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1. 강화도조약과 개항
19세기 중엽 동아시아지역에서 자본주의 열강들의 시장개방 요구는 무력전쟁으로 이어졌고, 청국과 일본은 각기 1842년과 1854년 이에 굴복하여 통상조약을 체결하고 국내시장을 개방하였다. 1866년과 1871년 프랑스와 미국은 포함과 상륙부대를 앞세워 수도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를 점령하고 조선에 대해서도 개방을 요구하였다. 조선정부는 프랑스와 미국의 무력도발로 다수의 사상자와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이들의 요구를 거부하였다. 오히려 자본주의 세력의 막강한 힘을 전쟁에서 뼈저리게 겪은 직후 “서양 오랑캐의 침략에 맞서 싸우지 않는 것은 화의하는 것이며, 화의를 주장하는 것은 곧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척화비를 전국 군현에 건립함으로써 정부의 반개방의지를 천명하였다. 그 결과 조선은 그때까지 지구상에서 자본주의 시장권에 공식적으로 편입되지 않았던 유일한 지역이 되었다.
최근의 연구들은 조선이 개항을 결정하게 되는 주요 요인으로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조선에 대한 개방압력과 조선에 대하여 전통적으로 외교적인 후원자였던 청의 권고 등 외부의 영향과 함께 이후 고종 친정 이후 집권관료층 가운데 주체적으로 개항을 주장하였던 세력의 존재에 대해 주목하고 있다. 이 글은 조선정부가 대외정책을 쇄국에서 개방으로 전환하기까지의 시기에 집권세력의 대외인식을 검토하고, 이를 토대로 대내외적 상황의 변화와 그들의 집권세력화과정이 어떻게 맞물리면서 실제 대외정책의 변화로 연결되는가 하는 과정을 중심으로 기술하고자 한다.235)
서구 열강의 문호개방 요구를 끝까지 거부하였던 조선을 우회적으로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편입시켰던 세력은 동일 문명권의 인접국가 일본이었다. 또한 조선은 자본주의 시장체제에 편입된 뒤에도 개방의 양상이 청국과 일본과는 다른 경로를 밟았다. 즉 청국과 일본이 서구 열강들 가운데 특정의 국가와의 조약을 체결한 뒤 곧 바로 다른 국가와도 이에 준하는 조약체제를 수용하여 국내시장을 전면적인 개방하였던 사실과 달리 조선은 상당기간 문호개방을 거부하였다. 조선이 서구자본주의 열강에 대한 개방을 시도한 것은 일본과 조약을 맺은 지 6년이 지난 다음이었고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은 이후에도 서구 각국에 대하여 전면적인 개방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19세기 후반 선진자본주의 세력들이 이미 동아시아 지역에 진출하여 교두보를 확보하고 그들의 세력권 확장을 위한 경쟁이 치열하였던 상황에서 조선의 이와 같은 외교적인 자세는 기존의 세력판도 변화에 매우 민감한 영향을 불러 일으킬 수 있는 것이었다.
235) | 이 글을 쓰는 데 참고하였던 주요 연구성과들은 다음과 같다. 田保橋潔,≪近代日鮮關係の硏究≫上·下(朝鮮總督府 中樞院, 1940). 李瑄根,≪韓國史≫最近世篇(震檀學會, 乙酉文化社, 1961). 彭澤周,≪明治初期日韓淸關係の硏究≫(塙書房, 1969). Martina Deuchler,≪Confucian Gentlemen and Barbarian Envoys≫(Un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77). 崔永禧,<江華島條約의 締結과 그 影響>(≪한국사≫16, 국사편찬위원회, 1981). 李光麟,≪韓國史講座≫Ⅴ 近代篇(一潮閣, 1981). 金基赫,<江華島條約의 歷史的 背景과 國際的 環境>(≪國史館論叢≫25, 國史編纂委員會, 1991). 金敬泰,≪근대한국의 민족운동과 그 사상≫(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1994). 原田環,≪朝鮮の開國と近代化≫(溪水社, 199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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