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경찰제도의 개혁
박영효는 1883년에 漢城府에 근대적 경찰제도를 창설한 경험이 있으며, 또 1888년<개화건백서>속에서도 20,000명 규모의 경찰조직을 갖추는 안을 제시한 바 있다. 1895년 그는 내무대신으로서 자신의 구상을 실천에 옮길 수 있는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는 1894년 8월 14일 군국기무처에서 신설한 警務廳을 확장함으로써 대규모의 근대적 경찰력을 확보하려고 노력하였다.
박영효는 1895년초부터 警務副使를 減下하고 경무관과 총순을 增置함으로써 경찰력을 증강시키려 시도하였으나 여의치 않았고, 5월말에 실권을 장악하고 나서야 비로소 그 일을 추진할 수가 있었다. 그는 자기가 장악한 경찰을 準군사적인 기구로 전환시키기 위해 우선 5월 21일에 국왕으로부터 순검을 洋銃으로 무장·훈련시켜도 좋다는 허가를 받아냈다.501)
그리고 이틀 후 그는<警務廳官制>를 공포함으로써 서울에 근무하는 경찰관의 수를 대폭 늘렸다. 이 관제에 의하면, 경무청은 경무사 1인, 경무관 12인 이하, 주사 8인 이하, 감옥서장 1인, 총순 30인 이하, 감옥서기 2인 이하, 간수장 2인 이하 등으로 구성되었다. 또 경무사는 내무대신의 지휘·감독을 받아 한성부내의 경찰·소방 및 감옥의 업무를 총괄토록 되어있었다. 그리고 경무청에는 官房 제1·2과와 총무국을 두고, 궁내와 한성부 5부에 경무서를 설치하였다.502) 이어서 경무청의 관방과 총무국의 사무분장을 규정한<警務廳處務細則>이 제정·발포되었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제정된 중앙의<경무청관제>는 그후 약간의 경찰인원만 증가되었을 뿐 관제상의 커다란 변동없이 1900년<警部官制>로 확대 개편될 때까지 유지되었다.503) 또한 1895년 7월 초 박영효가 ‘不軌陰謀’의 혐의로 일본에 망명할 때까지 그는 적어도 670명의 근대식 소총으로 무장한 경찰관들을 휘하에 통솔함으로써 정권 유지 및 개혁 추진을 위한 기반을 구축하고 있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