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활동양상과 그 성격
명화적은 전시기에 비해 한층 발전된 조직력, 무장력, 전투력을 바탕으로 산악지대나 도서지방과 같이 공권력이 미치지 못하는 곳을 근거지로 하여, 도성이나 한강 장시와 같이 물화가 집산되는 곳, 경기 내의 양주와 같이 교통의 요지 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명화적이 출몰한 산악지대는 강원도의 소백산지대, 평안도 폐사군, 함경도 안변 등의 지역과 전라도의 변산 주변 읍인 정읍·장성과 월출산 근방 등이다.313) 이러한 지역에 근거지를 확보한 명화적은 魏伯珪가 禁盜之弊를 논하면서 “도적들이 크게는 수십 명, 작게는 십여 명으로 무리를 지어 서로 내통하는데, 백리 간에 서로 상응하며 경계를 넘어 연결되어 있다”314)고 우려할 정도로 국지적인 활동영역을 넘어 전국적인 연계를 시도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근거지를 확보하고 활동무대를 넓힌 명화적은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이 시기 명화적의 주된 활동으로는 첫째, 양반이나 토호 등 악덕지주가를 습격하여 지대와 고리대 등을 통해 착취를 자행해 온 것에 대해 보복하였으며 또한 포교·영장 등 악형을 자행하는 포악한 관리들의 만행을 응징하였다. 현종 8년(1667)에 士人 朴自三의 노비가 수백 금을 내고 노비살이에서 벗어난 후 명화적 일당을 끌어들여 박자삼의 집에 불을 지르고 그 돈을 다시 탈취하였다.315) 영조 30년(1754)에는 서울의 서부 대현에 사는 양반 沈海普의 집에 명화적 5∼6인이 몽둥이를 들고 침입하여 방안에 쌓아둔 재화를 모조리 약탈해 갔으며,316) 영조 48년에는 명화적이 대낮에 도성에 출현하여 포교를 살해하였다.317)
둘째, 관부를 습격하여 물화와 군기를 탈취하거나, 지방에서 중앙으로 보내는 각종 상납물을 약탈하였다. 숙종 29년(1703)에 瑞興의 봉수대를 명화적이 습격하여 군기를 탈취하였으며,318) 영조 14년에는 三登縣에 출몰한 명화적이 총포를 쏘고 횃불을 치켜들며 관부에 들어가 勅需庫의 돈과 재물을 약탈하였다.319) 명화적은 이처럼 관부를 습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종 상납물을 탈취하기도 하였다. 숙종 17년 長湍討捕使의 보고에 의하면, 서울로 상납할 布物을 싣고 오는 사람들을 파주 읍내에 맞아들였는데, 명화적이 말을 타고 밤중에 돌입하여 무리를 인솔하고 온 頭目奴를 해치고 貢木을 탈취하였다.320) 영조 32년에는 명화적이 成歡의 주막을 공격하여 공주와 영동에서 올려보내는 軍布錢을 약탈하기도 하였다.321)
셋째, 유통로를 장악하여 상인들의 재화를 약탈하였다. 이에 따라 지방감영으로부터 명화적이 주요 도로를 장악하여 통행이 불가능하다는 보고가 잇따를 정도였다. 기호지방에서는 명화적이 대낮에 길거리에서 재화를 빼앗고 사람을 해치므로 상점들이 문을 일찍 닫고 늦게 열며 상인들은 무리를 지어 다녀야 할 정도였다.322) 또한 명화적은 물화가 집산되는 장시에도 출몰하여 안성장시는 도적의 소굴이라 지칭될 정도였다.323)
이처럼 명화적의 약탈 및 공격대상은 주로 양반, 토호 지주층, 관료, 여각, 객주, 그리고 중앙 상납전이며 나아가서는 관아로 돌입하기도 했다. 이러한 사실은 물론 이들에게 약탈 물품이 풍부하였다는 측면도 배제할 수 없지만, 그 저변에 깔려 있는 명화적 집단과 이들 사이에 존재하던 대립관계가 표출된 것으로 파악할 수 있다. 특히 토호 지주층과, 봉건지주나 관료들의 유통권을 장악해가는 교두보 역할을 담당했던 여각, 객주에 대한 공격은 이들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타격을 주었으며, 상납전의 약탈이나 관아돌입은 국가권력에 대한 반항의 한 조짐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시기 명화적의 활동은 일정 정도 반봉건 저항운동의 성격을 갖는다 하겠다.324)
명화적은 이러한 약탈행위를 넘어서 세력을 결집하여 역모를 꾀하거나 변란세력과 연결되기도 하였다. 인조 7년(1629)에 李忠景과 奴 戒春과 幕同 등이 중심이 된 명화적 일당은 산골짜기에 근거지를 마련하고 유민을 끌어들여 세력을 확장한 후, 崔瑩과 南怡將軍의 초상을 그려 제사를 지내는 한편 조직과 강령을 갖추고 철원·평강 등지를 무대로 활동하였다.325) 이들이 최영과 남이 장군을 받들고서 역모를 꾀했다는 점에서 이 시기 명화적의 활동이 갖는 정치 지향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한편 명화적은 향촌 내의 변란세력과 연결되어 활동하기도 하였다. 현종 12년(1671)에 錦山의 좌수 李光星과 교생 禹明 등이 50여 명의 무리를 모아 관부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들은 나아가 龍潭縣의 군기와 무주 적상산성의 관향곡을 탈취하여 덕유산에 근거지를 마련한 후 山行砲手, 승려와 결탁하여 세력을 확장할 계획을 세웠으나 결국 발각되어 대부분 주살되었다. 그런데 이들이 체포될 무렵에 명화적 백여 명이 징을 두드리고 피리를 불며 금산 관아를 공격한 데서 알 수 있듯이 명화적은 이들 변란세력과 결탁하고 있었다.326)
이상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18세기에는 사회경제적 모순에 따라 농촌에서 축출된 많은 유민들 중의 일부가 명화적으로 전화하여 지배층에 대해 격렬히 저항하였는데, 이들이 지배층과 국가권력의 수탈로 인한 피해를 가장 많이 입은 계층임을 감안한다면 이들의 저항은 당연한 것이었다. 그런데 이 당시 몰락농민층이 명화적과 같이 도적의 형태로 사회모순에 저항하게 된 까닭은 농민들의 불만을 조직하여 표출할 수 있는 토양이 아직 마련되어 있지 못하였기 때문이며, 국가의 지방지배력에 한계가 있어 이들이 산악지대나 도서지방을 활동 근거지로 확보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이 시기 명화적의 활동이 지배층에게 심대한 타격을 준 것은 사실이지만 이들의 저항은 다음과 같은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첫째, 도적활동이 사회모순에 대한 저항의 한 형태이기는 하지만 이들의 활동은 잉여물에 대한 약탈을 본질로 하는 까닭에 사회모순을 발전적으로 해결하려는 전망을 지니고 있지 못하였다. 둘째, 이들은 생산기반으로부터 유리된 층이므로 투쟁이 지극히 일회적이거나 즉흥적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상적인 삶에 토대를 둔 지속적이며 견실한 투쟁이 되지는 못하였다. 셋째, 앞의 두 조건 때문에 도적집단은 농민과 결합하는 대중투쟁을 전개할 수 없었다.327) 요컨대 유민의 전화과정에서 분기된 명화적의 일부는 봉건사회 해체기에 반봉건 지향을 나타내기도 하였으나, 그들은 반봉건 투쟁에서 동일한 이해기반을 가지고 주체적으로 대응하기에는 미숙한 계층이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명화적 활동은 중세체제 내의 항쟁에서 19세기의 중세체제를 부정하는 민란으로 넘어가는 전환점에 위치하여 조선 후기 민중운동의 발전에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즉 조선 후기 민중운동은 18세기를 거치면서 양적·질적으로 성장하여 19세기에 이르러 중세체제를 부정하고 투쟁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던 것이다.
313) | 한상권, 앞의 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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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4) | 魏伯珪,≪存齋全書≫권 3, 封事 禁盜之弊. |
315) | ≪顯宗改修實錄≫권 18, 현종 8년 10월 기축. |
316) | ≪英祖實錄≫권 82, 영조 30년 11월 정축. |
317) | ≪英祖實錄≫권 118, 영조 48년 4월 병자. |
318) | ≪肅宗實錄≫권 38, 숙종 29년 3월 기미. |
319) | ≪英祖實錄≫권 47, 영조 14년 12월 무술. |
320) | ≪備邊司謄錄≫45책, 숙종 17년 정월 6일. |
321) | ≪英祖實錄≫권 88, 영조 32년 윤 9월 경자. |
322) | ≪正祖實錄≫권 21, 정조 원년 12월 기미. |
323) | ≪英祖實錄≫권 66, 영조 23년 12월 갑술. |
324) | 裵亢燮, 앞의 글, 204쪽. |
325) | ≪仁祖實錄≫권 20, 인조 7년 2월 계축. |
326) | ≪顯宗改修實錄≫권 25, 현종 12년 11월 정축. |
327) | 한상권, 앞의 글, 50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