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사회세력의 동향
18세기 후반 향촌사회에서 기존세력과 신진세력 사이의 갈등이 심화되면서 향권의 향배가 재지사족이나 서얼·부민 등에게는 매우 예민한 관심사였지만, 민중에게는 그것이 아직까지는 심각한 관심사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향회가 일반 농민의 이해와 관련되는 일을 처리하면서 점차 그 기능이 확대되었다고 하여도, 실제로 향회에 참여할 수 있었던 것은 부민에 한정되었고, 부민의 이해가 우선되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빈민과 부민의 이해는 서로 모순되었으며, 더구나 이 시기에는 향회가 부세수취를 위해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수령의 들러리 기구에 지나지 않았다. 즉 향회는 다만 민심을 탐지하는 여론 수집 기구에 불과하였다. 향회에 일반 농민들도 참여하여 기층사회의 성장한 힘이 안으로 결집되는 것은 19세기에 들어서였다. 민중운동 과정에서 농민 동원의 한 형태로 향회가 기능하는 것도 19세기에 이르러서였다.209)
물론 18세기 향촌사회의 이같은 움직임이 일반 민중과 전혀 관계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향권을 둘러싼 향촌사회의 일련의 동요 속에서 봉건지배층의 절대적 지위가 상대적으로 전락되었고, 그들의 권위가 상실되는 모습이 민중 앞에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이는 민중으로 하여금 그 동안 사회경제적 변동 속에서 내면적으로 육성되어 온 사회의식을 점증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두레나 계와 같은 조직을 통해 다져온 유대관계를 보다 확고히 하여 규격화된 봉건적 질서에서 벗어나고자 다짐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향권에서 배제된 재지사족은 17세기 후반 이래 중앙정계의 격렬한 정쟁과정에서 몰락한 양반관료와 더불어 殘班이란 새로운 사회계층을 형성, 기층사회와 유기적 관련을 가지면서 민중을 각성하고 자극하였으니, 그들은 지식인으로서 반체제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영향이 적지 않았다. 즉 기층사회의 변동에 대응하는 상층사회의 변동은 서로 영향을 미치면서 사회변동의 폭을 넓혀 갔다. 이같은 사회변동은 당시의 정치권에도 영향을 미쳤다. 왜냐하면 이 시기의 사회변동은 지배세력의 물적·인적 기반까지 동요시키며 전개되었기 때문이다.
현실적으로 특정의 사회세력은 기층사회의 움직임을 정계와 연계시키면서 변혁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것은 변란이란 모습으로 나타났다. 변란이란 체제 자체에서 소외되어 있는 집단이 물리력으로 집권체제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체제를 수립하고자 봉기하는 사태를 말한다. 18세기 각 사회세력의 저항이 총체적으로 표출된 변란이 영조 4년(1728)의 戊申亂이었다.210) 무신란에는 양반관료 출신을 비롯하여 잔반, 군관, 향임, 소상인, 소작인, 노비 등 다양한 계층이 참여하고 있었는데, 이 시기 민중운동의 흐름을 바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들 사회세력의 동향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무신란이 일어났던 때를 전후하여 민중운동의 또 다른 양상이라고 볼 수 있는 邊山群盜나 明火賊이 사회문제화되고 있었는데, 거기에 노비, 유민 등이 다수 참여하고 있었다고 할 때, 그들의 동향 역시 주목되어야 한다.
민중운동이란 본질적으로 봉건질서가 초래한 모순을 민중 스스로가 극복하려는 움직임으로서, 기존의 통치질서를 부정하려는 면을 필연적으로 내재하게 되며, 그리하여 민중운동은 궁극적으로 정치적 성격을 예민하게 띠지 않을 수 없다. 18세기에는 그러한 움직임이 사회 저변에 점차 잉태되고 있었으며, 때로는 국지적으로 분출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체제에 대한 반발 움직임은 17세기 말에 노비·유민·역관·서얼·승려 등에 의한 비밀결사와 미륵신앙운동에서 이미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민중운동은 대다수 구성원인 민중에 의해 주도되기에 앞서 그 초기에는 사회모순에 특히 민감한 특정한 사회세력에 의해 발동된다. 조선 후기 민중운동에서도 당시 민중의 주류인 농민이 주체적으로 변혁운동에 나서는 것은 훨씬 시간이 지난 뒤였다. 17세기 말 이래 특정한 사회세력이 다양하게 나타났다.
숙종 10년(1684)경 한양 청파동에는 殺主契가 있었고, 이 보다 앞서 전라도 남원에는 殺人契가 있었는데 그 구성원은 대개 노비들이었다.211) 숙종 39년 전라도 변산반도에서 수년 동안 횡행하던 군도 역시 대부분 노비로 이루어져 있었다고 한다.212) 노비는 봉건적 신분질서 아래에서 가장 핍박받는 존재였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그들의 지위가 어느 정도 향상되었다고 하지만, 노비는 원칙적으로 벼슬할 수가 없었고, 자유민이 아니어서 신분이 세습되고, 매매·양도·상속되었다. 특히 私奴婢는 주인에 의해 임의로 강제되고 때로는 私刑을 받기도 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한 의식이 생겨나면서 그들은 주인에 대한 절대 복종에 회의하게 되었고, 그러한 현실에 불만을 갖게 되었다. 특히 원한이 깊어지면서 주인, 즉 양반을 제거하고자 하는 움직임까지 나타나기에 이른 것이다. 비록 그러한 물리적 힘에 의한 그들의 노력은 성사되지 않았으나, 노비들이 그 신분에서 벗어나려는 움직임은 그 후 끈질기게 추구되어 노비제는 점차 허구화되어 갔다.
숙종 14년에는 미륵신앙 사건이 발각되었는데, 승려·무녀·아전·노비·농민 등이 관계되었다.213) 그들 모두가 불우한 계층으로서 미륵신앙을 구심점으로 하여 세력을 결집, 현실의 질곡을 벗어나려 하였던 것이다. 그 중에서도 승려세력은 숙종 23년(1697) 몰락농민으로서 규모가 큰 도적집단을 이루고 있던 장길산 등과 거사를 계획하다가 고변되었다.214) 조선왕조는 유교국가였기 때문에, 불교는 초기부터 지도이념으로서의 지위를 잃었고 민간신앙으로서 명맥을 유지하였다. 따라서 승려의 신분은 천시되는 존재였다. 더구나 16세기 이후 승려들은 군역을 회피하기 위하여 입산한 양민들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정부에서도 불량한 무리로 파악하는 경향이 있었으며 그들 자신들도 현실사회에 대하여 불만이 많았다. 그들은 농민들을 선동하여 규합하기에 유리하였고, 그들 자신들도 노력에 따라서는 조직력과 군사력을 갖추기에 용이하였다.
거사계획에는 당초 서얼 세력도 가담하였다. 서얼은 양반의 자제이면서도 신분질서를 엄격히 지키려는 봉건지배층의 성리학적 명분론에 의해 차별대우를 받아 사회진출에 각종 제한이 가해졌다.215) 따라서 양반가문에서 지식을 습득하고, 또 능력이 뛰어난 경우에도 소외될 수밖에 없어 불만이 컸다. 이들은 사회경제적 변화를 배경으로 꾸준히 신분상승을 추구하였으나, 그것이 쉽게 이루어지지 않자 변혁운동에 참여하기에 이른 것이다. 그들의 움직임은 봉건지배층으로서도 무시할 수가 없어 18세기 후반에는 일정한 지위를 획득하기도 했다.
이 시기에는 서얼층과 더불어 吏胥·譯官 등 중인층의 동향도 예사롭지 않았다. 중인층은 상당한 전문적 교양을 가지고 행정직이나 기술직에서 실무를 맡고 있었는데, 그 업무의 중요성에 비하여 양반사대부와 크게 차별을 받았다. 역사적 신분배경과 기술천시풍토가 그들을 중인층이라는 고정적 신분층으로 굳혀서 정치에는 결코 참여할 수 없었다. 따라서 그들 역시 사회변동 속에서 부를 축적하며 이를 토대로 꾸준히 신분상승의 기회를 엿보았다.216) 그리고 자신들의 지위 향상을 위해 중인층의 단결을 시도하였다. 그들은 특히 봉건적 질서가 갖고 있던 모순을 누구 못지않게 인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들의 향배는 이 시기 민중운동에 있어 그 영향이 적지 않았다.
한편 18세기에는 다수의 양반들이 몰락하여 잔반 계층이 형성되고 있었다. 중앙정계에서는 붕당정치가 변질되어 가면서 양반 상호간에 일어난 극심한 정치적 갈등은 양반층의 자기 도태를 가져왔다. 이와 같은 현상은 일당 전제화가 전개되면서 보다 현저해져서, 권력을 장악한 일부의 양반을 제외하고는 다수 양반들이 몰락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관직에 등용될 기회를 얻지 못한 채, 향촌사회에서나 겨우 위세를 유지하는 鄕班, 즉 재지사족이 되거나 더욱 몰락하여 잔반이 되어 갔다. 그리고 향촌사회에서는 상품화폐경제의 진전에 따라 거기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지 못한 재지사족이 그들의 물적 기반이 취약해지면서 향권 장악에 실패하고 소외되어 잔반이 되어 갔다. 잔반 계층은 실학자들의 경우와 같이 교양과 지식 수준이 매우 높았다. 대부분 농촌에서 궁박한 생활을 감수해야 했던 잔반들은 심하면 소작으로 생활을 유지하거나 상업으로 생활을 꾸려나가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였다. 따라서 체제에 대하여 그들은 매우 비판적이었다. 그들은 書堂 등을 통해 농민층의 자제를 훈도하면서 농민층의 입장을 지지하고 농촌사회의 문제를 논리적으로 개진하면서 기층사회를 각성시켰다. 무신란에 그들이 참여하고 있었던 것은 자연스러운 처사였으며, 그들의 활동은 사회모순이 심화될수록 보다 더 기대되고 있었다.
18세기 기층사회의 동향에서 특히 두드러진 현상은 농민층 분화에 따른 유민의 광범위한 발생이었다. 여러 변란에 다수 구성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것이 유민이었으며, 각지에서 횡행한 도적도 유민으로 거의 구성되고 있었다. 토지소유관계의 모순, 상품화폐경제의 진전, 부세구조의 문제 등으로 인해 토지를 상실한 무전농민들은 자신의 노동력만이 생존의 수단이었는데, 자연재해가 빈발하고 탐관오리의 횡포가 가혹해지면서 마침내는 농촌을 떠나야 했다. 18세기 농민의 유망은 17세기보다도 더 심해졌고,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그들은 도시나 광산, 포구 등에서 賃勞動으로 가족을 거느리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궁벽한 산골을 찾아 火田을 일구거나 도적이 되었다. 때로는 居士가 되어 걸인·행상·연예활동 등을 하며 전국을 순회하였는데, 1만 명에 가까운 인원이 전국적 연결망을 가지고 있기도 하였다.217) 그런데 유민의 증가는 봉건정부로서도 심각한 문제의 하나였다. 재정기반을 농민으로부터의 부세수취에 두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의 유망은 결과적으로 정부로 하여금 수탈의 기반을 잃게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농민의 이농을 막기 위하여 호패법을 실시하고, 오가작통법을 강요하는 등 법제적으로 통제하지만, 생존의 수단을 상실한 농민을 물리력만으로 억제할 수는 없었다. 이 시기에는 특히 기근이 심하였기 때문에 농민의 유망은 매우 광범하였다. 이들 유민은 기본적으로 현실에 불만을 가지고 있었고 기회만 있으면 저항세력화할 소지가 대단히 컸다. 따라서 그들의 움직임은 향촌사회의 동요, 나아가 체제에 대한 도전이란 측면에서 봉건지배층에게 커다란 위기의식을 불러일으켰다.218)
그런데 당시 기층사회의 움직임은 특정한 사회세력에 의한 별개의 움직임으로 보고되고 있으나, 그 내면을 살펴보면 그들 각 사회세력은 서로 긴밀한 연계 속에서 변란을 시도하고 있었다.219) 그들 모두가 체제의 변혁을 공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각 사회세력 모두가 권력에의 참여를 의도한 것은 아니었지만, 봉건적 질서가 갖는 모순으로 인해 억압과 핍박을 받고 있었음은 서로간의 결속을 용이하게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봉건지배층은 정치적 갈등을 스스로가 조정하면서 수취체제를 개선하여 농민층의 불만을 해소시키고자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일시적이고 미봉적이어서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러한 조치가 미봉적이었음이 드러나면서 민중운동은 보다 적극화되었다. 민중은 이제 더 이상 정부에 의존하려 하지 않았다. 삶의 길은 스스로 개척하고 강구하는 것 뿐임을 알게 되었다. 봉건적 질서의 변혁만이 그들의 살 길임을 점차 확인하기에 이르렀다.
이상에서와 같이 18세기의 조선사회는 봉건적 질서가 갖는 모순으로 인하여 더 이상 정상적으로 진전되지 못하는 가운데, 새로운 질서가 활발하게 추구되고 있었다. 변화의 움직임은 봉건적 지배체제의 토대였던 농촌사회가 동요하면서 유발되었다. 농촌사회의 동요는 토지소유관계의 변화, 농업 생산력과 경영형태의 변화, 상품화폐경제의 편입 등 내재적 측면과 탐관오리의 횡포, 부세구조의 모순, 자연재해의 빈발 등 외연적 측면의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심화되고 있었는데, 그 결과에 의해 농민층이 양극으로 분화되어 갔고, 다수의 농민을 무전농민으로 변신시키기에 이르렀다. 농촌사회가 극도로 불안한 속에서 농민들은 조선왕조가 내세웠던 농본정책이 기대할 수 없는 허구였음을 깨닫고 자활의 길을 모색하여 힘의 결집을 시도하였다. 그 징표가 농민들만으로 구성된 두레였다. 사회체제에 대한 변혁의 움직임은 농촌에서 배제된 유민들에 의해 보다 고양되고 있었다. 자신의 노동력밖에는 생계수단이 없고, 그것도 충분히 활용할 수 없는 조건 아래에서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은 도적이나 변란에 가담하여 새로운 세상을 기대하는 것뿐이었다. 민중의 봉기는 시간상의 문제였을 뿐, 필연적으로 예비되고 있었다.
<崔完基>
209) | 安秉旭,<朝鮮後期 自治와 抵抗組織으로서의 鄕會>(≪聖心女子大學論文集≫18, 1986), 2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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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0) | 李鍾範,<1728年 戊申亂의 性格>(≪朝鮮時代 政治史의 再照明≫, 汎潮社, 1985). |
211) | ≪朝野會通≫15책, 숙종 10년 9월. |
212) | ≪推案及鞫案≫36책, 무진 宋進裕獄事文書. |
213) | ≪承政院日記≫332책, 숙종 14년 7월 27·28일. |
214) | 鄭奭鍾,<肅宗年間 僧侶勢力의 擧事計劃과 張吉山>(≪東方學志≫31, 1983), 122쪽. |
215) | 李俊九,<朝鮮後期의「業儒·業武」와 그 地位>(≪震檀學報≫60, 1985), 42쪽. |
216) | 韓永愚,<朝鮮後期 ‘中人’에 대하여-哲宗朝 中人通淸運動자료를 중심으로->(≪韓國學報≫45, 一志社, 1986), 89쪽. 李樹健,<朝鮮朝 鄕吏의 一硏究>(≪文理大學報≫2, 嶺南大, 1974), 80쪽. |
217) | 全信宰,<居士考-流浪藝術人集團硏究序說->(≪韓國人의 生活意識과 民衆藝術≫, 成均館大 大東文化硏究院, 1984), 469쪽. |
218) | 李鍾範, 앞의 글, 227쪽. |
219) | 鄭奭鍾, 앞의 책, 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