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경강포구의 상업발달
전국 포구시장권의 중심으로 성장한 경강의 경우도 17세기 중엽 이전에는 상품유통의 중심지로서보다는 어채와 세곡 集荷기능이 중시되었다. 그러므로 이 시기까지 상품매매를 중개했던 旅客主人은 아직 출현하지 않았다. 그러나 포구상업이 발달하면서 경강은 상업중심지로서 비약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경강이 상업중심지로 발전하게 되면서 나타나는 가장 두드러진 변화는 상업중심지의 확대였다. 18세기 전반까지 漢江·龍山江·西江의 3강을 중심으로 상업중심지가 형성되었지만, 18세기 후반에는 5강(한강·서강·麻浦·望遠·용산), 다시 8강(한강·서강·용산·마포·망원·豆毛浦·西氷庫·뚝섬)으로 확대되고 있었다. 이와 같이 경강의 상업중심지역이 확대됨에 따라 경강주변에는 각종 시전이 생겨나고 있었다. 마포에는 鹽廛·米廛·柒木廛·雜物廛·艮水廛과 土亭藁草廛·土亭柴木廛 등이, 용산에는 鹽廛·柴木廛·瓮里蛤灰廛이, 서강에는 米廛·柴木廛 외에도 黑石里 柴木廛이 설치되었고, 그 외에도 뚝섬 柴木廛, 두모포 柴木廛 등이 개설되어 있었다.
경강은 서울 都城과 관련해서는 미곡·목재·어물·소금과 같은 상품의 도매시장으로서 기능하였다. 소매상이나 행상들은 경강에 와서 어염이나 젓갈·목재·주류 등을 구입한 뒤, 도성 안에 들어가서 일반소비자에게 판매하였던 것이다. 또한 경강은 전국적인 시장과 관련하여서는 전국의 상품가격을 조절하는 중심시장의 기능을 담당하였다. 미곡을 예로 들면, 정조 9년(1785) 左承旨 柳義養은 서울인구 20만 명의 1년 미곡소비량을 100만 석으로 추산하고, 이 중에 20여만 석은 貢價에서, 20여만 석은 서울 사대부들의 외방 田土에서 수확하는 私穀으로 충당된다고 하였다.0980) 나머지 60여만 석은 미곡상인에 의해 조달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들 사대부의 추수곡 20여만 석과 미곡상인에 의해 공급된 60여만 석의 미곡도 모두 경강을 통해 반입·유통되었다. 당시 경강에 집하되는 미곡을 ‘江米’ 또는 ‘江上米’라고 불렀는데, 이 강상미는 전국 미곡가격의 동향에 매우 민감하였다. 다른 지역에 큰 흉년이 들어 서울지역보다 미가가 높으면 경강의 貿穀商들은 경강에 올라온 미곡을 다시 내려보내 많은 이익을 남겼는데, 그 양은 심할 경우 강미의 1/3에 달하였다.0981) 여기서 보듯이 경강은 전국의 모든 물화가 집하되었다가 다시 전국으로 분산되는 전국적 해운의 중심지로 성장하였던 것이다.0982)
경강상업의 번성에 따라 경강에서는 각종 영업도 성행하였다. 대표적인 영업이 각종 물자의 하역운수업과 藏氷業이었다. 하역운수업이나 장빙업은 모두 17세기 중엽까지는 주로 江民들의 노동력을 직접 징발하는 부역의 형태로 운영되었는데, 18세기 전반에는 馬契·運負契와 氷契가 결성되어 이를 담당하였다.
경강이 전국 해운중심지로 성장함에 따라 각종 물자의 하역운수업이 발달하였다. 특히 경강변에는 지방에서 이주한 사람들이 거주하였는데, 이들은 이러한 하역운수업에 종사함으로써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이와 같은 운수역을 담당한 마계·운부계·募民契 등은 막대한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그러므로 18세기 후반에는 운수역의 독점을 둘러싸고 민간인과 이들 契人들 사이에 치열한 분쟁이 벌어졌다.
한편 18세기 이후 서울이 상업도시로 변하면서 얼음의 수요도 크게 늘어났다. 얼음은 본래 국가제사용과 궁궐소용에 한정되어 채빙되었다. 그러나 조선 후기에는 民需用 얼음의 수요도 급격하게 증가하였다. 18세기 후반 민간 장빙업자가 경강변에 私氷庫를 설치한 곳만 30여 곳이 넘을 정도였다. 민수용 얼음은 18세기에 출현한 냉장선의 일종인 氷魚船과 生鮮廛·懸房 등에서 생선의 저장과 보관이나 육류의 판매에 사용되었다. 당시 민수용 얼음의 수요는 官需用에 비해 네 배에 달할 정도로 광범위했다. 이처럼 얼음수요가 많았으므로 민간장빙업도 많은 이익을 남길 수 있었다. 당시 자료에 의하면 1년에 장빙업자가 남기는 이익은 10만 냥에 달할 정도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1908년 農商工部 水産局에서 편찬한≪韓國水産誌≫에서도 당시 한강변의 수많은 영업 중에서 장빙업이 가장 큰 이익을 남기는 업종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처럼 이익이 막대했으므로 민간장빙업자들은 대부분 유력 양반이 아니면 불가능했다. 이에 따라 얼음의 제조판매권을 둘러싼 분쟁도 하역운수업에서처럼 치열하게 벌어졌다.
이와 같은 하역운수업과 장빙업에서의 독점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민간인을 중심으로 발생하였다. 결국「辛亥通共」을 전후하여 官權에 의거한 都賈營業은 파산하고, 민간에게 영업권이 넘어갔으나, 이들 세력은 다시 관권과 결탁하여 독점적으로 운수역이나 장빙업을 경영하게 되었다.0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