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사법제도의 개혁
근대적 사법제도는 무엇보다 행정부로부터 분리된 사법권의 독립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는 데 그 특징이 있었다. 제1차 개혁에서 군국기무처는 緣坐制 등 과거의 악법을 폐지함과 아울러 法務衙門을 신설하여 사법행정의 체계화를 꾀하였지만, 실제로 義禁司는 법무아문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사법부의 완전한 독립은 이뤄지지 않았다. 그리하여 1895년 1월 11일 법무대신 徐光範은 의금사를 法務衙門權設裁判所로 개명하고, 그 동안 법무아문에서 시행하던 모든 재판과 형벌 적용의 사무를 재판소에서 실시하도록 조치하였다.504) 이에 따라 1895년 4월 19일에는 법률 제1호로<裁判所構成法>이 발포되면서 사법행정과 재판이 분리되기에 이르렀다.
<재판소구성법>에 의하면, 재판소는 지방재판소, 개항장재판소, 순회재판소, 고등재판소, 특별법원 등 다섯 가지로 나뉘었으며, 이들 중 지방 및 개항장재판소는 1심제를, 순회 및 고등재판소는 2심제를 채택하였다. 우선 지방재판소는 일체의 민사와 형사사건을 재판하였으며, 한성·인천·부산·원산 등에 설치된 개항장재판소는 조선인뿐 아니라 조선인에 대한 외국인의 민사 및 형사사건도 관할하였다. 그러나 외국인에게 치외법권이 인정되고 있는 상황 속에서 개항장재판소의 외국인 재판은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또한 순회재판소는 매년 3월부터 9월까지 법부대신이 정하는 장소에서 개정하되, 부산과 원산재판소 및 지방재판소의 판결에 불복·상소하는 민사 및 형사사건의 상소를 처리하였다. 이들 세 재판소는 판사·검사·서기·廷吏 등으로 구성되었으며, 단임판사제를 원칙으로 삼되 예외적으로 합의제를 인정하였다. 그리고 지방재판소의 판·검사는 별도로 정한 시험에 합격한 자를, 개항장재판소의 판·검사는<사법관시험규칙>에 의하여 시험에 합격한 자 가운데 법부대신의 추천과 내각총리대신을 거쳐 국왕이 임명하도록 하였다. 순회재판소의 경우 판사는 법부대신의 추천을 거쳐 고등재판소와 한성재판소의 판사, 법부의 칙임관·주임관 및 별도로 정한<사법관시험규칙>에 의하여 판사에 임명된 자 중에서 국왕이 임명하고, 검사는 한성재판소의 판사, 법부 칙임관·주임관 및 별도로 정한<사법관시험규칙>에 의하여 판사에 임명된 자 중에서 법부대신이 임명하였다.
다음으로 고등재판소는 법부에서 임시로 개정하는 국가최고의 법원으로서 한성재판소와 인천재판소에서 내린 판결에 불복하는 상소를 재판하는 재심합의재판소였다. 고등재판소는 법부대신 또는 법부협판이 겸임하는 재판장, 법부 칙·주임관 또는 한성재판소 판사 중에서 국왕이 임명하는 판사 2명, 법부 검사국장 및 검사국소속 검사 중에서 법부대신이 임명하는 검사 2명, 서기 3명, 정리 등으로 구성되었다.
마지막으로, 특별법원은 왕족의 범죄에 관련된 형사사건을 단심의 합의제로 재판하며, 법부대신의 주청에 의하여 국왕의 재가를 받아 임시로 개정하였다. 특별법원의 재판장은 법부대신이 겸임하고, 4명의 판사 가운데 1명은 중추원 의관이, 3명은 고등재판소 판사·한성재판소 판사 또는 법부 칙임관·주임관 중에서 법부대신의 추천에 의해 국왕이 임명하도록 되어 있었다.505)
<재판소구성법>과 동시에 그 후속조치로<法官養成所規程>,<裁判所處務規程通則>,<판사·검사등봉급령>,<검사직제>,<各地方監獄署設置令>,<懲役處斷例>,<民·刑訴訟規程> 등이 잇따라 발포되었다. 이들 가운데 신설된 재판소의 실무를 담당할 법관 양성의 필요성은 이미 1895년 1월 11일 법률학교의 설치를 건의한 법부대신 서광범에 의해 제기된 바 있었다.<법관양성소규정>에 따르면, 법관양성소는 20세 이상으로 입학시험에 합격하거나 현직 관리로 근무하고 있는 자를 생도로 모집하여 법학통론·민법·형법·민사 및 형사소송법 등의 학과를 6개월간 교수한 다음 졸업시험에 합격한 자를 사법관으로 채용하도록 하였다.506) 그리하여 5월 6일부터 4일간 법관양성소는 국문·한문·역사·작문·地誌 등 5과목의 선발시험을 실시하여 학생들을 모집하였던 것이다.507)
이처럼<재판소구성법>의 제정·발포를 비롯한 일련의 조치로 말미암아 재판업무가 재판소로 일원화되었으며, 판사와 검사 등 사법관의 개념과 직제가 최초로 도입되는 등 우리 나라의 사법기관 내지 사법제도는 비로소 근대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사법관시험규칙 등이 마련되지 않은 데다가 법관양성교육을 담당할 인력마저 부족한 상태였기 때문에 1896년 7월 22일에 지방재판소가 설치될 때까지 당분간 관찰사와 참서관이 각각 판사와 검사를 겸임하고, 군수로 하여금 관내 재판사무를 겸임케 하라는 조치가 취해지는 등 실질적인 시행은 지체되고 있었다.5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