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포구상업의 발달
(1) 해상교통의 발달과 포구시장권의 형성
가. 해상교통의 발달
조선 후기에는 육상교통만이 아니라 해상교통도 발달하였다. 16세기 이후 선진적인 船人들에 의해 뱃길로 전국이 연결되고 있긴 했지만 일반적으로 17세기 후반까지만 해도 전국적 해상교통에는 많은 장애가 가로놓여 있었다. 특히 뱃길에서 가장 어려웠던 곳이 바로 황해도의 長山串과 충청도의 安興梁이었다. 이러한 險灘은 적어도 18세기 중엽 이후에는 대부분 극복되었다. 이중환은≪택리지≫에서 “京江의 선인들은 안흥량을 자기집 뜰을 밟듯이 지난다”0969)라고 기록하고 있다. 또한 18세기 후반 禹禎圭는 關西穀의 漕運을 주장하면서 그 이유로 평안도와 경강과의 뱃길이 자유롭다는 점을 들고 있다.0970)
한편 해상교통의 발전을 반영하여 선박의 규모도 점차 커지고 있었다. 17세기 후반에 漕運船 한 척의 법적 적재량이 500석이었으나 18세기 후반에는 1,000석이었다. 京江船의 적재량은 이보다 규모가 컸다. 조운선의 적재량이 600석에서 800석에 지나지 않았던 18세기 중엽에도 경강선의 적재량은 1,000석으로 규정되었으며, 실제 경강선인들은 이 규정을 무시하고 1,500석을 적재하여 운항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심지어 경강선인들은 법적 적재량의 한도를 무시하고 2,000석을 실을 수 있는 선박을 건조하기도 하였다.0971)
18세기 이후에는 이와 같은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전으로 해상교통의 자연적인 장애들을 극복할 수 있었다. 그 결과 그 동안 元山에 集荷되어 駄運으로 서울까지 반입되었던 北魚도 18세기 후반에 이르러서는 원산의 船商들이 선박을 통하여 동해·남해·서해를 돌아 경강까지 유통시킬 수 있었다.0972) 이러한 항해술과 조선술의 발전을 주도한 세력은 바로 京江船人들이었던 것이다.09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