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병합전선의 주차군
넓은 관점에서 볼 때 주차군의 모든 행동은 최종적으로 병합이란 초점 위에 귀착된다. 병합을 실현한 원흉은 야마가다(山縣有朋)→가츠라(桂太郞)→테라우치(寺內正毅)로 이어지던 長州閥 직계의 침략파 군벌들이었다. 그 가츠라내각의 육군대신 테라우치는 1910년 5월 30일 제3대 통감에 겸직 발령되었다. 그 직후인 6월 15일 주차군 참모장으로 전출되어 있던 아카이시(明石元二郞) 소장이 다시금 주차군헌병대 사령관으로 복귀하였다. 병합을 예정한 헌병대 강화책인데, 16일 테라우치는 아카이시에게 조선의 경찰권 접수를 명령하면서, 수상서리 박제순에게도 이에 관한 公翰을 전달하였다.545)
이리하여 6월 24일 이른바<경찰권위탁각서>로 조선은 경찰권마저 탈취당했다. 조선국 경시청은 폐지되고 통감부 경무총감부가 신설되면서, 주차군헌병대 사령관이 경무총장을 겸직하게 되었다.546)
이보다 앞선 6월 1일 주차군에게는 병합에 대비한 병력이동 배치가 지시되었다.547) 이로 인해 羅南의 기병, 청진과 함흥 등의 보병, 임시파견대가 의병토벌이란 명목 아래 7월 9일까지 용산으로 집결하였다.
이러한 무력의 뒷받침 속에서 7월 23일 테라우치는 군함 야구모(八雲)편으로 인천에 도착하였다. 일본에 체류중이던 宋秉畯을 8월 18일 입경시킨 후, 병합을 반대하면 내각을 송병준에게 넘기겠다고 이완용을 협박했던 것이다. 이때 18일부터 25일까지의 신문이 경무총감 겸 헌병사령관인 아카이시에 의해서 休刊되었다.548)
8월 22일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려 병합조약이 조인되었다. 23일 헌병사령관 아카이시는 경무총감부령 제3호<集會取締令>을 발하여 정치에 관한 집회 또는 옥외에서의 다중의 집합을 금하고 일체의 정치결사를 1주일 시한부로 해산시켰다.549) 병합의 조약은 이런 조치들을 선행시킨 후에 8월 29일에 발표되었다.
병합을 뒷받침하는 위력이었던 경성 임시 주둔의 각 부대는 10월 24일부터 12월 21일까지 원래의 주둔지로 귀환하였다. 나남의 기병대만이 경비관계상 경성에 잔류했다가 1911년 5월 24일에 용산을 떠났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