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유민과 명화적
1) 유민
(1) 유민발생의 배경
농민들이 지배층의 수탈에 저항하는 일차적인 형태로 流亡이 있다. 유망은 농민들이 사회경제적인 요인과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생존기반을 점차 상실하여 現居住地에서 더 이상 살 수 없게 되었을 때, 자신의 현거주지를 自意로 이탈하여 다른 곳으로 옮겨가는 행위이며, 이들 流亡民을 일컬어 流民이라 할 수 있다. 따라서 유민의 입장에서 보자면 유망의 결과는 첫째 거주지의 변화를 가져오고, 둘째 생계수단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셋째 경우에 따라서는 유민 자신의 신분상의 변화를 가져오며, 넷째 일시적으로나마 국가의 파악 내지는 통제에서 벗어나는 결과를 가져오고, 다섯째 가족간의 離散을 가져와 가족구성상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220)
유망은 농민층의 입장에서 보면 기존 수취체제에 대한 避役저항의 성격을 갖는 것으로서 국가의 입장에서 보면 수취기반의 동요를 의미한다. 그리고 일부 농민이 국가의 부세를 피하는 방편으로 유망하면 그 부담은 향촌에 남은 농민들에게 疊役 등의 형태로 추가되었다. 즉 유망이 유민 당사자의 입장에서 보면 부세수취를 피하는 임시방편적인 방안이었지만 이것은 남은 농민의 희생을 전제로 한 것이다. 따라서 이러한 현상의 일반화는 상대적인 賦稅不均의 심화와 사회통제력의 이완을 가져와 민인들 상호간의 계층분화를 촉진하는 계기로 작용하기도 하였다.221)
이러한 농민의 유망은 전근대사회에 있어 일반적 현상이라 할 수 있으나, 발생배경을 살펴보면 각 시기마다 그 나름의 특성을 갖고 있는데, 18세기 유망현상의 가장 큰 특징은 유민의 수가 이전 시기에 비해 크게 증가한다는 점과 유민들의 일부가 토지에 재긴박되지 않고 완전히 유리되어 간다는 점이다. 18세기 유망현상의 이러한 특성은 이 시기의 사회경제적인 조건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18세기 조선사회는 조선 후기 이래로 진행되어온 농업생산력의 증대, 상품화폐경제의 발전, 신분제의 동요 등에 따라 중세사회가 해체되는 여러 모습들이 드러나는 시기였다. 그리하여 이러한 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른 모순의 증대로 농민의 유망현상은 더욱 잦아지고 규모가 급격하게 커지면서 중세사회의 지배체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였다.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은 농업경영에 있어서 몇 가지 중대한 변동을 초래하였는데, 그것은 지주층의 토지집적에 따른 토지 소유관계의 양극분화 현상과 廣作經營의 확대에 따른 경영분화 현상으로 파악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지주층과 새롭게 성장한 부농, 상인들은 토지 상품화가 일반화되면서 토지매매에 의하여 토지를 집적하여 나갔고, 여기에 이앙법 등을 비롯한 농법의 발전 및 곡물시장을 비롯한 유통경제의 발달은 이들에 의한 토지집적을 더욱 가속화시켰다.222) 반면 경제구조의 변동에 잘 대처하지 못한 영세농민은 부세부담, 고리대부담에 농사의 흉작까지 겹쳐 헐값에 자신의 토지를 내놓아야만 했다. 이렇듯 토지집중이 극단화되어가는 한편에서는 토지임대차 관계를 통한 경영상의 변화가 나타나고 있었다. 즉 이앙법·견종법 등의 보급으로 현저히 상승된 농업 생산력은 필요노동력을 절감시킴으로써 광작경영을 가능케 하였으며, 이에 따라 소유분화로 인하여 양산된 貧農·無土之民은 借耕地 획득마저도 어렵게 되었다.223) 그리하여 농지의 차경에서 배제되어 자립적인 재생산이 불가능해진 無田農民들은 挾戶·婢夫 등의 형태로 지주층에 포섭되거나 雇工 등 농촌 임노동자층을 형성하기도 했지만, 이마저 불가능했던 빈농·무토지민들은 토지로부터 축출되어 유민화할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유민발생의 배경에는 이와 같은 농업경영의 변동과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외에도 국가권력에 의한 대민 수탈이 주된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 시기에 들어 부세운영이 전세에서의 比摠制, 군역세에서의 里定制, 환곡에서의 里還·結還制 등과 같이 공동납의 형태로 운영되고, 중앙 및 지방의 재정수요가 늘어가게 됨에 따라 각종의 불법적인 수세관행이 파행적인 형태로 진행되어 나갔다. 수령은 증대된 지배력을 바탕으로 각종 비리를 자행하였으며, 수령과 결탁한 吏鄕 심지어 面·里任들까지도 각종 수탈을 공공연하게 자행하였다.224)
한편 신분제의 동요와 더불어 부민들은 각종의 부담에서 빠져나가게 됨에 따라 국가의 부세수탈은 빈농층으로 집중되었다. 즉 부민들이 양반신분을 모칭하거나 이서배에게 뇌물을 제공하는 대가로 각종 신역과 白地徵稅, 환곡 등 각종 부담으로부터 벗어나게 됨에 따라 빈농·무토지민들이 이들의 부담까지 떠맡아야 했다.225) 이처럼 稍實·饒戶之民이 부세부담에서 벗어남에 따라 빈민층으로 조세수탈이 집중되고, 이로 말미암은 유망으로 인하여 疊徵·族徵 등이 농민층에게 강요되자 유망현상은 더욱 촉진되었다.
이러한 사회경제적 모순의 심화와 함께 조선 후기의 극심한 자연재해는 민의 유망현상을 더욱 가속화시켰다. 조선 후기에는 자연재해가 빈번하여 대규모 기근은 평균 3∼6년에 1회, 전염병은 2∼6년에 1회 정도 발생하였는데, 재해가 심할 때에는 영조 16년(1740)의 경우처럼 전국에서 일시에 50∼60만 명이 전염병으로 사망하기까지 하였다.226) 일정한 생업기반을 갖지 못한 유민들은 특히 기근·홍수·전염병과 같은 자연재해에 거의 무방비로 노출되었다. 굶주림에 지친 이들은 주인을 결박한 채 수확하지 않은 들판의 곡식을 베어먹거나 방목한 牛馬를 잡아먹었으며,227) 심지어 한동네 여인을 살해하여 식육하기도 하였다.228) 한겨울에도 볏집으로 겨우 등과 배를 가린 채 추위에 떨다 무덤을 파헤쳐 斂衣를 걸쳐입기도 하였지만 부지기수가 얼어죽었다.229) 이러한 기근의 참상 속에서는 가족간의 인륜마저 저버리게 되어서 유랑의 과정에서 6∼7세된 어린 자식을 버리거나,230) 어머니를 길에다 내버리기도 하였으며,231)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살길을 찾지 못하던 유민 일가족의 가장이 처자를 목졸라 죽이고 자신도 목매 죽기도 하였다.232) 이처럼 불안정한 상태에서 떠도는 유민들은 “무뢰유민이 도성 안으로 몰려들어 처음에는 소나 말을 훔치는 도적이 되었으나 지금은 인가를 약탈하는 도적이 되었으며, 성 밖 수십 리 지역까지 그 피해를 입고 있다”233)고 한 데서 알 수 있듯이 호구지책의 한 방편으로 도적질을 자행하기도 하였다.
220) | 邊柱承,≪朝鮮後期 流民硏究≫(高麗大 博士學位論文, 1997), 1∼2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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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1) | 安秉旭,<朝鮮後期 民隱의 一端과 民의 動向-正祖代 應旨民隱疏를 중심으로->(≪韓國文化≫2, 서울大, 1981), 281쪽. |
222) | 李世永,<18, 9세기 兩班土豪의 地主經營>(≪韓國文化≫6, 1985), 80쪽. |
223) | 宋贊植,<朝鮮後期 農業에 있어서의 廣作運動>(≪李海南博士華甲紀念史學論叢≫, 1970). |
224) | 金仁杰,≪조선후기 鄕村社會 변동에 관한 연구-18, 19세기<鄕權>담당층의 변화를 중심으로-≫(서울大 博士學位論文, 1991). |
225) | 安秉旭, 앞의 글. |
226) | 趙 珖,<19世紀 民亂의 社會的 背景>(≪19世紀 韓國 傳統社會의 變貌와 民衆意識≫, 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2). |
227) | ≪顯宗改修實錄≫권 23, 현종 11년 8월 갑오. |
228) | ≪肅宗實錄≫권 31, 숙종 23년 8월 신유. |
229) | ≪顯宗改修實錄≫권 23, 현종 12년 정월 계해. |
230) | ≪顯宗改修實錄≫권 24, 현종 12년 4월 갑신. |
231) | 金壽增,≪谷雲集≫권 6, 記流民事. |
232) | ≪英祖實錄≫권 89, 영조 33년 정월 신해. |
233) | ≪肅宗實錄≫권 54, 숙종 39년 5월 갑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