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정치제도의 개혁
갑오파는 근대적 내각제의 골격을 유지하면서 궁내부관제를 부분적으로 개정하였다. 그들은 내각을 중심으로 국정의 운영을 장악하는 동시에 궁내부의 직권을 분리시켜 국왕과 왕실의 권한을 제한 내지 축소시키려 하였다. 그러나 박영효의 실각으로 고종과 민비의 영향력이 증대하면서 궁내부를 통한 왕실의 국정 관여도가 높아졌다. 따라서 민비시해사건을 계기로 갑오파는 고종으로 하여금 “근래 궁내부와 내각의 분별이 확정치 못하야 정령이 혹 궁내부로서 발포한 것이 없지 아니하니…今으로부터 이후는 朕의 내각과 궁내부는 관제의 정한대로 각기 권위를 격수하여 범백정령은 皆先 내각대신으로 議케 하라”는 조칙을 발포케 함으로써 내각의 권한을 강화시키려 하였던 것이다.568)
이 조칙에 의거해서 1895년 12월 25일에 <宮內府官制>가 개정되었다. 개정된 궁내부관제에 의하면, 기존의 6院 가운데 장례원·시종원·회계원은 그대로 두고 규장원·제용원을 폐지하였다. 또 經筵院을 신설하고 內藏院을 內藏司로 바꾸었으며, 원 산하의 秘書監·宗正司·貴族司는 각각 秘書院·宗正院·貴族院으로 개편함과 아울러 典醫司·奉常司·主殿司·太僕司 등을 독립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회계원의 長을 卿으로 고치되, 그 예하의 출납사와 검사사를 폐지하는 대신 과장을 두어 그 사무를 맡게 하였다. 그 외에 궁내부대신의 직무규정이나 기타 관제내용은 변함이 없었다.569)
그러나 이러한 궁내부관제의 개정은 오히려 제2차 개혁 당시의 궁내부관제보다 덜 체계적이었다. 이는 민비시해사건 이후 국내외 여론의 악화와 정국의 동요 등으로 정권적 기반이 약화되는 상황 속에서 갑오파가 궁내부를 통제하지 못했음을 방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