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군사제도의 개혁
갑오파는 강력한 근대적 常備軍을 지속적으로 양성하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중앙 및 지방군제에 대한 개편을 단행하였다. 우선 그들은 박영효가 망명 직전에 실시하려 했던 지방군제의 개편을 재차 추진하였다. 즉, 7월 11일을 기해 해산시키기로 예정했던 각 도의 外營 兵丁의 해산을 유보하였지만, 9월 3일에 조선 수군의 주력인 경상·전라·충청 3도 수군의 최고사령부인 三道水軍 統制營에 대한 폐지령을 발포하고 이어서<各道의 兵營과 水營을 廢止하는 件>,<各 鎭營을 廢止하는 件>,<各 鎭堡를 廢止하는 件> 등을 공포하였던 것이다.577)
한편 김홍집내각은 민비시해사건이 발발한 다음 10월 13일에<訓練第一聯隊 編制에 관한 件>을 제정함으로써 정권의 군사적 기반을 공고히 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르면, 훈련 제1연대는 연대본부와 제1대대 및 제2대대로, 각대대는 대대본부와 4중대로 각각 편성되고, 그 규모는 총 1,733인이 되도록 계획되었다.578) 아울러 10월 22일에는 궁성의 경비체제를 한층 강화하기 위해<宮城諸守備兵服務規則>을 제정하고 24일부터 시행토록 하였다.579)
그러나 훈련대의 일부가 민비시해사건에 동원되었기 때문에 국내외 인사들간에 그에 대한 비난 내지 의구심이 높아졌다. 이에 10월 30일에 김홍집내각은 훈련대를 해산하고 그 대신<陸軍編制綱領>을 새로이 제정·공포하여, 서울에 왕성수비를 전담하는 친위대와 지방 주요 지역의 방위를 담당하는 진위대를 설치하였다. 이와 동시에 친위대 2개 대대와 평양 및 전주부에 진위대를 설치하는 칙령이 내려짐으로써 친위대와 진위대의 편성작업이 개시되었다.580)
처음에는 친위 1대대에 각각 4개 중대씩 소속되었으므로 친위대는 2개 대대 휘하에 8개 중대로, 진위대는 그 절반인 2개 대대에 2개 중대로 각각 편성되었다. 친위대의 구성을 살펴보면, 대대본부에는 대대장직의 참령과 군사·부위·참위 각 1인을 배치하였고, 중대에는 중대장직의 정위 1인·소대장직의 부참위 3인·정교 1인·부참교 15인·병졸 200인 등 220인을 배치하였다. 따라서 2개 중대로 편성된 친위 1대대는 장교와 사병 합계 884명이었고, 친위대 총원은 2개 대대 1,876명이었다. 또한 진위대는 친위대와 똑같은 정원을 배정받아 2개 대대 총 884명으로 구성되었다.581)
그러다가 1896년 1월 27일에는 친위대 1개 대대를 증설하는 칙령이 반포되어 친위대는 3개 대대가 되었다. 신설된 친위 제3대대는 工兵隊 병력 중에서 차출하되, 나머지 공병대의 인원은 점차 친위 각대로 보충하기로 되어 있었다. 이러한 친위대의 증강조치는 친위대가 민비시해사건과 단발령의 실시로 말미암아 전국적으로 전개된 의병을 진압하는 데 동원되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소홀했던 왕실 호위군을 강화하기 위해 취해졌던 것이다.
다음으로 갑오파는 1896년 1월 11일에<武官學校官制>를 제정하여 훈련대 사관양성소를 폐지하고 본격적인 사관학교로서 武官學校를 설립하였다. 이어 15일에는<武官學徒募集令>을 발포하여 20세 이상 30세 미만의 무관지원자를 모집하였다.582) 그런데<기국채의>에 따르면, 갑오파는 일본으로부터 군사교관 26명을 초빙하여 조선의 군대를 훈련시키되, 1897년까지 서울에 2개 대대, 그리고 지방 요지에 6개 대대와 5개 중대의 병력을 배치할 계획이었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갑오파는 잠정적인 對日의존 방략하에 근대적 상비군의 양성·유지계획을 치밀하게 수립하였으며, 이를 실현함으로써 자신들이 염원하는 부국강병을 달성하려 했다고 말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