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 교육제도
갑오경장 기간에는 근대적 교육이념에 입각하여 신식 학교제도가 마련되고, 한성사범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 등이 설립되었다. 특히 이러한 교육제도 개혁을 담당했던 정동파인사들은 아관파천 후에도 여전히 정부의 요직을 차지하였기 때문에 갑오경장 때 입안된 교육 관련 법령 가운데 일부 조항을 개정·보완함으로써 근대적 교육의 내실을 기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먼저 1896년 2월 20일 學部令 제1호로 公立小學校에 대한 국고금 보조와 교원의 지원을 규정한<補助公立小學校規則>이 발포되어, 초등교육은 가일층 확대되어 갔다.661) 이 규칙은 갑오경장 중에 근대적인 초등교육을 실시하기 위해 발포된<小學校令>과<小學校規則>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는 후속조치였다. 이에 따라 한성부의 銅峴과 安洞에 각각 관립소학교가 증설되었으며, 새 지방제도에 의거해서 한성부를 비롯한 13개 관찰부와 개성·강화 등 2개 부, 인천·부산·원산·경흥 등 4개 개항장, 제주 1개 목, 그리고 양주군 등 17개 군 등 전국 38개의 요지에 공립소학교를 설립하는 계획이 마련되었다.662)
또한 1897년 1월 14일에는<漢城師範學校 官立小學校敎員의 官等俸給改正>이 공포됨으로써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와 일반 관공립소학교의 교원간에 차등화되었던 직제와 봉급이 일원화되었다.663) 이러한 조치는 한성사범학교 부속소학교와 일반 소학교가 다 같은 초등교육기관이라는 근대적 인식에 바탕한 것이었다.664)
교육제도의 보완과 아울러 근대적 학문을 널리 보급하고 학생들에게 애국심을 고취시키는 조치도 단행되었다. 소학교·외국어학교에서는 한글·국한문·외국어를 비롯하여 본국·만국의 역사와 지리, 산수, 물리, 체조 등의 교과목이 개설됨으로써 실용주의적·합리주의적 지식을 습득시킴과 동시에 민족정신을 함양하는 교육이 실시되었다. 그 결과 “남녀없이 입학하여 세계학식 배워보자 교육해야 개화되고 개화해야 사람되네”라는 내용의 ‘대조선 자주 독립 애국하는 노래’ 등이 전국 각지의 학생에게 보급·전파되어 애창되고 있었다.665) 또한 1896년 11월 21일에 거행된 독립문 정초식에서는 배재학당 학생들이 ‘조선가’·‘독립가’·‘진보가’ 등을 합창하고 영어학교 학생들이 체조시범을 보임으로써 일반국민들에게 근대적 교육기관에 대한 긍정적 인식을 심어주는데 기여하였다.666) 그 결과 지방 관리들이 한성사범학교 졸업생들을 자기 관할지역의 소학교 교원으로 다투어 모셔가려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667)
그렇지만 정동파에 의한 교육제도 확립 노력이 순조롭게 진행된 것만은 아니었다. 학부의 재정 빈곤으로 보조금이 제대로 지원되지 않아 전국 요지에 소학교를 건립하려던 계획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였으며, 중학교·대학교·전문학교 등의 설치계획은 그 관련 법규조차 마련하지 못한 채 방기되었다.668) 더군다나 1896년 6월에 학부대신직을 맡았던 申箕善이 儒學교육을 부흥시키려 했기 때문에 근대적인 교육의 보급은 예기치 못한 난관에 부딪쳤다. 그는 諺文 및 태양력 폐지, 학도들의 양복착용 및 단발의 금지 등 복고주의적 조치를 취하는 한편<成均館經學科規定>개정을 통해 성균관의 전통적 유학교육을 강화시키려 했다.669) 또한 그는 구미 각국을 야만시하고 기독교를 ‘鄙俚淺妄한 夷俗之陋’라 비난하는 내용의≪儒學經緯≫를 저술·발간하여 이를 관립학교 학생들에게 가르치도록 강요함으로써 근대적 교육개혁에 역행하고 있었다. 그는 결국≪유학경위≫에 대한 학생층의 반발과 서울주재 구미공사단의 엄중한 항의로 말미암아 그해 10월에 학부대신직에서 해임당하고 말았다.670)
그후 한성사범학교·소학교·외국어학교 만에 불과했던 교육기관은 거의 변동없이 유지되다가 1899년에 접어들어 비로소 각종 전문학교가 설립되기에 이르렀다. 즉, 1899년 3월 24일에<醫學校官制>, 4월 4일에<中學校官制>, 6월 24일에<商工學校官制>, 그리고 1900년 9월 4일에<鑛務學校官制>등이 잇따라 제정되었다. 이들 중에서 우선 주목할 것은 우리 나라 최초의 중등교육법제인<중학교관제>이다. 이 관제는 학무아문의 專門學務局이 중학교·대학교·기예학교·외국학교·전문학교를 관장토록 규정한<各衙門官制>(1894년 7월 30일)에 의거하여 제정되었다. 이 관제에 의하면, 중학교는 “實業에 就코져 하는 인민에게 正德·利用·厚生하는 중등교육을 보통으로 교육하는 處”였으며, 4년제의 尋常科와 3년제의 高等科 2과로 편제되었고, 지방에 중학교를 설립할 경우 심상과를 먼저 설치하되 그 장소를 해당 지방의 鄕校에 두도록 하였다.671)
이어서 1900년 9월 3일에 공포된<중학교규칙>을 살펴보면, 중학교는 “국민에게 필요한 중등교육을 교수”하며, 소학교와 마찬가지로 관립·공립·사립중학교 등 3종류로 하되 공립·사립중학교에는 심상과만 두도록 규정하였다. 또한 심상과는 독서·역사·지지·산술·경제·물리·외국어·체조 등 14개 교과를, 고등과에 독서·산술·경제·물리·외국어·법률·정치·공업·의학 등 15개 교과를 배우며, 고등과 졸업자는 판임관과 전문학(교)에 들어갈 자격을 주었다.672) 이로써 볼 때, 중학교는 실업교육 뿐 아니라 관료 양성, 그리고 전문학(교)이라는 고등교육기관에 입학하기 위한 예비학교의 역할을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들 관제에 의거해서 설립된 것은 1900년에 漢城中學校 하나뿐으로, 그나마 심상과만 두는 데 그쳤다.673)
다음으로<醫學校官制>는 1895년 12월에 제정된<種痘醫養成所規程>에 근거하여 마련되었다. 여기에는 내외의 각종 의술을 가르친다고 규정함으로써 전통의술과 서양의술을 함께 가르치려 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1899년 7월 5일에 제정된<醫學校規則>에 따르면, 입학자격은 중학교를 졸업한 만 20세 이상 30세 이하의 자에게 주었으나 당시 중학교 졸업자가 없었던 점을 감안하여 文算에 능한 총명한 자에게 특별시험을 치르고 입학하도록 하였으며, 수업연한은 3년이었다.674)
마지막으로, 상업과 공업, 광학 등 實學을 교육하는 상공학교와 광무학교가 설립되었다.<商工學校官制>에는 상업과와 공업과를 두고, 수업연한을 예과 1년, 본과 3년으로 정하였을 뿐 교육과정과 기타 자세한 규칙을 따로 제정하도록 규정하였다. 그러나 그 후속조치가 마련되지 않은 채 이 관제는 1904년<農商工學校官制>로 개정되고 말았다.675) 또한 광무학교는 수업연한을 3년으로 하고, 實地 견학 및 견습을 위해 소관 개광소에 支學校를 설치하도록 하였지만, 지학교의 설립은 이뤄지지 않았다.
이상과 같이 갑오경장 중 입안되었던 각종 교육제도와 이에 따른 근대식 학교의 설립은 아관파천 이후 더욱 확대되었다. 특히 갑오경장 당시 한성사범학교 및 초등교육, 그리고 외국어학교에 국한되었던 교육기관이 중학교, 의학교, 상공학교, 광무학교 등의 중등교육과 전문 및 실업교육으로까지 확대되었던 점은 주목할 만하다. 따라서 근대식 학교제도를 확립하고 근대적 내용의 교육을 실시하고자 했던 갑오경장의 교육개혁 취지는 그후에 보완되어 근대적 교육을 확산시켜고 국민들에게 교육의 필요성을 널리 깨닫게 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고 평가된다.
661)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46∼4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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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2)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113·173∼174쪽. |
663)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206∼207쪽. |
664) | 安基成,≪韓國近代敎育法制硏究≫(高麗大 民族文化硏究所, 1984), 167∼169쪽. |
665) | ≪독립신문≫, 1896년 5월 9일·9월 5일. |
666) | ≪독립신문≫, 1896년 11월 24일. |
667) | ≪독립신문≫, 1896년 11월 28일. |
668) | 尹健次,≪朝鮮近代敎育の思想と運動≫(東京:東京大學出版會, 1982), 155∼158쪽. |
669) | ≪官報≫, 1896년 7월 17일. |
670) | 韓哲昊, 앞의 책, 162∼163쪽. |
671)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459∼460쪽. |
672) | ≪韓末近代法令資料集≫3, 141∼147쪽. |
673) | 孫仁銖,≪韓國開化敎育硏究≫(一志社, 1980), 91∼92쪽. |
674) | ≪韓末近代法令資料集≫2, 453·518∼524쪽. |
675) | 安基成, 앞의 책, 355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