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Ⅴ. 갑신정변1. 갑신정변의 배경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1.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1) 개화파의 형성
          • 2) 개화파의 분화
          • 3) 개화파의 활동
            • (1) 통리기무아문의 설치(1880)
            • (2) 일본국정시찰단(신사유람단)의 파견(1881)
            • (3) 영선사(병기학습 유학생사절단)파견(1881)
            • (4) 신식 육군(별기군)의 창설(1881)
            • (5) 기무처의 설치(1882)
            • (6) 감생청의 설치(1882)
            • (7) 대외적 균세정책의 실시(1882)
            • (8) 해관의 설치(1882∼1883)
            • (9) 근대학교의 설립(1883)
            • (10) 근대신문의 발간(1883)
            • (11) 근대적 산업시설의 대두와 고취
        • 2. 개화사상의 발전
          • 1) 동도서기론의 대두
          • 2) 온건개화파의 개화사상
          • 3) 급진개화파의 개화사상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1. 개화정책의 추진세력
          • 1) 고종의 개화의지
          • 2) 개화파의 형성과 활동
          • 3) 개화추진세력의 분화
        • 2. 신문명의 도입
          • 1) 일본시찰단의 파견
            • (1) 파견계획의 수립
            • (2) 고종의 밀명
            • (3) 어떤 인물들인가
            • (4) 일본시찰 활동
            • (5) 일본견문 보고서
            • (6) 일본을 보는 두 개의 눈-엇갈리는 진단과 평가
          • 2) 청국유학생(영선사)의 파견
            • (1) 사행의 교섭
            • (2) 사행준비와 출발
            • (3) 학습상황
            • (4) 유학생의 철수
          • 3) 미국시찰단의 파견
            • (1) 조미조약의 체결
            • (2) 조선보빙사의 미국파견 및 일정
            • (3) 조선보빙사 파견의 성과
        • 3. 제도의 개혁
          • 1) 정치·군사부문
            • (1) 정부기구의 개편
            • (2) 군사제도의 개혁
          • 2) 경제부문
            • (1) 농업기술의 도입과 상업적 농업의 진흥
            • (2) 상업의 보호와 수세정책
            • (3) 전환국의 설립과 신식 화폐주조
          • 3) 문화·교육·사회부문
            • (1) 박문국의 설치와≪한성순보≫·≪한성주보≫의 간행
            • (2) 서구식 근대교육의 수용
            • (3) 근대적 우정·전신·전기시설
            • (4) 근대 의료시설
      • Ⅲ. 위정척사운동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1) 위정척사사상의 대두
          • 2) 위정척사사상의 보급
            • (1) 위정척사사상의 정립
            • (2) 위정척사사상의 심화와 확산
        • 2. 위정척사운동의 전개
          • 1) 병자년의 위정척사운동
          • 2) 신사년의 위정척사운동과 척사·개화논쟁
        • 3. 위정척사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위정척사운동의 영향
          • 2) 위정척사운동의 의미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1. 임오군란
          • 1) 임오군란의 배경
            • (1) 서울의 사회경제 구조와 하층민
            • (2) 하급 군병의 성격과 군제개편
            • (3) 하층민의 저항운동
          • 2) 임오군란의 전개과정
            • (1) 운동의 발생과 확산
            • (2) 정치적 차원에서의 운동의 실현
            • (3) 외세의 개입과 운동의 좌절
          • 3) 임오군란의 영향
            • (1) 일본의 국내 사정과 대조선정책의 변화
            • (2) 청의 대조선정책의 변화와 영향력 확대
            • (3) 국내 상황의 변화
          • 4) 임오군란의 구조와 성격
            • (1) 참가층의 구성과 동원조직
            • (2) 공격 목표와 요구의 한계
            • (3) 정부 및 지배층의 대응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선정부의 대청통상정책
          • 2) 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 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1) 조·청통상협의
            • (2)<조선중국상민수륙무역장정>체결과 조·청관계의 변질
      • Ⅴ. 갑신정변
        • 1. 갑신정변의 배경
          • 1) 구미열강과의 외교
          • 2) 차관교섭
          •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 2. 갑신정변의 주도세력
          • 1) 정변의 핵심세력
          • 2) 정변의 행동대원
        • 3. 갑신정변의 전개
          • 1) 정변 주도세력의 목표
          • 2) 갑신정변의 준비
            • (1) 개화당의 정변 무력문제
            • (2) 정변 단행의 결정
            • (3) 북청군대의 상경과 일부 유경
            • (4) 일본공사관 호위용 일본군의 차병
            • (5) 국왕의 밀칙 획득
            • (6) 행동계획의 최종 정리
          • 3) 개화정권의 수립
            • (1) 1884년 10월 17일 밤의 거사
            • (2) 신정부의 수립
            • (3) 개화파 신정부의 혁신정강 공포
          • 4) 청국 및 일본의 개입과 정변의 실패
          • 5) 갑신정변 실패의 요인
        • 4. 갑신정변의 영향과 의의
          • 1) 갑신정변의 영향
            • (1) 수구파정권의 재수립
            • (2) 개화당의 몰락과 숙청
            • (3) 조선·일본의 교섭과<한성조약>의 체결
            • (4) 청국·일본의 교섭과<천진조약>의 체결
          • 2) 갑신정변의 역사적 의의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3) 집권파와의 대립과 위기의식

강화도조약체결 이후 조선에서는 일본의 세력침투가 켜져 독점적 지위가 구축되어 가는 반면 청국은 전통적인 종주국으로서의 권위가 실추되어 갔다. 임오군란은 청국으로서는 실추된 종주국의 지위를 회복하는 절호의 기회였다. 군란이 일어나자 청국은 즉시 군대를 파견하여 세력을 침투시켰다. 청국의 계획된 무력개입정책과 그들이 대원군을 유인하여 강제 납치한 사건으로 임오군란이 일단 수습되었다. 이에 따라 고종은 그 해 9월 趙寧夏·金弘集·魚允中 등 陳奏使 일행을 청국에, 濟物浦條約에 따라 다음달에 박영효·김옥균·서광범·민영익 등 개화당으로 구성된 修信使 일행을 일본에 각각 파견하였다. 이들 양파는 혼미한 정국을 안정시킨다는 생각을 가졌지만 이를 수습하려는 태도와 방법만은 처음부터 달랐기 때문에 양파간의 대립과 충돌은 불가피한 것이었다.732)

조영하 등 진주사 일행은 대원군의 납치와 관련하여 청나라 조정에 그의 석방을 청원하는 본래의 임무를 관철하기보다 오히려 馬建忠이 제의한 차관도입문제와 선후6조를 협의하는 등, 양국간의 기존 관계를 바탕으로 더욱 친청책을 강화하는 정책적 배려를 하였기 때문에 자연히 청국의 대조선간섭정책을 증가시키는 결과를 자초한데 반하여, 박영효·김옥균·서광범 등 개화파는 도일할 때 처음으로 국기를 사용하여 조선이 자주독립국임을 과시하고 청군의 조선주둔이 국체와 독립국가의 면모를 손상시키는 것이라고 단정하면서 증가된 청의 세력을 감소시키기 위하여 일본의 헙력이나 구미세력을 이용하여 자주권을 회복하여 중단된 개화정책을 강력히 추진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사대파 조영하 등은 9월 중순부터 그들 나름대로 천진에서 이홍장과의 몇 차례 회담에 의한 교섭 끝에 외국인 묄렌도르프을 고문으로 채용하는 문제와 조선의 금광·세관 및 홍삼수입을 담보로 연리 8리에 12년 기한내 상환을 조건으로 하는 50만 량 문은차관이란 재정적 지원을 획득할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 때 진주사 일행인 조영하·김홍집·어윤중과 周馥·마건충 등 청국대표 사이에 조선이 청국의 속방이며, 조선내에서 청국이 종주국으로서의 특권을 명문화한<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함으로써 조선내에서 열국을 제치고 청국이 우위를 차지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이로 인하여 정치·군사·경제 등 조선 내정에 대한 청국의 적극적인 간섭이 있게 되었다. 즉 군사는 吳長慶 휘하의 袁世凱 등이, 외교·재정상의 사항은 馬建常·묄렌도르프를 통하여 조선의 전권을 사실상 장악하게 되었다.

이러한 집권파 관료들의 외교적 교섭행위는 분명히 청국이 조선의 정치적·경제적 자주권을 침해하고 나아가서는 그들의 속방정책을 제도화할 수 있는 결과를 초래하였기 때문에 개화당의 도전은 말할 것도 없고 조선을 주권국가로 인정한 일본·미국 양국의 반발을 사지 않을 수 없었다.

1880년 전반기에는 閔台鎬를 위시한 민씨들, 그리고 이들에 밀착되어 있던 尹泰駿·韓圭稷·李祖淵 등이 정계를 좌우하고 있었다. 이들은 청국과의 전통적인 관계를 유지하려는 데 급급하였고, 그리하여 임오군란 뒤 청군을 끌어들이기까지 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청국과의 관계를 끊고 나라의 자주독립을 이룩해보려는 개화당의 이상과는 상충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개화당 요인들은 불만을 토로하고 집권파의 생각과 행동을 비판하였다. 차츰 상호간에 불신과 대립이 날카로워지게 되었다. 이러한 불신과 대립은 1881년경부터 나타났지만 1883·84년에는 도저히 화합할 수 없는 지경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1883년 4월 한성판윤 박영효가 광주유수로 좌천된 것, 그리고 6개월 만에 광주유수직에서도 물러나야만 되었던 일, 또 화폐주조문제를 둘러싼 의견충돌 등의 예는 당시의 실정을 말해준다

개화당 인사들은 집권파 요인들에 대해 노골적으로 비난하고 있는 다음과 같은 내용들을≪윤치호일기≫에서 찾아보는 데는 별로 어려움이 없다.

이날 밤 入侍하여 들으니 李左佞·尹右狐·左贊姦 및 金輔國이 淸人 張□□와 회동하여 30만원을 借金한다고 한다(≪尹致昊日記≫1, 1883년 11월 2일).

李祖淵을 아첨꾼, 尹泰駿을 여우, 좌찬성 민태호는 간신이라 부르면서 이들이 고종의 주위에 있기 때문에 국가는 위기에 빠지고 있다고 비판하면서 통탄을 하였다. 민영목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이 국사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단지 사리사욕을 채우는 데에만 관심이 있는 음흉하고 간사한 늙은 간신이라고 비난하는 내용을 볼 수 있다.

민씨의 마음에는 음흉하고 간사하고 편벽된 것으로 가득 차서 일찍이 나라의 이해에는 관심이 없음을 가히 알겠다(≪尹致昊日記≫1, 1884년 1월 1일).

老奸하는 바는 남이 예측하기 어렵다. 도시 利計가 배에 가득차서 국사에는 마음이 없기 때문이다(≪尹致昊日記≫1, 1884년 5월 12일).

집권파와 개화파간의 불신과 대립은 특히 민영익이 報聘使의 정사로 미국과 유럽을 遊歷하고 귀국한 뒤로 더욱 격화되었다. 민비의 조카로 1877년 과거에 급제한 뒤 주요 관직을 두루 역임하고 왕과 왕비가 그의 말이라면 듣지 않음이 없었다. 이에 따라 그의 집에는 항상 벼슬하려는 손님들로 들끓었다733)고 할 만큼 당대의 세도가였던 그를 김옥균 등은 개화당에 끌어들이는 데 성공하였다. 그 후 그는 개화에 열심이었으므로 개화당으로서는 이러한 인물을 포섭하였다는 것은 큰 수확이었다.

그러나 민영익은 미국을 다녀온 뒤 개화당에서 이탈하고 집권파에 가담하여 개화당과 상반되는 정치적 견해를 갖고 대립하게 되었다. 그가 돌아온 것은 1884년 5월 말이었다. 이러한 사정에 대하여 미국공사관 무관 포크는 갑신정변보고서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여 놓았다.

1884년 9월경에 민영익은 완전히 개화당과 손을 끊었다. 그의 동료는 청국인과 강력한 친청당의 멤버들뿐이었다. 그는 낮 동안에는 서구인들을 접견하지 않았으며 그리고 때때로 그들을 면전에서 경멸하는 오만함을 보이기도 하였다(George C. Foulk, 앞의 글, 996쪽).

즉 민영익이 개화당과 손을 끊고 완전히 집권파로 넘어간 것은 9월경이었다는 것이다. 이렇게 된 데에는 그가 일본의 문명진보의 수준을 아직 낮다고 보아 그 힘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이기도 하였지만734) 민씨 집안의 한 사람으로서 그 집안의 이해와 상반되는 행동을 할 수 없었던 점도 있었을 것이다.735) 이후로 민영익은 개화당에 있을 때와는 달리 조선의 독립과 개화에 대해 회의를 품고 개화당에 대해 적대되는 행동을 취하게 되었다.

1884년 8월 親軍營制의 실시와 더불어 한규직이 전영사, 이조연이 좌영사, 윤태준이 후영사가 되는 동시에 민영익은 우영사로 임명되었다. 곧 이어 그는 協辦軍國事務도 겸임하게 되었다. 민영익은 군대훈련을 위해 청국군 장교를 부르는 조치를 취하는 등 청국의 힘을 빌리려는 태도를 노골적으로 나타냈다.736)

이미 고종은 1883년 10월 16일 푸트 미국공사를 통해서 군사교관을 미국에 요청해 놓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까지 이 건에 대하여 미국으로부터 아무런 회답이 없었다. 이들이 오게 되면 우선 徐載弼 등 사관생도들을 그들 밑에서 좀더 훈련을 받도록 하고자 하였으며 이를 위해 요코하마에 있는 미국상사를 통해 4,000정의 미국제 소총도 구입해 준비해 놓았던 것이다. 영토에 관심이 없는 공평무사한 나라 미국에서 군사교관을 초빙하여 일본에서 귀국한 사관생도들을 교육시키고 이들로 하여금 군대를 교련시켜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것을 개화당에서는 조선이 청의 간섭과 영향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여기고 있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민영익이 미국군사교관 대신에 청국교관을 고빙한다는 것은 개화당에게 큰 타격을 가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포크무관은 다음과 같은 보고를 본국으로 보냈다.

얼마 있지 않아 민영익은 조선군대 훈련을 위해 청국으로부터 5명의 교관을 부르게 되었다 이 조치는 개화당 요인들을 크게 자극하였고 한편 14명의 사관생도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것이니, 그 까닭은 청국군 교관을 고빙하게 됨으로써 자리를 유지할 기회를 상실하였기 때문이었다. 한(규직)장군의 군영에 채용된 3명을 제외하고 사관생도들은 군에서 떨려나 개화당 인사들에 의하여 반자선책으로 홍영식이 책임자로 있는 우정국에 옮겨져 일을 하게 되었다(George C. Foulk, 앞의 글).

즉 민영익이 청국교관을 초빙함으로써 김옥균의 알선으로 일본의 戶山學校에서 수학하고 1884년 4월 귀국한 서재필 등 14명의 사관생도들 대부분이 내쫓기게 되었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1884년 8월 尹雄烈이 상주한 사관학교 설립계획마저 무산되고 말았다. 이처럼 집권파와 이들과 결탁한 서울주둔 청국군의 지휘관 袁世凱 등 청의 손아귀에 군사권을 완전히 넘겨주었으므로 개화당으로서는 심각한 위기의식을 가지지 않을 수 없었다.

민영익에 이어서 또 1884년 10월에는 윤치호가 “우리 개화당 幹事重位의 한 사람이다”737)라고 할 정도로 개화당의 주요인사였던 내시 柳在賢이 개화당에서 이탈하여 집권파에 가담하였다. 이것 또한 개화당으로서는 큰 타격이었다.738) 그는 내시였기 때문에 국왕을 가까이 모시면서 개화당에 유리하게 영향을 미칠 수 있었고, 또 국왕을 둘러싸고 비밀리에 진행되는 일들을 알아낼 수도 있어 개화당을 위하여 상당히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자리에 있던 사람이었다. 이처럼 국왕의 측근에서 커다란 역할을 할 수 있던 인물이 반대파에 가담하였다는 것은 개화당으로서는 크나큰 손실이었다. 또 유재현은 개화당의 계획을 속속들이 알고 있었을 터이므로 개화당의 불안은 가증되었다. 그러므로 개화당은 행동대로 하여금 정변을 일으키자마자 유재현을 景祐宮에서 무참히 살해해 버릴 만큼 유재현의 배반은 개화당에게 충격적이었던 것 같다.

이처럼 국내의 정치상황은 갈수록 개화당에게 불리해져 갔다. 개화당들이 모여서 한탄하기를 “지금의 국사를 돌아보니 벼랑 끝에 걸려있다. 奸臣이 권력을 농간하고 財用을 탕진하면서 개화를 한다고 하지만 개화의 실효가 없다…실로 개화당은 몇 사람 안 된다. 모두가 頑固黨이니 개화의 실효가 언제나 있을지 알지 못하겠다”739)고 할 정도로 집권파들이 정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정권을 주도하는 반면에 개화당의 세력은 약해지고 이들에 의한 개화정책의 추진은 갈수록 힘들어져 갔던 것이다. 개화당은 이미 언제 집권파에 의해서 제거당할지 모른다740)는 위기감과 아울러 조선의 장래도 더없이 암담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개화당이 자신들의 처지뿐만 아니라 나라의 장래도 이처럼 암담하게 느껴졌던 상황을 뚫고 나갈 수 있는 돌파구를 찾는 방법에 대하여 홍영식은 미국공사 푸트에게 다음과 같이 비유적으로 말하였다는 것이다.

등잔불이 있어서 불이 심히 밝은데 밖에 있는 물건이 가리고 있어서 안에 있는 빛이 밖으로 비출 수 없어 밖의 물건은 밝은 빛을 받지 못해서 사람이 그 가린 것을 제거하고 그 빛을 방출하려고 시도하나, 그 가리고 있는 물건이 너무 뜨거워 순순히 제거할 수 없어서 부득이 그 가린 것을 깨뜨려 제거한 즉 사방으로 그 밝음이 전해지는 것을 곁에서 본다면 이것이 유쾌한 일이겠는가. 도리어 망령된 일이 되겠는가(≪尹致昊日記≫1, 1884년 11월 19일).

이 말에서 알 수 있듯이 개화당은 비상수단을 동원해서라도 고종 주위의 집권파를 제거하지 않는 한 이 위기를 돌파해 나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결국 갑신정변을 일으켰던 것이다.

<尹炳喜>

732) 개화당의 위기의식에 대해서는 李光麟, 앞의 책(1973), 140∼146쪽 참조.
733) 黃 玹,≪梅泉野錄≫상(國史編纂委員會, 1955), 43쪽.
734)≪東京日日新聞≫, 明治 18년(1885) 1월 21일(≪新聞集成明治編年史≫6, 財政經濟學會, 1926, 29쪽).
735) 李光麟,<甲申政變에 대한 一考察>(앞의 책, 1973), 142쪽.
736)≪尹致昊日記≫1, 1884년 8월 26일.
737)≪尹致昊日記≫1, 1884년 9월 17일.
738) 李光麟, 앞의 책(1973), 144∼145쪽.
739)≪推案及鞫案≫324책, 大逆不道罪人喜貞等鞫案(亞細亞文化社版 30책, 1978, 585쪽).
740)≪尹致昊日記≫1, 1884년 6월 18일.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