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포구시장권의 형성
18세기 이후 해상교통은 주로 남해안과 서해안 그리고 京江·洛東江·錦江·榮山江·大同江 등을 중심으로 하여 발전하였다.0974) 해상교통의 발전에 따라 17세기까지 漁採, 稅穀운송, 군사적 방어기능을 주로 했던 外方浦口들도 점차 상업중심지로 변모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선박이 정박할 수 있는 지역에는 선박접안 시설을 갖춰 포구가 신설되기도 하였다.0975) 조선 후기는 사회적 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상품으로 등장하는 물품이 많아지고 보다 편리한 운송수단에 대한 요구가 증가하였다. 많은 실학자들이 지적하고 있듯이 당시 가장 우월한 운송수단은 선박이었으며, 선박을 통한 상품유통에의 사회적 요구가 증가할 때 포구가 유통중심지로 변하는 것은 당연한 추세였다.
상업중심지로 발전하였던 포구들은 주로 강과 바다가 만나는 지점으로, 潮水가 올라올 수 있었던 포구였다. 대포구는 서울의 경강포구 외에도 낙동강 하구의 金海 七星浦, 금강하류에 위치한 은진의 강경포, 그리고 커다란 강은 없었지만 북어생산의 집산지로서 발달한 동해안의 원산포, 그리고 남해안의 창원 마산포가 대표적인 곳이었다. 이들 대포구는 원산장, 마산포 주위의 창원장, 강경포 주위의 論山場 등의 장시와 밀접하게 연계되면서 발전하였다. 이외에도 섬진강 유역의 花開場, 河東의 豆治場이 포구와 연계되면서 크게 발전하였으며, 평안도의 대청무역의 통로구실을 한 박천의 진두장도 대정강 연안에 위치한 포구였다. 또한 영산강 하구의 法聖浦·沙津浦, 전주의 沙灘 등지도 상업중심지로 성장한 포구들이었다.
이와 같은 포구시장권의 발달은 선박에 의해 운송되는 대규모의 물량을 빠른 시일 내에 소비할 수 있는 큰 소비시장이 포구 주위에 생성되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추세는 점차 대포구 주위의 소포구에까지 확산되어 갔다. 18세기 중엽 이후부터 점차 대포구 주위의 소포구들도 점차 주위의 장시와 연결되면서 지역내 시장권의 중심으로서 발전하였다.0976)
18세기 이후 지방의 포구들이 지역내 시장권의 중심으로 성장함에 따라 전국적인 포구시장권이 성립될 수 있었다. 포구간 시장권은 원산포와 부산포, 마산포를 중심으로 하는 동남해안을 포괄하는 유통권, 김해 칠성포와 마산포를 중심으로 한 남해안과 낙동강을 포괄하는 유통권, 영산포와 법성포를 중심으로 하는 영산강과 서남해안을 연결하는 유통권, 강경포를 중심으로 한 서해안과 남해안을 연결하는 유통권, 그리고 경강을 중심으로 하는 서해안 유통권, 그리고 평양의 鎭南浦를 중심으로 하는 대동강과 북서해안을 포괄하는 유통권으로 세분될 수 있다.0977) 이러한 포구 중에서 원산포·칠성포·강경포·마산포·경강 등은 지역적 유통권의 중심일 뿐 아니라 전국적 유통권의 중심포구로서 기능하였다. 마치 장시에서 대장이 형성되어 지역적 시장권의 핵심으로 성장한 것과 마찬가지로 포구에서도 전국적 시장권을 연계하는 중심포구로 이들 포구가 성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포구시장권의 중심은 경강이었다. 그러므로≪擇里志≫에서는 경강을 “海峽을 통하는 이익을 좌우하며, 우리 나라 船運의 이익을 도맡는 곳으로서 이익을 노리어 부자가 되는 자가 가장 많은 곳”0978)이라고 말하고 있다.
조선 후기 포구간 상품유통은 기본적으로 원격지 유통의 성격을 갖는다. 특히 18세기 이후에는 미곡의 상품화가 진전되면서 貿穀船商層이 등장하여 전국적으로 미곡을 유통시키기 시작하였다.0979) 18세기 이후 미곡과 어염의 상품화가 진전됨에 따라, 이들 상품유통도 자연적 분업이 아닌 사회적 분업에 기초한 것으로 변모되어 갔다. 즉 미곡의 경우 흉년이나 國役 부담의 필요에 의하여 이루어지는 일시적이고 우연적인 상품유통이 아니라 서울과 평양을 비롯한 대소비시장이 발전함에 따라 곡물시장이 형성되어 항상적인 상품유통으로 전화되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수공업제품과 목화·면포류 등도 사회적 분업과 관련하여 유통되고 있었다. 이 상품들은 생산과정 자체가 시장을 향한 생산이었기 때문에 항상적인 상품유통으로 발전되고 있었다. 이러한 항상적 상품유통의 창출은 조선 후기 포구상업을 크게 발전시킨 근본적인 요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