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갑오경장의 역사적 자리매김
첫째, 갑오경장을 주도했던 세력은 1880년대에 외교 내지 문화사절단의 일원 혹은 유학생으로서 외국을 자주 왕래했거나 개화·자강추진기구에 근무함으로써 국제정세와 근대적 문물에 대한 이해가 밝고 時務능력도 갖춘 인물들이었다. 그들은 반청 독립사상과 反勢道 근왕사상이 강하였으며, 신분적으로는 서얼·중인 및 변방출신이 많았다. 또 그들 중에는 개신교 수용자들도 섞여 있었다. 그들의 특수한 신분적 주변성과 사상적 이단성 때문에 그들은 전통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따라서 그들은 역사를 변혁하는 ‘창조적 소수자(creative minority)’로서의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한편 그들은 자신들의 출세 도모라는 이기적 동기 이외에 ‘보국안민’·‘便民利國’·‘부국강병’·‘왕조의 중흥’ 등 구국·애족의 목적을 가지고 갑오경장에 임했다. 그들은 이러한 개혁목표를 달성함에 있어 될수록 조선의 전통을 존중하되 외국의 문물을 선별적으로 취사·선택하는 방식을 따랐다. 그리고 자신들의 이상을 추구함에 있어 어느 특정 이념을 교조주의적으로 받아들여 실현하려 하지 않고 점진적·개량주의적으로 현실을 개혁하려는 신축성을 보였다. 전체적·결과적으로 볼 때, 그들이 추진했던 개혁의 목표와 방법은 소위 온건개화파의 개혁노선보다 훨씬 더 급진적 성격을 띤 것으로서, 갑신정변을 주도한 급진개화파의 노선에 근접한 것이었다.
둘째, 갑오경장 추진세력은 개혁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일본으로부터 일정한 정치적·군사적·경제적 원조를 받는 것이 필수불가결임을 전제하고 개혁운동에 임했다. 그들은 동학농민봉기 및 청·일 양국군의 국토유린이라는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부득이 ‘문명개화’와 ‘부국강병’에 성공한 일본과 협력하면서 개혁을 성사시키는 수밖에 없다고 판단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일본정부에 대하여 일본군의 駐留, 정치·군사 및 경찰고문관의 파견, 그리고 800만 엔 규모의 차관공여 등을 요청하였다. 비록 그들이 구국·애족의 동기로 위기를 극복하는 데 앞장섰다 하더라도, 일제의 야욕을 철저히 간파하지 못하고 일본에 의존함으로써 결과적으로 일제의 제국주의적 침략을 용이하게 만들어 준 점에서 정치적 한계성을 드러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갑오경장 때 작성된<起國債議>등을 면밀히 검토해보면, 그들은 1895년 이후 3년간 일본의 경제원조(借款)에 의존하되, 1898년 이후에는 ‘獨立·自理하는 域’에 도달할 것을 목표하고 있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조선이 일본의 압력 내지 원조에 힘입어 개혁을 추진하게 된 것을 민족적 수치로 생각하고 이러한 상황을 하루 속히 극복하려고 분발하고 있었다. 즉, 갑오경장 추진세력은 자주·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써 시한부로 일본에 의존하려 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동기론적 관점에서 볼 때 갑오경장은 근본적으로 애국적 개혁운동이며 부분적이지만 자율적 개혁운동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셋째, 갑오경장 추진세력이 일본에 의존하면서 개혁을 추진하게 된 것은 그들이 국내 민중간에 튼튼한 지지기반을 갖지 못하였고 스스로를 지탱할 만한 독자적인 경제·군사적 실력을 확보하지 못한 비혁명적 정치집단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러한 취약성은 19세기 후반 조선왕조내에서 시도된 모든 관주도형 개혁운동의 주체세력들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던 약점이기도 하다. 따라서, 거시적으로 볼 때, 그들의 개혁추진방략은 현대 한국의 대외의존형 근대화운동의 원형이었다고 볼 수 있으며, 이 점에서 갑오경장은 독특한 근대한국 특유의 의의를 지닌다.
넷째, 갑오경장은 근대적 민족주의·민주(민본)주의·평등주의사상에 입각한 제도개혁운동으로서 실학에서 발원한 갑신정변의 전통을 이어받았으며 독립협회운동의 선구가 되었다. 비록 갑오경장에서 표방된 민족주의는 반청 자주독립에 편중한 것으로서 완전한 反帝, 특히 반일사상이 되지는 못하였고, 민주주의는 지방자치제(향회)를 실시하되 근대적 대의민주제(의회제도)의 도입은 당분간 유보하는 정도의 것이었으며, 평등주의는 능력본위의 평등사회 구현을 지향하되 노비와 여성의 인도주의적 대우개선을 주장하는 수준에 머물렀다.
이러한 여러 가지 한계성에도 불구하고 근대적인 민족주의·민주주의·평등주의 사상을 바탕으로 추진된 갑오경장은 한국 근대화의 획기적 이정표였음에 틀림없다. 갑오경장 당시 시도된 칭제건원, 영은문·모화관의 철폐, 조선협회의 설립, 한글 혹은 국한문혼용체 공문 작성과≪관보≫의 발행, 군국기무처의 ‘의회’ 설립 시도 등은 1896년 이후에 실현된 순한글≪독립신문≫의 발간, 독립협회의 창립, 칭제운동, 그리고 중추원의 의회화안 등의 선구를 이루었던 것이다. 바꾸어 말하자면, 갑오경장은 독립협회운동의 선구였던 것이다.
갑오경장 때 입안·추진된 개혁 가운데 내각중심의 입헌군주제 및 제한적 대의정치의 시도, 그리고 탁지부로의 재정일원화 기도 등은 군주권 강화에 배치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대한제국기에 이르러 포기되었다. 그러나 대외적 자주독립의 선양, 향회 개설을 통한 민주주의적인 지방자치제의 실시, 교통·통신시설의 확충, 근대적 상비군과 경찰제도의 수립, 그리고 사법제도의 확립, 능력본위의 평등주의사회 실현, 그리고 합리·실용주의적인 교육제도의 정립 등은 1896년 이후 줄 이은 근대적 개혁의 기초를 마련해준 점에서 높이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柳永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