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군사제도의 개혁
조선정부는 1881년 이후 외국인 교관을 고빙하고 근대적 무기 및 훈련방법을 도입함으로써 군사제도의 근대화를 추진해 왔다. 그 결과 1894년 전까지 조선군은 각축하는 열강의 영향하에 非체계적으로 ‘근대화’되고 있었다. 군사들은 일본인·청국인, 그리고 미국인 교관에 의해 훈련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군대조직 역시 청국식의 壯衛營·統衛營·摠禦營, 조선의 전통적인 兵曹·經理廳·扈衛廳, 그리고 미국식 鍊武公院 등으로 편제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조직·훈련된 조선의 관군은 1894년 봄에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진압하지 못할 정도로 취약하였다.
따라서 군국기무처는 국가보위의 당위성은 물론 반일·반개화세력의 도전으로부터 정권을 보호해야 하는 절실한 현실적 필요성 때문에 군사제도의 개혁을 서둘렀다. 이를 위해 우선 親衛軍의 설치를 시도하였다. 즉, 8월 14일에 군국기무처는 “현금 戎政이 확립되지 않아 군심은 가지런하지 않고 자주 기율을 어기는 바 있으므로 급히 이를 변통하여 별설하는 친위군을 제외한 각 영을 통합하여 대장 1원을 두되 우선 勅差하여 신편제에 따라 호령케 할 것”을 결의하였던 것이다. 이어 8월 26일 “친위영을 장차 설치하려고 하는데 하사관의 교육과 양성이 가장 긴요한 바 마땅히 건장한 200인을 뽑아 교사를 延請하여 훈련케 할 것”을 건의하였다.
그러나 이 같은 친위대 설치노력은 군국기무처의 의도대로 추진되지 않았다. 왜냐하면 9월 11일에 군국기무처가 “친위영의 設施는 현재 매우 급한 일이므로 領率將官을 친위영 都總官이라 칭하고 이로 하여금 편제케 할 것”을 의결하였지만 이에 대해 고종은 별도의 지시를 기다리라고 비답함으로써 그 설치를 미루었기 때문이다.423) 이때 군국기무처가 현실적으로 초빙할 수 있었던 군사교관은 일본교관이었는데, 고종은 일본교관 대신 서양인 군사교관의 고빙을 바랬기 때문에 친위대 설치가 뒤로 미루어졌던 것으로 여겨진다.424)
9월 23일 군국기무처는 친위군을 제외한 각 영을 통합하여 통합된 부대에 대장 1원을 두되 우선 勅差하여 신편제에 따라 호령케 하자는 의안을 올렸다가 이 역시 국왕에 의해 각하당하였다. 이에 군국기무처는 더 이상 군제개혁을 추진하지 않고 당면 과제인 동학농민군 진압에 주력하였다. 그리하여 “각 該 영사로 하여금 5일마다 군무아문에서 군무대신과 회동, 각 영의 應行 사건을 참조하여 무릇 營規·軍紀·糧餉·編制 등에 관한 것을 협의 歸一토록 할 것”과 “근래 지방병제가 갈수록 解頹하여져서 緩急한 때에 하나도 믿을 만한 것이 없으므로 군무아문 및 탁지아문에서 위원을 특파, 각도의 鎭堡 및 山城을 순시하여 錢穀의 應入·應下와 군졸 額數를 일일히 成冊 修報토록 할 것”을 의결함으로써 동학농민군의 재기에 대비한 합동참모제를 수립하고 지방병제를 강화시켰던 것이다.
이상과 같이 군국기무처는 친위대를 설치하려고 하였으나 실패한 뒤 별다른 군제개혁 노력을 하지 않았다. 그 근본 이유는 그 당시 조선이 군사력 증강을 도모할 처지에 있지 않았을 뿐 아니라 일본정부 역시 조선의 군사력 강화에 무관심이었기 때문이다. 주지하다시피,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는 일본군과 조선관군에 의해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