가 변화되게 되었던 것이다.
서울의 사상도고는 대부분 시전과 같이 자체 내의 조직을 가지고 있어서 정부로부터 공인을 받지 못하고 있었을 뿐 규모면에서는 시전과 다름이 없었다.0872) 경우에 따라서는 시전을 능가하는 자본력을 가지고 시전의 상권을 압박하기도 하였다. 사상도고는 서울에서도 시전상가가 있던 종로 부근, 즉 이현에 기지를 마련하고 이어 남대문 밖 칠패에도 거점을 확보하였다. 시전상인과 이현·칠패의 상인 간의 상권 경쟁이 그다지 치열하지 않았을 때에는 양자가 도매상과 소매상이라는 관계 속에서 나름대로 협조하고 있었다.0873) 시전상인들이 소매로 직접 처분하기가 어려운 경우 거래 물량의 일부를 이현과 칠패 상인에게 전매하였고, 이현·칠패의 상인들은 시전의 中都兒 역할을 담당하면서 시전에서 구입한 물건을 소매하기도 하였던 것이다.0874)
그러나 사상인들의 활동이 활발해지고 이현과 칠패가 서울의 가장 큰 상업중심지의 하나로 발전해 나가면서 양자의 상권 경쟁은 피할 수 없는 것이 되었다. 18세기 전반기에 이미 칠패의 亂廛들이 서울로 들어오는 수백, 수천 바리(駄)의 어물을 매점하여 시내 각처에 판매하는 등 시전상인의 기득권을 위협할 정도였다.0875) 어물도매시장으로서의 칠패의 기능은 육의전의 어물전에 비해 거의 손색이 없을 정도였던 것이다. 또한 사상인들은 서울 근교의 소상품생산자·소상인들과 연결·결탁하여 농·수산물과 수공업제품을 매입, 소비자에게 직접 판매하거나 다른 지역에 전매함으로써 시전상인의 상업활동에 대해 침해를 가하였다. 자본 집적에 성공한 사상인들이 유통구조에서 시전상인을 배제하면서 도고상인으로 성장해가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하겠다.
시전상인들에게 상권 침해를 가하고 있던 사람들은 물론 사상들만은 아니었다. 양반관료를 비롯한 권세가와 그들의 노복, 각 관아의 서리와 군병들까지 난전활동을 벌이면서 시전상인들의 상권을 침해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시전인들에 대한 이와 같은 상권 침해의 선봉은 말할 것도 없이 사상들이었으며, 이들은 상공업의 자유화 추세를 이끌어 나가고 있었다.
정부와 시전상인의 규제에도 불구하고 사상을 비롯한 난전활동은 그치지 않았으며, 앞서 본 바와 같이 이현과 칠패를 거점으로 한 사상들의 상업활동도 활발해져 갔다. 사상들은 금난전권이 적용되지 않는 서울 외곽지대에 상업 기지를 설치하고 서울 내의 사상들과 상업적으로 깊이 연결된 유기적 연계망을 형성하면서 시전상인의 상권을 제압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정부로서도 사상들의 활동을 더 이상 막기는 어렵게 되었고, 시전상인들의 금난전권의 무분별한 행사에 따른 피해도 컸다. 그 피해는 어느 누구보다도 都民들이 입고 있었다.
결국 정부는 정조 15년(1791) 당시 영의정이었던 蔡濟恭의 건의에 따라 시전상인에 대한 지금까지의 일방적인 보호정책을 철회하고 사상인들에게 상업활동의 활로를 터주는 통공정책을 취하게 되었다.「辛亥通共」으로 불리우는 상업정책의 일대 전환으로 인하여, 30년 이내에 설치된 시전은 모두 철폐되었고, 금난전권도 六矣廛에 국한되게 되었다.
통공 이후 사상인들은 더욱 활발한 상업활동을 벌여 나가게 되었다. 이들은 그동안 축적하였던 자본력을 활용하여 다소 고가라 하더라도 상품을 매집하여 창고에 보관하였다가 가격이 오르게 되면 출매하는 방식을 통하여 막대한 상업적 이윤을 획득하였다.0876) 더욱이 이들은 전국 각지에 형성된 유기적 연결망을 통하여 물량의 출하와 집산, 물가의 고저 등에 대한 신속한 정보를 확보함으로써 효율적인 상업활동을 펼치고 있었다. 또한 이들은 궁방이나 아문·양반관료들과도 연결·결탁하여 영업상의 장애가 될 수 있는 요인들도 효과적으로 제거·예방하고 있었다.
이현과 칠패는 종루와 더불어 서울의 3大市로 불리워지고 있던 사상의 근거지로서,0877) 행상의 집합소이자 시민의 일상적 구매장이었다. 특히 이현은 시전이 있는 종로에 위치해 있어서 시전상인과의 상권 경쟁이 어떠한 양상으로 전개되는가를 나타내주는 지표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이현과 칠패에서 거래하는 물량은 시전의 그것에 비해 10배나 된다고 할 만큼 사상의 영업 규모는 시전의 그것을 능가할 정도가 되었다. 행상들은 모두 이현과 칠패의 사상에게서 물건을 구입하고 있었고, 시전은 소상인들에게 외면당하고 있었다.0878)
이현·칠패의 사상들은 서울 외곽지대의 사상들과 상업적 연계망을 구축하고 상호 협조하면서 상행위를 벌이기도 하였다. 이들은 元山 등지에서 반입되는 건어물의 매점을 위해 樓院店의 도고상인들과 결탁하여 서울로 들어오는 동북지방의 상인들의 물품을 중도에서 매입하여 창고에 보관해 두었다가 가격이 오를 때에 판매함으로써, 최대한의 영리를 꾀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이들은 직접 생산지에 가서 물건을 매집·독점하여 가격을 조절하는 방법으로 이윤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19세기초 내·외어물전인들이, 이현·칠패의 사상들이 추동기에 원산까지 가거나 중도에서 상품을 매점하는 까닭에 자신들은 상품을 구하지 못해 폐업 상태에 이르고 있다고 호소하고 있는 것은,0879) 통공 이후 사상도고의 활동이 더욱 활발해졌을 뿐만 아니라 상품시장에서의 유통과정을 장악하고 시전인들에 대한 확고한 상업적 우위를 강화해 나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처럼 이현·칠패를 중심으로 형성·발전된 사상인들의 상업활동은, 물론 그들만의 역량으로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지만, 신해통공이라는 상업정책상의 일대 전환을 가져오게 하였고, 사상도고로서의 위치도 더욱 굳건하게 해주었다. 도성안에서는 육의전의 금난전권이 유효한 것이어서 이들의 활동에 대한 제약이 완전히 제거된 것은 아니었지만, 자본과 조직면에서의 이들의 상업적 성장과 발전은 새로운 상인층의 주역으로서의 모습을 보여주는 데에 부족함이 없었다.0880)
0869) | 吳美一,<상품경제의 발전과 자본주의적 관계의 발전>(≪한국사≫9, 한길사, 1994), 18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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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870) | ≪備邊司謄錄≫110책, 영조 18년 4월 10일. |
0871) | 崔完基, 앞의 책, 91쪽. |
0872) | 姜萬吉, 앞의 책, 176쪽. |
0873) | 崔完基, 앞의 책, 59쪽. |
0874) | 姜萬吉, 앞의 책, 175쪽. |
0875) | ≪各廛記事≫地卷, 乾隆 11년(영조 22) 11월 일. |
0876) | 崔完基, 앞의 책, 100∼103쪽. |
0877) | 朴齊家,≪貞蕤集≫詩集 권 3, 成市全圖詩. |
0878) | 崔完基, 앞의 책, 61쪽. |
0879) | ≪各廛記事≫人卷, 嘉慶 21년(순조 16) 9월 일. |
0880) | 사상이라 하여 순수한 자본력과 상업적 조직망에만 의지하여 상업활동을 벌였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일부이기는 하지만 사상 역시 영업상의 필요에 따라 궁가나 권세가·양반관료층과 결탁하고 있었으며, 그와 같은 일은 실제로도 적지 않이 있었다. 관상도고의 경우처럼 공식화된 특권은 아니었지만, 특권과 결부된 상업활동의 전개라는 면에서 볼 때 사상의 성격을 다른 각도에서 짚어 보아야 하지 않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학계의 숙제이기도 하지만, 상인의 성격과 유형을 분류할 때 보다 다양한 기준을 설정하여 다각적으로 상인을 이해·파악하는 작업이 요망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