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Ⅴ. 갑신정변1. 갑신정변의 배경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1) 개화파의 형성
          • 2) 개화파의 분화
          • 3) 개화파의 활동
            • (1) 통리기무아문의 설치(1880)
            • (2)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 (3) 영선사(병기학습 유학생사절단)파견(1881)
            • (4) 신식 육군(별기군)의 창설(1881)
            • (5) 기무처의 설치(1882)
            • (6) 감생청의 설치(1882)
            • (7) 대외적 균세정책의 실시(1882)
            • (8) 해관의 설치(1882∼1883)
            • (9) 근대학교의 설립(1883)
            • (10) 근대신문의 발간(1883)
            • (11) 근대적 산업시설의 대두와 고취
        • 2. 개화사상의 발전
          • 1) 동도서기론의 대두
          • 2)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 3)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1) 고종의 개화의지
          • 2)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추진세력의 분화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1) 파견계획의 수립
            • (2) 고종의 밀명
            • (3) 어떤 인물들인가
            • (4) 일본시찰 활동
            • (5) 일본견문 보고서
            • (6) 일본을 보는 두 개의 눈-엇갈리는 진단과 평가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1) 사행의 교섭
            • (2) 사행준비와 출발
            • (3) 학습상황
            • (4) 유학생의 철수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1) 조미조약의 체결
            • (2)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 및 일정
            • (3) 조선보빙사 파견의 성과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1) 정부기구의 개편
            • (2) 군사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2) 상업의 보호와 수세정책
            • (3) 전환국의 설립과 신식 화폐주조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1) 박문국의 설치와≪한성순보≫·≪한성주보≫의 간행
            • (2) 서구식 근대교육의 수용
            • (3) 근대적 우정·전신·전기시설
            • (4) 근대 의료시설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1) 위정척사사상의 정립
            • (2) 위정척사사상의 심화와 확산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1) 병자년의 위정척사운동
          • 2)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과 척사·개화논쟁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위정척사운동의 영향
          • 2) 위정척사운동의 의미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1) 서울의 사회경제 구조와 하층민
            • (2) 하급 군병의 성격과 군제개편
            • (3) 하층민의 저항운동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1) 운동의 발생과 확산
            • (2) 정치적 차원에서의 운동의 실현
            • (3) 외세의 개입과 운동의 좌절
          • 3) 임오군란의 영향
            • (1) 일본의 국내 사정과 대조선정책의 변화
            • (2) 청의 대조선정책의 변화와 영향력 확대
            • (3) 국내 상황의 변화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1) 참가층의 구성과 동원조직
            • (2) 공격 목표와 요구의 한계
            • (3) 정부 및 지배층의 대응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선정부의 대청통상정책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청통상협의
            • (2)<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1) 구미열강과의 외교
          • 2) 차관교섭
          •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1) 정변의 핵심세력
          • 2) 정변의 행동대원
        • 3. 갑신정변의 전개
          •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 2) 갑신정변의 준비
            •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 (2) 정변 단행의 결정
            •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 (5) 국왕의 밀칙 획득
            • (6) 행동계획의 최종 정리
          • 3) 개화정권의 수립
            • (1) 1884년 10월 17일 밤의 거사
            • (2) 신정부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4) 청국 및 일본의 개입과 정변의 실패
          • 5) 갑신정변 실패의 요인
        • 4.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 1) 갑신정변의 영향
            • (1) 수구파정권의 재수립
            •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 (3) 조선·일본의 교섭과<한성조약>의 체결
            • (4) 청국·일본의 교섭과<천진조약>의 체결
          • 2)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2) 차관교섭

임오군란 직후 ‘國無一月之儲’725)라는 金弘集의 탄식에서 보듯이 1880년대 조선의 재정은 만성적인 재정난에 허덕이고 있었다. 그러나 개항 이후 국가의 재정지출은 날로 늘어났으나 수입을 증대시킬 만한 재원이 별로 없어 정부에서는 그 미봉책으로 화폐를 찍어 내는 것을 일삼고 있었다.726) 개화당 요인들은 이러한 국가의 재정난을 타개하기 위해 외국에서 차관을 얻어 보려고 하였다.727) 물론 여기에는 그들의 활동에 필요한 자금의 확보와도 관련이 있었다. 개화당 요인들이 차관의 도입을 주장하자 고종도 이에 동조하였다.

개화당 인사들은 일본에서 쉽게 차관을 얻어 올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임오군란 직전 1882년(고종 19) 3월 김옥균이 첫 번째 일본시찰 때부터 차관교섭이 있었으나728) 일본차관이 처음 도입되는 것은 임오군란 직후 김옥균이 두 번째 파견되었을 때의 일이었다. 임오군란 뒤 1882년 10월 박영효를 정사로 하는 수신사 일행이 일본에 파견되었을 때 김옥균도 수행하여 이 때 일본정부의 주선으로 일본의 국책외환은행인 橫濱正金銀行으로부터 17만 원의 차관을 들여올 수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차관의 조건이었다. 17만 원에 대한 이자는 년 8分이고, 그 상환조건은 2년 거치 후 10년 동안에 매년 원금 1만 7천 원씩 상환키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금과 이자의 상환이 약정대로 실행되지 못하고 지연되는 경우에는 부산해관의 수입금과 함경도 端川金鑛에서 공동으로 채굴하여 거두어들인 금으로 상환케 한다는 것이다. 이 경우 정금은행에서 직원을 파견하여 조선관리와 공동의 관리하에 이루어진다는 조건도 붙여 놓았다.729) 이것은 조선해관의 자주권과 금광채굴권을 침탈할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해 놓은 매우 불리한 조건이었다. 이자만 보더라도 갑신정변 뒤 청국정부와 체결한 전신공채차관이 무이자였고 淸商 同順泰로부터의 차관이 단기간임에도 불구하고 월 6리였다는 사실과 비교해 보더라도 알 수 있다.

김옥균 등은 그 조건이 불리함을 알고 있었으나 사절 일행의 여비도 궁색한 형편인데다가 앞으로 여러 가지 활동을 벌이려면 자금이 필요하였으므로 여유를 갖고 교섭을 벌리지 못하였을 것이다. 한편 일본측에서는 이러한 김옥균 등의 사정을 이용하여 불리한 조건을 내세웠을 것이다. 더욱이 차관 17만 원 중 제물포조약에서 약정한 배상금의 제1회 분할금조로 5만 원을 공제하였으므로 넘겨받은 실제 금액은 12만 원이었다. 그리하여 17만원차관은 수신사절의 경비,≪漢城旬報≫의 간행비, 당시 50여 명에 달했던 일본유학생의 교육비 등에 충당되었다.730) 따라서 이 차관은 개화정책 수행을 위한 기초적인 사업에 사용되었다고도 할 수 있다.

수신사 박영효 등은 3개월간 동경에 체류한 뒤 귀국하였다. 그러나 김옥균과 서광범은 계속 남아 일본정부 요인들과 접촉하면서 또 다른 차관의 도입을 모색하고 있었다. 그 결과 조선정부의 국채위임장만 있으면 차관을 더 얻을 수 있을 것이라는 말을 믿고 다음해 3월에 일단 귀국하였다.

당시의 국내재정은 여전히 궁핍을 면치 못하고 있었으므로 집권층인 민씨측에서는 協辦交涉通商事務 묄렌도르프의 조언에 따라 當五錢 발행을 서두르고 있었다. 일본에서 돌아온 김옥균은 당오전과 같은 惡貨의 주조는 국가의 재정난을 타개할 수 없을 뿐 아니라 물가고로 국민생활에 큰 해독을 주게 된다고 반대하면서 차관도입이 유리하다고 주장하였다. 그렇다고 해서 개화당 요인들이 내세우는 차관도입 또한 문제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만약에 또 17만원차관의 경우처럼 불리한 조건으로 차관이 도입된다면 도리어 외세를 끌어들이는 결과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국왕은 양측의 의견을 모두 받아들여 한편으로는 민씨측의 요구대로 3월 16일 당오전의 주조령을 내리고, 다른 한편으로는 김옥균에게 300만 원 국채모집의 위임장을 부여하여 일본에 다시 파견하였다.

김옥균이 국왕의 위임장을 가지고 다시 일본으로 건너간 것은 1883년 6월 이었다. 그로서는 세 번째의 일본방문이었다. 그의 사명인 300만 원의 국채모집은 꼭 성공해야만 하였다. 그만한 돈을 끌어들인다면 개화당 요인들은 국왕으로부터 확고한 신임을 얻어 정부내에서 당당한 위치를 차지할 수 있게 될 것이고, 동시에 그들이 계획해 온 개화정책을 추진하는 데 필요한 자금도 마련되기 때문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에 가기 전인 1883년 4월 18일 東南諸島開拓使兼管捕鯨事로 임명되었다.731) 당시 울릉도·제주도 지역에는 일인들이 난입하여 벌목과 漁採를 일삼고 있어서 일본측에 여러 차례 항의한 바 있었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17세기 말 이래 網取法과 擲鉾法 등의 기술로 고래잡이가 성하였는데 개항 이후에는 고래가 많이 출몰하는 조선해안으로의 진출을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실정을 파악한 김옥균은 외국인의 투자로 그것을 개발해 볼 생각도 했지만, 그것을 담보로 하면 거액의 외채도 모집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던 것 같다. 그래서 그는 일본측이 차관을 제공할 때 필시 담보를 요구할 것으로 내다보았고 이 때를 대비해서 담보로 울릉도의 삼림채벌권이나 포경권을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국왕에게 이 실정을 상주하였고 한편 국왕은 김옥균에게 차관을 교섭할 수 있는 실권을 보강해 주기 위해서 동남제도개척사 겸 관포경사라는 벼슬을 내렸던 것이다.

김옥균은 白春培와 卓挺埴을 수원으로 李允杲를 從人으로 그리고 일인 가이군지(甲斐軍治)를 고용하여 일본에 건너갔다. 그러나 곧 일본에서 300만 원의 차관을 도입한다는 것이 용이치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우선 김옥균의 주장처럼 그 동안에 일본정부의 태도가 전적으로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임오군란 이후 부임한 일본공사 다케조에는 부임 초 김옥균의 정치적 역량을 의심하고 조선정계에서 개화당의 지위가 무력하다고 보아 이들을 지지해서는 안 된다고 개화파에 대해 부정적으로 이노우에(井上馨) 외무경에게 보고함으로써 차관교섭을 방해하여 결국 차관도입은 벽에 부딪치고 말았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원인으로서는 당시의 일본정부나 민간재계에서 300만 원이란 거액을 투자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그 액수는 당시 일본의 1년간 조세수입의 22분의 1에 해당되었고, 또 일본정부는 자기 나라의 공업화를 위하여 인플레이션정책을 감행하고 있었으며, 한편 민간의 기업체들은 정부의 절대적인 후원 아래에서 운영되고 있는 상태였다. 따라서 정부나 민간에게는 그만한 거액을 투자할 수 있을 만한 여력이 없는 실정이었다.

김옥균은 일본으로부터의 300만 원 차관도입을 기대할 수 없겠다고 판단되자 모오스(James R. Morse)를 통해 미국으로부터의 차관도입을 모색하였다. 모오스가 사장으로 있는 미국무역상사(American Trading Company)는 한때 동양에서 미국인이 경영하는 회사 중 가장 규모가 컸었다. 또한 모오스는 한국으로의 진출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며 김옥균과도 여러 차례 접촉을 가진 바 있었다.

모오스는 김옥균의 제의를 받아들여 차관교섭을 위해 직접 뉴욕으로 갔다. 김옥균은 푸트공사와 주일미국공사 빙햄(John A. Bingham)의 측면 지원도 얻어내어 희망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것도 불가능하였다. 그리하여 김옥균은 직접 미국으로 가서 교섭을 벌여 볼 생각까지도 하였으나 푸트공사의 충고를 받아들여 미국행을 단념하였다. 그 뒤 일본 第一銀行의 시부자와 에이치(澁澤榮一)와 교섭하여 10만 원이나 20만 원 정도의 금액이라도 대부를 받아 보려고 하였으나 이것마저도 역시 실패하였다.

김옥균이 세 번째 도일하여 10개월간 일본에 체류하면서 차관을 얻어 보려던 노력은 전부 수포로 돌아가 빈손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이 되었다. 이 때 그는 귀국하기에 앞서 자신의 심정을 후쿠자와 유키치에서 다음과 같이 토로하였다는 것이다.

나는 자금이 없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지금 빈손으로 귀국하면 집권 사대당은 나를 비판하며 궁지에 몰아넣을 것임을 알고 있다. 어쨌든 우리 개화당은 심한 타격을 받을 것이며 우리의 개혁안도 없어질 것이며 조선은 청국의 영구적 속국이 될 수밖에 별 도리가 없다. 우리 당과 사대당은 공존할 수 없기 때문에 최후의 선택을 택할 지도 모르겠다(石河幹明,≪福澤諭吉傳≫3, 岩波書店, 1943, 302쪽).

김옥균은 1883년 6월에 서울을 떠나 만 10개월간 동경에 머무르고, 다음해 1884년 5월 2일 제물포에 도착하여 다음날 입경하였다. 예기했던 차관도입이 실패함으로써 정치자금을 확보하지 못하여 개화당의 개화정책 추진과 그들의 정치적 활동에는 많은 어려움이 예상되었다. 뿐만 아니라 집권파와의 대립 속에서 개화파의 입지를 더욱 어렵게 만들고 위기의식은 커져만 갔다.

725)≪淸季中日韓關係史料≫3, 光緖 10년 9월 8일(臺北;中央硏究院 近代史硏究所, 1972), 910쪽.
726) 당오전 주조에 관해 元裕漢,<當五錢攷>(≪歷史學報≫35·36, 1967) 참조.
727) 김옥균의 대일차관교섭에 대해서는 다음 글들이 참조된다.

李光麟, 앞의 책(1973), 57∼65쪽.

趙璣濬,≪韓國資本主義成立史論≫(고려대 출판부, 1973), 142쪽
728)≪朝鮮新報≫, 1882년 3월 25일.
729) 日本外務省,≪日本外交文書≫15, No. 157, 明治 15년 12월 18일, 287쪽.
730)≪漢城旬報≫, 개국 492년 11월 21일,<駐日生徒>.

李光麟,<開化初期 韓國人의 日本留學>(≪韓國開化史의 諸問題≫, 一潮閣, 1986), 54쪽 참조.
731) 김옥균이 동남제도개척사겸관포경사로 활동한 데에 대해서는 李光麟,<金玉均의「東南諸島開拓使 兼 管捕鯨事」任命에 대하여>(위의 책) 참조.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