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대외관계의 개혁
김홍집·유길준 등 갑오개화파는 일본의 후원에 힘입어 집권하였을 뿐 아니라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일정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원조를 받았다. 이것은 이 정파의 대일의존적 성격을 드러내주는 점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이 같은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의 고유한 개혁안을 갖고 나름대로의 민족주의적 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다.
갑오개화파는 경장 초에 조선의 국호를 ‘대조선국’으로 부르다가 1895년 10월 15일에 이르러서는 이를 ‘大朝鮮帝國’으로 개칭하는 동시에 국왕의 칭호를 ‘대조선국왕’에서 ‘大朝鮮皇帝’로 격상시키기로 결의한 바 있다.566) 그리고 9월 4일에는 ‘開國紀元節’을 제정·경축하였으며, 1895년 12월 30일에는 1896년부터 독자적 연호인 ‘建陽’을 채택하여 국가적 자주·독립의식을 선양키로 결의하였고, 모든 관공서에 국기를 게양하라는 의안을 다루기도 하였다.
특히 주목되는 점은 1895년 7월 12일에 왕명으로써 圜丘壇을 건축하기로 결의한 데 이어 10월 15일 내각회의에서 이 원구단에서 皇帝尊稱 奉位式을 개최하기로 결의한 사실이다. 그러나 이 계획은 영·러·미 공사와 일본공사 코무라가 시기상조론을 내세워 반대하였기 때문에 결국 보류되고 말았다.567)
이러한 민족주의적인 국위선양 운동은 갑오파 뿐만 아니라 갑오경장에 참여했던 갑신파·정동파 관료들 모두가 시도했던 것으로서 갑오경장 이후에도 연면히 이어지다가 1896년에 창설된 독립협회에 의해 본격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