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기타 개혁
앞에서 다룬 개혁조치 이외에 제2차 개혁을 주도했던 박영효는 朝鮮協會의 조직, 관민이 동일하게 재래의 白色복제를 흑색류로 바꾸는 일, 僧徒의 도성내 출입금지 해제, 갑신정변의 주역을 포함하여 1894년 이전에 정치적 이유로 처벌된 ‘寃罪人’ 38명의 명예회복과 복관 등을 추진하였다.
이중 가장 주목할 만한 것으로 조선협회의 조직을 들 수 있다. 조선협회는 1895년 6월 23일 과거 청국사신들의 숙소였던 南別宮에서 창립식을 가졌다. 이 협회의 목적은 “조·일 양국의 진정한 우의를 도모하고 서구가 번영한 원인과 극동이 쇠퇴한 이유를 의논하여 극동을 번창시킬 수 있는 방안을 고안”해 내는 데 있었다. 협회의 규칙에 의하면, 그 지도부는 의장 1명, 부회장 1명, 위원 20명, 서기 2명, 비서 2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회원자격은 서울거주자의 경우 매달 50전, 그 외 지역거주자의 경우 매달 30전의 회비를 납부하는 사람은 누구나 가입할 수 있도록 개방되어 있었다. 조선협회는 회원의 상호 발전을 도모하기 위해 연구 및 토론, 협회지의 발간, 서적 및 소책자의 출판 등 다양한 사업을 펼쳐나갈 예정이었다. 조·일 양국의 관계자 수백 명이 참석한 창립식에서 회장 자리는 공석으로 남겨둔 채로 외부대신 김윤식이 초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다.522)
서울주재 일본 및 미국외교관들은 박영효가 일본과 소원해진 관계를 회복하고자 조선협회를 결성하였다고 이해하였다. 그러나 이는 조선협회가 설정했던 창립목적을 협의로 해석한 데서 도출된 견해라고 볼 수 있다. 조선협회는 박영효가<개화건백서>에서 강조한 바 있는 근대적 정당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띤 준정치단체였음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조선협회의 조직과 사업의 내용이 독립협회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이 협회는 독립협회의 성립에 영향을 끼친 주요 단체였다고 볼 수 있다.523)
<柳永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