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경찰제도의 개혁
군국기무처는 처음에 “비록 평민일지라도 진실로 利國便民할 起見을 가진 자는 군국기무처에 上書하여 회의에 부치게 할 것”이라 하여 일반 국민의 對정부 건의권을 인정하는 획기적인 의안을 채택한 바 있다. 그러나 그후 군국기무처는 한편으로 간언과 상소 등 구체제하에서 국왕 및 집권정부에 대해 비판기능을 행사했던 대간제도를 폐지하고 그 대신 억압적인 근대적 경찰제도를 도입함으로써 臣權(민권)을 크게 위축시켰다.
조선왕조 정치사에서 이채를 발휘했던 대간제도는 갑오경장 중 사간원·사헌부·홍문관 등 言官 3司가 폐지됨으로써 슬그머니 사라졌다. 이 소극적 개혁은 갑오경장 기간에 단행된 정치제도개혁 중 가장 중요한 것의 하나로 손꼽을 수 있다.
다음으로, 군국기무처는 “대소 관원의 상소는 辭職·獻策·言事를 제외한 무릇 劾論 등에 관계되는 것은 의정부로 啓下, 도찰원으로 付하여 該員에게 傳問하여 實狀·實證을 査得한 뒤에 품처할 것”이라 하여 대소 관원이 핵론과 관계된 상소를 했을 경우 의정부의 도찰원이 그 製疏者를 불러 상소내용의 사실 부합 여부를 확인한 다음 국왕에게 稟處토록 의결함으로써 집권정부의 정책을 비판하는 상소를 사실상 봉쇄하였다고 볼 수 있다. 이것은 역시 민권의 위축을 의미했다.
이렇게 국민의 집권정부에 대한 비판을 억압하는 한편 군국기무처는 내무아문 예하에 警務廳이란 강력한 경찰기구를 설치하여, “民의 災害를 막고 靜謐을 馴致”한다는 명목하에 국민의 제반 활동, 특히 정치활동을 규제하고 그들의 반정부활동을 탄압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였다. 예컨대,<行政警察章程>에 의하면, 신설된 행정경찰은 ①民이 방해를 입는 곳을 防護하는 사무, ②건강 보호, ③放蕩·淫逸을 제지하는 일, ④국법을 범하고자 하는 자를 은밀한 가운데 探捕하는 일425) 등 통상적인 보호경찰 업무뿐만 아니라 정치사찰 업무도 담당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警務廳官制職掌>에서는 이를 더욱 구체화하여, 경찰관은 다음과 같이 다양한 사무를 襄助하도록 명시하였다.
영업, 場市, 회사, 제조소, 敎堂, 강당, 道場, 演藝, 遊戱所, 徽章, 葬式, 彩會, 도박, 선박, 河岸, 도로, 교량, 철도, 전선, 공원, 車馬, 건축, 전야, 어렵, 人命傷痍, 群集喧譁, 총포 화약, 발화물, 刀劍, 수재, 화재, 표파선, 유실물, 매장물, 전염병 예방, 소독, 검역, 종두, 식물, 의약, 가축, 屠場, 묘지, 기타 위생에 관계되는 사무일체, 罪人搜捕, 증거물을 수집하여 總巡에게 부하는 일, 瘋癩, 棄兒, 迷兒, 결사, 집회, 신문잡지, 도서, 기타 板印 등의 경찰사무(≪韓末近代法令資料集≫1, 40쪽).
이를 자세히 음미해 보건대, 경무청은 국민의 생활안전과 보건을 보살필 뿐 아니라 결사·집회·출판 등을 감시·통제함으로써 정부에 대한 비판이나 정부운동을 탄압하는 기능도 발휘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런데<행정경찰장정> 제4절에 의하면, “경찰지서 소관부내에 違警罪를 범하는 자가 있으면 該서장이나 서리하는 관리가 즉시 처결을 행한다”고 하여 警務官에게는 즉결처분권까지도 부여되어 있었다. 그리고 8월 24일의 의안에 의하면, 경무청은 “무릇 한성부 소관의 일체의 소송을 경무청으로 이부한다”라 하여 경범죄의 처벌과 한성부내의 소송을 담당하는 권한도 갖고 있었다.426)
이와 같이 경무청은 일반 국민의 생활전반에 개입하고 공공질서를 유지한다는 명분 아래 반정부 내지 반개혁운동을 탄압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다. 그런데 사실상 경찰은 즉결처분권을 남용하고 있었는데, 이 점은 어윤중이 사회한 10월 9일의 군국기무처 회의에서 채택된 의안을 통하여 확인된다.
…근일 범죄자로 경무청에 被繫된 자는 혹 法司의 재판을 거치지 않은 채 처단하는 경우가 있어 인명을 중히 하고 형벌을 신중히 하는 길이라 할 수 없으므로 금후 중죄의 결안은 법사의 공판을 거치지 않고서는 생명을 遽害치 못하게 함으로써 啓下 안건의 실효를 거두도록 한다(≪日省錄≫, 고종 31년 9월 11일).
이상으로써 살펴 보건대, 군국기무처는 한편으로 간언과 상소의 통로를 봉쇄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억압적인 경찰제도를 설립함으로써 집권정부로 하여금 국민위에 군림하여 마음대로 개혁을 추진하고 통치와 행정을 펴나갈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