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민중운동의 사상적 특성
(1) 민중운동 속의 사상경향
조선 후기에 민중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일어난 민중운동은 妖言, 掛書·凶書, 擧事謀議 등 여러 형태로 전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형태의 민중운동을 ‘變亂’으로 불렀다. 이 때의 민중사상은 여러 秘記를 포함한 정감록 사상을 비롯하여, 미륵신앙과 생불신앙 등 민중불교, 신선술이나 장생술 등의 도교사상, 용신앙과 같은 재래의 민간신앙이 이에 해당한다. 신흥종교로서의 천주교도 민중사상으로서의 성격을 지녔다.
변란 유형의 민중운동은 언제, 누가, 어떠한 민중사상을 기반으로, 어떠한 형태의 저항을 하였는가에 따라 그 성격이 달라진다. 그러므로 이러한 면을 고려하여 민중운동의 추이 속에서 민중사상이 적용되는 틀을 파악하려 한다.
18세기 초반, 戊申亂 이전까지의 민중운동에서는 정감록이 사상적 기반으로 활용되기는 했으나, 아직 그 틀이 본격적으로 갖추어지지 못했다. 이 때 민중운동을 사상적으로 받쳐주는 중심은 미륵신앙이나 생불신앙 등의 민중불교였다. 이 민중불교에는 불교적 요소 못지 않게 무격신앙이나 용신앙 등 재래의 민간사상이 함께 어우러져 있었다.
먼저 미륵신앙을 내세운 민중저항운동으로는 숙종 14년(1688) 8월에 呂還을 비롯한 미륵신도들이 경기도 양주를 중심으로 거사를 모의한 사건이 대표적이다.097) 사건의 주동 인물들은 여환을 비롯하여 地師 黃繪, 巫女 元香(龍女夫人)과 戒化(鄭聖人), 아전 鄭元泰를 꼽을 수 있다. 이들은 “석가가 멸하고 미륵이 마땅히 세상을 주장한다”는 논리로 인물을 모으며 서울공격을 결정하였다. 이 때 이들이 내세운 최대의 무기는 우수한 물리력이 아니라, 미륵신앙의 논리였다. 여환과 계화 등은 “큰 비가 내릴 것이고 그러면 산악이 무너지고 國都 역시 탕진할 것이다”라는 미륵하생의 조짐을 예고하면서 궁궐 공격의 타당성과 자신감를 내보였다. 그러나 거사를 예정한 날에 비가 내리지 않았고 이 때문에 거사를 연기하였다가 사건이 발각되었다.
아울러 이 사건에는 여환 등이 주장하는 미륵신앙의 논리에 원향과 계화 등이 내세우는 재래의 용신앙이 결합되어 있다. 이 때의 용신앙은 미륵불이 하생하기 전에 龍이 아들을 낳아 나라를 주관하지만, 비바람이 고르지 못하고 오곡이 맺지 않아 사람들이 굶어죽게 되면 결국 미륵불이 출현한다는 논리이다. 그러므로 여환 등 미륵신도가 용신앙의 대변자인 원향과 계화 등을 포섭하는데 성공했음을 뜻한다. 이 밖에도 이 거사모의에는 칠성신앙이나 도교적 요소까지 복합되어 있으며, 황회의 측근인 鄭好明은 민간신앙의 대상으로 추앙되던 崔瑩장군의 靈을 자칭하기도 하였다.098) 그리고 주동 인물들은 미륵신앙과 용신앙을 중심으로 하는 민중사상을 단순히 동조자를 끌어들이려는 수단이 아니라, 사건을 이끌어가는 추진 동력이며 사건의 성패를 판가름하는 잣대로 인식하였다.
이 사건은 미륵신앙과 용신앙을 사상적 기반으로 거사모의까지 이어졌다. 그렇지만, 18세기 이전 대분분의 민중저항운동은 요언 단계의 수준을 넘지 못했다. 대표적으로 ‘首陽山 生佛出現說’을 들 수 있다. 숙종 17년(1691)에 무격인 車忠傑·曺以達·愛珍 등은 황해도 일대에서 생불이 출현할 것이라는 따위의 주장으로 민심을 동요시켰다.099)
이들은 여러 차례의 모임에서 “漢陽이 장차 망하고 奠邑이 일어날 것이다”는 정감록의 논리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이른바 ‘天機’를 공부하였다. 이 때의 결론은 首陽山 정상의 義相庵에 鄭弼錫이라는 생불이 살고 있는데, 그가 자신들의 천기 속에 항상 나타났다는 것이다. 그리고 정필석이 곧 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 때를 대비하여 산 속에서 생불에게 제사를 지냈으며, 이 제사는 인간의 일이 아니라 부처가 주관하는 일이라고 하였다.
이 ‘수양산 생불출현설’은 승려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격에 의해 일어났다. 더욱이 애진은 무속에서 사용하는 ‘靈山十王’·‘世尊靈氣’ 등을 칭하였고 산 속 제사를 주도하였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민중불교로 파악할 수 있는 ‘생불’을 정점에 올려놓고 있지만 실제로는 불교적 색채보다 오히려 무속적 성향이 더욱 강하다. 아울러 이들의 주장에 정감록의 ‘李亡鄭興’의 논리가 들어 있는 것도 주목되는 사실이다. 이 사건은 민중불교 논리의 일종인 생불을 내세운 妖言 단계의 전형적 민중저항운동이다.
이 밖에도 숙종 때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요언 단계의 저항이 일어났다.100) 숙종 2년(1676) 11월에 神僧을 자처하는 處瓊이 충청도와 경기도 일대를 떠돌면서 민인들을 끌어모았고, 이에 민인들이 그를 ‘생불’로 받들었다. 숙종 14년 11월에는 李龍錫이 신령스러운 무당임을 자처하면서 민중을 미혹시키자 민인들이 재물을 갖고 몰려들었다. 숙종 38년 8월에 양주의 李橒은, 같은 마을의 白尙福과 白尙祿 형제가 “赤帝와 白帝를 자처하며 자신의 집을 대궐이라 하고 자신의 옷을 곤룡포라 일컬으며, 왕후장상의 씨가 따로 있느냐”는 따위의 말을 했다고 무함하였다. 숙종 39년 12월에는 충주의 李東奭이 大院寺의 승려 道泂 등과 함께 벽돌에 讖記를 새겨넣어 축성하고 僧軍을 기르려고 하였다. 숙종 44년 8월에는 무격을 생업으로 삼는 金城의 常漢 申義先과 淮陽의 백성 尹風立이 각각 聖人과 公子를 자처하며 각종 요언을 퍼뜨렸다.
이처럼 17세기 후반과 18세기 초반, 즉 戊申亂이 일어나기 전까지의 민중저항운동은 요언 단계에 머물렀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 승려나 무격들이 저항을 주도하였다. 이 때 이용된 민중사상도 객관적으로 잘 다듬어진 논리라기 보다는 조악한 수준의 단편적 논리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요언 단계의 저항은 체제부정적인 논리와 함께 민중에게 미치는 파급효과가 매우 컸다. 흔히 한 지역에서 요언이 발생하면 인근 지역으로 급속히 퍼지면서 민심이 크게 동요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민심 흐름의 일단을 읽을 수 있다.
18세기에 접어들어 민중운동은 그 형태와 민중사상을 이용하는 틀이 변화한다. 이렇게 된 직접적 계기는 영조 4년(1728)의 무신란이다. 물론 무신란 이후에도 이전과 같은 요언 단계의 저항은 계속되었다. 더욱이 미륵신앙이나 생불신앙과 같은 민중불교를 내세운 요언도 몇 차례 발생하였다. 영조 34년에는 황해도 일대에서 무녀 英梅·福蘭臺·英時 등이 미륵불과 생불을 자칭하자,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무녀들을 생불로 떠받든 일이 있다.101) 아울러 영조 말년의 ‘잡술’을 이용하여 체제를 비방한 요언 사건도 주목을 끈다. 그러나 그 추세는 요언 단계의 저항에서 괘서나 흉서 단계의 저항으로 옮아가고 있었다. 즉 영조 때의 민중운동의 형태는 대부분 괘서나 흉서 단계의 저항이었다. 이를테면 명백히 드러난 괘서사건의 경우만 해도, 숙종 때 발생 건수가 4건에 불과한 반면에 영조 때에는 무려 15건에 이른다.102)
영조 9년에는 남원에서≪南師古秘記≫와 관련한 ‘八空庵’ 흉서 사건이 일어났다.103) 평민 金元八, 양반 崔鳳禧, 승려 太眞 등이 주도하였다. 김원팔은 ‘筆墨契’를 주도할 정도의 자금력을 지니고 있었다. 최봉희는 ‘유랑 지식인’으로, 김원팔의 食客이었다. 그는 태진이 소지하고 있던≪남사고비기≫를 베껴 이를 김원팔에게 넘겨주었고 김원팔이 다시 이를 베껴 보관하였다. 이들이≪남사고비기≫를 이용하여 어떠한 구체적 일을 도모한 흔적은 없다. 그러므로 이 사건은 일종의 흉서소지의 수준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때의 흉서가 무신란 때 괘서했던 내용과≪남사고비기≫의 내용이었다는 사실은 주목할만 하다. 이 때 南師古는 민중에게는 이인으로 존경받았지만, 지배층에서는 인심을 妖惑시킨 자로 폄하되었던 인물이다.104)
이 때 흉서의 내용 가운데 무신란의 일에 대해서는 “피가 흘러 내를 이루고 길이 막히며 민가에 연기가 끊긴다”는 따위로 기록하였다. 아울러 “백성이 보존될 수 있는 곳은 山林”이라는 식의 피장처의 논리도 들어 있다. 이들은≪남사고비기≫를 사상적 기반으로 삼고 있으나 거사를 준비하는 단계로까지는 나아가지 못했다. 그러나 이들은 서로 신분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필묵계’ 모임 등을 통해 어울리며 현실을 비판하는 등 체제저항을 기도했다.
영조 24년(1745) 4월에는 청주와 문의에서≪道詵秘記≫의 내용을 기반으로 ‘文義’괘서가 일어났다.105) ‘戊申餘黨’인 李之曙와 朴敏樞, 士族 吳命垕 등은 청주와 문의에서 요언을 유포하여 민심을 동요시켰고, 이에 자극받아 청주에서 소요가 일어났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문의에서 괘서사건을 일으켰다. 이들이 유포한 요언은 “倭人 같지만 왜인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올라온다. 물이 이롭지 않고 산도 이롭지 않으며 ‘弓弓’이 이롭다”는 따위의≪도선비기≫의 내용이다. 이 때 왜인 같지만 왜인이 아닌 집단의 정체는 해도에 있는 ‘무신여당’이라는 것이다. 또 “울릉도 건너편에 黃鎭紀 등 무신란의 여당이 있으며, 황진기가 죽지 않으면 반드시 나올 것이다”라고 하여, 무신란 때 주요 수배 대상이었던 황진기가 죽지 않고 해도를 근거로 세력을 이루고 있다는 ‘黃鎭紀不死說’을 내세웠다. 이 사건은 무신여당 가운데 황진기 세력을 해도기병의 주체로 설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위의 두 사건에서106) 알 수 있듯이 영조 때의 변란 유형의 민중운동은 무신란과 연관되어 있다. 그리하여 사건이 일어났을 때는 흔히 ‘무신년의 일과 같다’라고 하며, 그 주체들은 ‘무신여당’으로 불리는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 때 이용된 민중사상의 특징으로는 정감록 사상이≪남사고비기≫나≪도선비기≫등의 이름으로 등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특히≪도선비기≫의 ‘似倭非倭’說은 이후에도 여러 저항과정에서 반복하여 나온다.
또한 이 무렵에는 왜구나 오랑캐가 침공할 것이라는 따위의 와언이 퍼져 위기감이 조성되었다. 이를테면 ‘문의’괘서 직전에는 청주에서 “왜구가 곧 쳐들어 올 것”이라는 와언이 퍼져 충청도와 경기도의 민인들까지 산 속으로 피난을 떠나는 사태가 일어났다. 정조 11년(1787)에는 경기와 호서지방에서 “북방족의 기병이 들이닥칠 것이다”107)는 와언이 퍼져 백성들이 집을 비우고 달아나는 소동이 있었다. 이러한 유형의 ‘외세침공설’은 정감록에 들어 있는 내용이다. 이 때 와언의 유포자들은 전란에 대한 두려움이 남아 있는 사회 분위기를 이용하여 향촌사회를 동요시키려고 했다. 그러므로 이 때 ‘山林’이나 ‘弓弓’과 같은 피장처의 논리가 이에 대한 대책의 일환으로 제시된 것도 주목되는 사실이다.
18세기 말기, 특히 정조 때의 민중운동은 무신란과의 연계성이 점차 약화되어 갔다. 이에 따라 영조 때와는 다른 민중운동의 형태를 보이고 있다. 영조 때 민중운동의 일반적 형태로 15차례나 발생했던 괘서는 단 한 차례밖에 보이지 않는다.108) 이 때는 괘서나 흉서보다는 오히려 거사모의 형태의 저항이 주로 일어났다. 이러한 운동형태의 변화는 그 운동을 뒷바침하는 사상적 기반의 변화이기도 하다.
이 때에도 강릉에서 미륵불을 자칭하는 요언 사건이 일어나는 등 민중불교는 관심의 대상이었다.109) 그리고 영조 때 각종 민중운동의 저항논리로 이용되었던≪道詵秘記≫의 ‘사왜비왜’설과 같은 경우도 여전히 유효하게 이용되고 있다.110) 이러한 사례들은 단편적 현상이었다. 영조 15년에 평안도 지역에서 ‘鄭鑑錄’이라는 이름이 처음 나온 이래,111) 정조 6년(1782) 文仁邦과 李京來 등의 ‘서울공격’ 거사모의 때 ‘정감록’이라는 이름으로 그 사상이 본격 전파되었다.112) 이들은 정감록의 논리를 유포하며 전국에 걸쳐 동조인물을 모으고, 都元帥-先鋒將-運糧官 등의 조직체계를 갖춘 후 襄陽에서 거사하여 杆城→江陵→原州→東大門으로 입성한다는 계획으로 거사를 준비하였다. 요컨대 이들의 목표는 물리력에 의한 정권의 쟁취였다.
이들은 거사의 준비과정에서 정감록을 주요 사상기반으로 삼았다. 문인방은 白天湜 등과 함께 충청도 진천에서 ‘잡술’을 유포하며 민심을 모으다 포도청에 체포되었다.113) 문인방 등은 거사를 준비하는 과정에서≪乘門衍義≫·≪經驗錄≫·≪神鞱經≫·≪金龜書≫등을 학습하면서 동조 인물들을 모았다. 이 책들의 내용은 알 수 없다. 그러나 이 책들이 ‘정감록’으로 통칭되고 있으며, 공초과정에서 그 내용은 말하지 않고 정감록의 ‘六字凶言’이라는 말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아 체제를 비판, 부정하는 내용임에 틀림없다.
이 사건으로 민중운동에 있어서의 정감록 사상은 질적으로 변화하였다. 그것은 이 때 ‘한글판 정감록’의 출현이 확인되었기 때문이다.114) ‘한글판 정감록’의 출현은 지금까지 정감록이 한문을 독해할 수 있는 지식인의 전유물이었는데, 이제부터는 그 대상이 민중으로까지 확산되어 갔음을 뜻한다. 정감록이 민중사상의 중심으로 부각되고 일반에 확산된 것은 정감록이 체제부정, 혁명성, 이상향 등의 파격적 내용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한글판 정감록’의 출현은 곧 정감록의 대중화를 보다 촉진하는 중요한 계기였다.
이처럼 정조 때는 정감록 사상이 확산되고 질적으로 변화하면서, 여러 민중운동에는 정감록의 논리 가운데 가장 강력한 ‘해도기병설’이 본격적으로 이용되기 시작하였다. 물론 이전에도 해도기병설은 이용되어 왔다. 그러나 그것은 정감록의 문구 자체를 단편적으로 이용하는 수준이었다. 이 때에 들어서 여러 사건에서 구체적 섬 이름이 등장하는 등 해도기병설은 보다 틀을 갖추어 갔다. 앞의 ‘서울공격’ 거사모의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당한다.
이 사건에서의 해도는 곧 ‘小雲陵’으로, 여기에 해도기병설의 실체가 응축되어 있다. 문인방은 정감록을 유포하는 한편 해도기병설을 제기하였다. 그는 단순히 정감록에 들어 있는 해도기병설의 내용을 인용한 것이 아니라, 그 내용을 차용하여 보다 구체적인 논리로 발전시켰다. 소운릉의 기능은 물산이 풍부하여 경제적으로 가치가 큰 섬, 즉 자체적으로 경제생활을 꾸릴 수 있을 만큼 자연조건이 탁월한 곳이며, 그 자체로 민중의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을 수렴한 곳이다. 아울러 소운릉은 戰場으로 간주되는 등 군사적 의미도 지녔다. 그리고 여기에는 해도기병설의 도달점인 이상사회의 논리가 관철되고 있다. 그리고 소운릉은 당시 해도가 저항세력의 근거지 역할을 하고 있던 현실을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이 밖에도 정조 9년(1785)의 ‘山人勢力’ 거사모의115) 때 文洋海는 해도기병설의 일종인 ‘東國三分說’을 전파하였다. 그는 ‘동국삼분설’을 설명하면서, “조선의 산천과 천문지리는 모두 삼분의 조짐이 있다. 임자년에 도적이 나타나고 그 후에 삼분되었다가 다시 하나로 합쳐진다. 삼분의 姓은 鄭·劉·金哥인데 필경 鄭哥가 하나로 통일시킬 것이며 남해의 섬 가운데에 있다”라고 하여, 삼분 후 통일을 말하면서 통일의 주체는 해도에 있는 鄭眞人이라고 하였다. 요컨대 정감록의 ‘해도에서 정진인이 기병한다’는 논리를 적용한 사례이다.
정조 11년 6월에는 충청도 제천의 金東翼·金東哲 형제와 강원도 횡성의 鄭武重 등이 ‘無石國’ 관련 요언을 유포하면서 거사를 모의하였다.116) 이들은 수시로 “왜적 같지만 왜적이 아닌 것이 남쪽에서 올라온다”라고 하여,≪道詵秘記≫의 ‘似倭非倭’의 논리를 유포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보다 구체적으로 해도의 이름을 적시하고 그곳에서 군사를 양성하고 있음을 밝혔다. 그 요지는 김동철의 아들 曾悅이 일본과 동래의 중간에 있는 ‘무석국’이라는 섬을 정벌하였고, 현재 그 섬 근처에 있는 ‘麻島’ 또는 ‘薪島’라는 섬에서 군사를 양성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鄭希亮의 손자 醎을 추대하여 6월 11일에 거사할 예정인데 거사를 단행하면 전국에서 호응할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거사 성공을 예상하여 미리 관직의 배분까지 해놓았다.
이 때는 정감록과 도교의 신선사상이 함께 저항과 변혁의 논리로 이용된 사례도 있다. 마치 숙종 때 미륵신앙과 용신앙이 습합되어 있던 사례와 비슷하다. ‘서울공격’ 거사모의 때 朴瑞集의 공초에 의하면, “문인방은 仙道를 배웠으며 長生術에도 관심이 있었다”고 진술했다.117) 그러나 정감록과 도교의 신선사상이 본격적으로 결합한 것은 앞의 ‘산인세력’ 거사모의 때였다. 이 때 정감록은 그 저항을 이끌어가는 주요 논리였다. 그러나 이 사건의 핵심 인물인 떠돌이 지사 문양해는 정감록뿐만 아니라 도교에 대해서도 해박한 지식을 지녔던 인물이었다. 문양해는 도교의 정통 의식인 齋醮를 거행할 정도였다. 그는 사건을 배후에서 움직이는 주체로 ‘산인세력’, 즉 仙人(異人·神人)을 내세웠고 이들의 근거지를 ‘智異山 仙苑’이라고 했다.
‘산인세력’은 각각 고유의 이름과 함께 香嶽先生(成居士), 白圓神, 一陽子(茅仙) 등 도교적 색채가 물씬 풍기는 별호들을 사용했다. 또 우리 나라 도교의 시조로 평가받는 崔致遠이 등장하여 鹿精·熊精과 대화를 나누기도 했다. 또 坤帝니 水君이니 하는 神仙의 우두머리들도 등장한다. 문양해는 이들의 나이가 수백 살이라고도 했다. 그는 선인들의 譜帖을 만들어 유포하기도 했다. 그의 공초에 의하면, 이들 선인들은 ‘동국삼분설’·‘해도기병설’·‘北賊出現說’·‘靈巖起兵說’ 등을 주장하여 ‘三道起兵說’의 계획을 뒷받침하고 하동에 근거지를 마련하도록 했다. 도교와 정감록 사상이 서로 결합한 논리이다.
정부의 조사에 따르면 이들과 관련된 모든 것들은 문양해의 조작에 의한 허구로 드러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金鍾秀의 “그것의 정황을 볼 때는 苗脈이 있다”118)라는 주장은 음미해볼 만하다. 지리산 기슭에 위치한 하동을 중심으로 지리산 일대에 변혁 지향적인 일단의 집단이 도교를 수련하고 정감록을 익히며 조직적으로 체제저항을 기도했을 가능성이 충분히 있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하동이 거사들의 집단 거주지로 널리 알려져 있었음은 이러한 추론을 가능하게 한다.119)
한편 이 무렵에는 천주교와 정감록 사상이 함께 저항의 논리로 이용되었다. 이러한 현상은 주로 천주교도 가운데 일부가 정감록 사상에 기울어져 있었던 데서 확인할 수 있다. 정조 21년(1797)에 서울과 지방을 떠돌던 ‘저항 지식인’ 姜彛天과 여주의 문벌로서 유력 천주교도인 金建淳 등은 수시로 회합하면서, “바다 가운데 品字 모양을 닮은 섬이 있는데 병마가 强壯하다”거나, “바다 가운데 진인이 있는데 六任과 둔갑술을 알고 있다”는 따위의 해도기병설 관련 요언을 퍼뜨리면서 민심을 동요시켰다.120) 또한 천주교도 柳觀儉은 “聖世에 인천과 부평 사이에 밤에 배 일천 척을 댄다”는 비기의 내용을 알고 있었다. 그는 이를 이용하여 “예수가 庚申年에 태어났으니 경신은 곧 성세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에서 경신년은 곧 1800년이다. 이로 볼 때 천주교와 정감록 사상이 서로 연결되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1) 이처럼 천주교가 다른 종교나 사상과 함께 등장하자 정부에서는 천주교를 불교, 도교, 참위설 등과 비슷한 것으로 잘못 알기도 했다.
18세기의 민중운동이 무신란의 영향 아래서 확산되었다면 19세기의 민중운동은 洪景來亂으로 폭발하였다. 잘 알려졌듯이 홍경래 난의 사상적 기반은 정감록의 해도기병설이다. 홍경래 난의 창의문에는 紅衣島에서 태어난 鄭聖人이 鐵騎 10만을 거느리고 東國을 숙청할 뜻을 가졌다는 내용이 있다. 이 내용은 해도(홍의도)에서 정진인(성인)이 군사(철기 10만)를 이끌고 나와 조선(동국)을 정벌하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다는 해도기병설의 내용과 같다. 이처럼 홍경래 난 때 해도기병설이 출현한 이래 이와 비슷한 논리를 내세운 민중저항운동이 이어졌다.
이로 볼 때 19세기 전반기의 민중운동과 그 운동을 뒷받침하는 사상체계는 정감록의 해도기병설이 강력한 논리로 적용되고 있었다는 점에서 정조 때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그리고 민중운동의 형태도 앞 시기와 크게 다르지 않다. 18세기 이전의 요언, 영조 때의 괘서, 정조 때의 거사모의가 민중운동의 주류였다면, 순조 때는 요언, 괘서, 거사모가 비교적 고르게 일어났다. 그러나 이 때의 요언이나 괘서도 거사모의를 전제로 한 것이 대부분이어서 운동의 주류는 양이나 질적으로 보아도 역시 거사모의였다.
이 때 요언 단계의 저항에 그친 경우를 보면, 순조 30년(1830) 3월 영남 사람 郭必周가 잡술을 핑계대고 요사한 말을 만들어 서울과 지방을 오르내리며 인심을 선동하다가 포도청에 체포된 사실이 있다.122) 순조 32년에는 영변의 申士化·李以德·李斗千 등이 “진인을 따라야 한다”는 정감록의 말을 유포하며 인심을 선동하였다.123)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는 해도기병설과 연관되어 있으며 요언 단계에 머물지 않고 거사모의로 발전하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한편 이 무렵에도 鷄龍山 관련설은 민인들 사이에 널리 퍼져 있었다. 순조 21년(1821) 朴灝源·沈亨鎭 등은 ‘鷄龍山卜居說’을 퍼뜨렸다.124) 이들은 정감록의 계룡산 관련 내용, 즉 ‘鷄龍山 五百年 新都說’에 따라 계룡산에 들어갔다. 이들은 계룡산을 답사하고 나서 “산천이 수려하고 살기에 합당한 곳이어서 그 곳을 얻으면 자손들이 榮貴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壯士 137명과 함께 계룡산에 들어가 살 계획을 세웠다. 이 사건은 정감록에서 新都로 알려져온 계룡산을 소재로 한 요언 사건으로, 이 때의 계룡산은 ‘남조선신앙’에서 말하는 이상사회라 해도 좋을 것이다.
19세기 전반기 민중운동의 중요한 사상적 특성은 해도기병설의 틀을 유지하면서도 홍경래 난의 영향으로 ‘洪景來不死說’이 크게 유행하였다는 사실이다. 순조 17년 3월에 蔡壽永·安有謙 등은 명화적과 결탁하여 거사를 준비하면서, “홍경래와 李禧著가 생존하여 馬島로 잠입하였다”는 등의 ‘홍경래불사설’을 퍼뜨렸다.125) 순조 26년의 金致奎·李昌坤 등의 괘서에도 “홍경래·이희저가 서쪽에서 제주도로 들어갔다”라고 하거나, “홍경래와 禹君則이 제주에서 취회한다”는 주장이 이어졌다.126)
순조 26년에 鄭尙采와 朴亨瑞 등의 주도로 해도기병설과 관련한 거사모의가 일어났다.127) 정상채는 군사를 기르는 해도는 ‘紅霞島’이며, 군사를 이끌 진인은 鄭在龍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새로운 도읍, 즉 ‘福州(安東)’를 新都로 설정한 가운데 거사를 준비하였다. 이 때 ‘복주’는 전래의 신도로 알려져온 계룡산을 극복하고 새롭게 ‘남조선신앙’이 구체화된 곳으로, 곧 해도기병설의 도달점인 이상사회를 가리킨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이 때 출륙의 과정에서 주목되는 것은 조선을 정벌하기 전에 對馬島를 먼저 攻取한다는 ‘對馬島征伐說’이다. 이것은 현실의 군사적 의미로는 대마도를 아우르고 그 병력을 이용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해도기병설의 관점으로 볼 때는 군사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기보다는 ‘南賊出現說’을 뒷받침하는 논리로 작용했다고 이해할 수 있다. 이와 관련하여 정상채와 박형서가 주창한 “西賊이 나온 이후에 南賊이 마땅히 나오고, 진인이 해도에서 나온다”128)라는 말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 이 때의 서적은 봉기에 실패한 홍경래군을 뜻하며, 그들은 陳勝·吳廣의 무리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는 홍경래 난 이후 ‘남적출현설’이 ‘서적출현설’을 대체하면서 유력하게 전파되는 상황으로 설명할 수 있다.
이처럼 19세기 전반기의 민중운동은 정조 때 이래의 해도기병설을 주요 논리로 삼고 있는 가운데 여러 저항과정에서 ‘홍경래불사설’이 크게 유행하였다. 이것은 홍경래 난의 영향 아래서 민중운동이 전개되고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편으로 ‘남적출현설’은 ‘서적출현설’을 대체하는 것으로 홍경래 난의 실패를 반성하고 새롭게 일어나려는 움직임의 일환이었다.
097) | 鄭奭鍾,<肅宗朝의 社會動向과 彌勒信仰>(≪朝鮮後期社會變動硏究≫, 一潮閣, 198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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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98) | 鄭奭鍾, 위의 글, 50·65쪽. |
099) | ≪推案及鞫案≫104책, 신미 車忠傑推案. |
100) | 高成勳,≪朝鮮後期 變亂硏究≫(東國大 博士學位論文, 1993), 69∼70쪽. |
101) | ≪受敎定例≫妖邪惑衆二條. |
102) | 李相培,<朝鮮後期 漢城府 掛書에 관한 硏究>(≪鄕土서울≫53, 1993), 155∼156쪽. |
103) | 高成勳, 앞의 책, 96∼112쪽. |
104) | ≪英祖實錄≫권 35, 영조 9년 8월 갑술. |
105) | 高成勳, 앞의 책, 112∼125쪽. |
106) | 李能化는 이 두 사건을 정감록과 관련하여 일어난 대표적 사례로 꼽은 바 있다(李能化,≪朝鮮基督敎及外交史≫하, 3장 鄭鑑錄迷信之由來, 25∼26쪽). |
107) | ≪正祖實錄≫권 23, 정조 11년 4월 병진. |
108) | 李相培, 앞의 글, 156쪽. |
109) | ≪受敎定例≫妖邪惑衆二條. |
110) | ≪正祖實錄≫권 19, 정조 9년 3월 계유∼기묘·4월 경진. |
111) | ≪備邊司謄錄≫105책, 영조 15년 6월 15일. |
112) | 高成勳, 앞의 책, 139∼155쪽. |
113) | ≪正祖實錄≫권 14, 정조 6년 4월 경오. |
114) | ≪推案及鞫案≫235책, 임인 逆賊仁邦京來等推案 朴瑞集供, 169쪽. |
115) | 高成勳, 앞의 책, 155∼172쪽. |
116) | ≪正祖實錄≫권 23, 정조 11년 6월 경술. |
117) | ≪推案及鞫案≫234책, 임인 逆賊仁邦京來等推案 朴瑞集供, 195∼197쪽. |
118) | ≪承政院日記≫1579책, 정조 9년 3월 23일. |
119) | ≪正祖實錄≫권 21, 정조 10년 2월 을미. |
120) | ≪正祖實錄≫권 47, 정조 21년 11월 병자·정축·무인·신사·을유. ≪純祖實錄≫권 2, 순조 원년 4월 병인. |
121) | 趙 珖, 앞의 책, 161∼162쪽. |
122) | ≪純祖實錄≫권 31, 순조 30년 3월 경술. |
123) | ≪純祖實錄≫권 32, 순조 32년 10월 임자. |
124) | ≪左捕盜廳謄錄≫4책, 신사 7월 14일, 71∼78쪽. |
125) | ≪純祖實錄≫권 20, 순조 17년 3월 기미. |
126) | ≪推案及鞫案≫282책, 병술 罪人致奎昌坤柳聖浩李元基鞫案. |
127) | ≪推案及鞫案≫281책, 병술 罪人亨瑞尙采申季亮鞫案. |
128) | ≪推案及鞫案≫281책, 병술 罪人亨瑞尙采申季亮鞫案 鄭尙采供, 78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