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교육제도의 개혁
서구의 근대적 학문과 기술을 수용하여 개혁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근대적 학교를 설립하여 합리주의·실용주의적인 교육을 실시하는 것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 시기에 교육제도의 개혁을 담당한 세력은 박정양·이완용·윤치호·이상재 등 이른바 정동파였다. 그들은 갑오경장 이전에 외교사절 혹은 유학생으로 미국에 체류하면서 근대적 교육을 통한 국민계몽과 인재양성의 필요성을 절감하였던 인물들이었다.512)
그들은 우선 1895년 2월 26일에 교육이 국가보존의 근본이라는 인식 아래 학교교육을 통한 인재 양성으로 왕실안전과 부국강병을 달성할 수 있다는 내용의<敎育立國詔書>를 반포토록 하였다.513)
여기에서 무엇보다도 양반계층의 관리등용이나 신분유지를 위한 수단으로 존재했던 전통적인 교육에서 탈피하여 국민교육의 필요성을 역설하였다는 점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조서에는 국가와 왕실이 동일시되고 있으며, 충군애국이라는 봉건적 도덕관이 짙게 깔려 있는 점으로 미루어 개인의 자유로운 사고와 창조성을 함양하고 능력을 개발해주는 근대적 의미의 교육과는 아직 동떨어져 있는 한계도 엿보인다.514)
<교육입국조서>에서 천명된 교육개혁의 취지를 바탕으로 합리주의·실용주의에 입각한 학교교육제도가 본격적으로 수립되기 시작했다. 1895년 4월 19일 관제개편으로 학무아문이 학부로 개칭된 것을 계기로 종래 유명무실했던 專門學務局과 普通學務局을 學務局으로 통합하였으며, 大學校에 관한 사항을 삭제하는 대신 외국에 유학생을 파견한다는 사항을 추가하고 교과서를 편찬하는 등 일련의 개혁이 추진되었다.515) 이에 따라 학교설립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해 줄 각종 규칙이 발포되었다.
1895년 5월 10일에는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식 학교관제인<漢城師範學校官制>가 발포되었다. 전문 13조로 이루어진 이 관제의 내용을 살펴보면, 이 학교는 교원양성을 설립목적으로 삼되, 2년제 本科 뿐 아니라 6개월 速成科를 두어 근대적 소학교교육을 실시하는 데 필요한 교원의 수요를 신속히 충당하도록 되어 있다. 또한 이 학교에는 부속소학교를 두어 학생들의 교육실습에 편의를 도모하도록 규정하였다.516) 이 관제에 의거하여 5월 24일에 한성사범학교가 개교하였다.
아울러 근대적인 제도와 문물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고 외교활동에 필요한 인재를 배출하기 위해 1895년 6월 2일에<外國語學校官制>가 발포되었다.517) 서울에는 이미 同文學(1883)·育英公院(1886)·日語學校(1891. 5)에 이어 英語學校(1894. 2)가 설립되어 있었으나 열국과의 외교관계가 더욱 중요해짐에 따라 보다 체계적인 외국어교육이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때 이노우에공사는 외국어학교의 교사에 일본인만을 고용할 것을 강요하였지만, 학무국장 李商在는 이를 강력히 거절하고 각국 교사들을 골고루 임용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1895년에는 仁川의 日語學校와 서울의 法語學校를 비롯하여 1896년에 俄語學校, 1897년에 漢語學校, 1898년에 德語學校가 각각 세워지게 되었다.518)
또 이때 갑신정변 이후 중단되었던 유학생의 해외 파견이 재개된 것은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앞에서 살펴본<홍범 14조>가운데 “國中의 聰俊子弟를 널리 파견하여 外國의 學術과 技藝를 傳習한다”는 제11조는 유학생의 파견을 정부의 시정방침으로 정한 것이었다. 이를 위해 먼저 1895년 2월 16일에 미국인 선교사가 경영하는 서울의 培材學堂과 위탁교육을 맺고 200명의 관비 장학생을 이 학당에 입학시켜 영어·지리·수학·과학은 물론 성경도 배우게 할 계획이 수립되었다.519)
그리고<교육입국조서>의 발포를 계기로 1895년 4월 내부대신 박영효는 전국 각도에서 일본에 파견될 유학생을 선발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이에 따라 내각원 및 기타 요인들의 친족·자제 중에서 한문시험과 신체검사를 통해 발탁된 114명이 東京의 慶應義塾에 입학하였다.520)
그후 정부는 유학생 파견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하여 5월에는 26명을 경응의숙에, 6월에는 훈련대 군인 가운데 3명을 일본 사관학교에 입학시켰다. 또한 7월에는 학부대신 이완용이 경응의숙의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와 ‘遊學生委託契約’을 체결함으로써 학부에서 첫해에 300명, 그 다음해부터 매년 일정한 학생을 경응의숙에 입학시키기로 합의하였다.521) 이로 미루어 정부가 국가의 부강과 독립을 달성하는 데 필요한 인재 양성에 상당한 열의를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정부는 재정 빈곤으로 말미암아 유학생들의 학비를 제대로 지급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민비시해사건 이후 오히려 유학생들 일부를 소환하는 조치를 내림으로써 모처럼의 체계적인 유학생파견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512) | 韓哲昊,≪親美開化派 硏究≫(國學資料院, 1998), 82∼89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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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13) | <敎育立國 詔書>는 다음과 같다. “嗚呼라 民을 敎치 아니면 國家를 鞏固케 하기 甚難하니 宇內의 形勢를 環顧하건대 克富하며 克强하야 獨立雄視하는 諸國은 皆 其人民의 知識이 開明하고 知識의 開明홈은 敎育의 善美하므로 以홈인 卽 敎育이 實로 國家保存하는 根本이라.…朕이 敎育하는 綱領을 示하야 虛名을 是祛하고 實用을 是崇하노니 曰 德養은…曰 體養은…曰 智養은…此三者는 敎育하는 綱紀니 朕이 政府를 命하야 學校를 廣設하고 人材를 養成호믄 爾臣民의 學識으로 國家의 中興大功을 贊成하기 爲하미라. 爾臣民은 忠君愛國하는 心性으로 爾德 爾體 爾智를 養하라. 王室의 安全홈도 爾臣民의 敎育에 在하고 國家의 富强홈도 爾臣民의 敎育에 在하니 爾臣民의 敎育이 善美한 境에 抵치 못하면 朕이 엇지 갈아대 朕의 治가 成하다 하며 朕의 政府가 엇지 敢히 갈아대 그 責을 盡하다 하리오”(≪韓末近代法令資料集≫1, 180∼181쪽). |
514) | 이러한 한계성은 나중에 제정되는 학교관제에서도 여전히 불식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이점에 관해서는 尹健次,≪朝鮮近代敎育の思想と運動≫(東京:東京大 出版會, 1982), 105∼106쪽 참조. |
515) | ≪韓末近代法令資料集≫1, 211∼213쪽. |
516) | ≪韓末近代法令資料集≫1, 348∼349쪽. |
517) | ≪韓末近代法令資料集≫1, 380∼381쪽. 鄭喬,≪大韓季年史≫上, 107쪽. |
518) | 李光麟,<舊韓末의 官立外國語學校>(≪韓國開化史硏究≫, 一潮閣, 1969) 참조. |
519) | Lak-Geoon George Paik, The History of Protestant Missions in Korea, 1832∼1910(Seoul:Yonsei University Press, 1970:original ed., 1927), pp.451∼452 (“Appendix E:Agreement between the Korean Government and the Paichai College”) 참조. |
520) | 宋炳基,<開化期 日本留學生 派遣과 實態(1881∼1903)>(≪東洋學≫16, 1988), 9∼11쪽. |
521) | 金泳謨,≪朝鮮支配層硏究≫(一潮閣, 1982), 42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