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통감부의 군사·경찰제도
(1) 러일전쟁과 한국주차군의 탄생
한국지배체제 형성에 관하여 일본은 러일전쟁 중 한일의정서를 빙자하여 한국주차군으로서 치안을 담당하고 군률을 한국에 적용하기 시작한 후 약 6년간의 통감부기간을 거치면서 총독부 군사·경찰 무단정치의 원형을 구축하였다고 할 수 있겠다. 여기서 군사·경찰 무단정치의 원형이 형성되는 역사적 과정을 간단히 추려보면 다음과 같다.
1904년 2월 23일 외부대신서리 李址鎔과 일본공사 하야시(林權助)에 의해 조인된 한일의정서는 사실상의 공수동맹이었다. 이 협약 제4조에 의해서 일본은 조선에서의 駐兵權·用兵權은 물론, 군략상 필요한 지점에서의 점령·收用權까지를 확보하였다. 협약의 유효·적법성 문제를 논외로 한다면 이 의정서는 일제의 침략군을 합법화시키는 것이었고, 한국주차군의 駐留를 인정한 근거가 되는 것이다. 협약 제4조의 全文은 다음과 같다.
제3국의 침해 또는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의 황실의 안녕 또는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경우에는 일본정부는 속히 臨機 필요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대한제국정부는 右의 일본정부의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십분 편의를 제공할 것임.
일본정부는 전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군략상 필요한 지점을 임기 收用할 수 있음.
한일의정서는 군사점령 체제 밑에서 매수·협박과 반대자 추방 등의 강권방법으로 체결된 ‘攻守同盟’이었다. 이 한일의정서 제4조를 근거로 해서 참모본부는 1904년 3월 10일 주차군사령부 및 예속부대의 편성을 명령하였다. 이리하여 사령부 및 보병 6개 대대반 등을 예속부대로 한 한국주차군이 편성된 것이다.524)
이와 같이 해서 탄생된 한국주차군은 국제법상 주둔의 근거가 지극히 불투명한 존재였다. 이것이 한일의정서에 의한 것이라면 일종의 동맹군인데, 이렇게 되기 위해서는 이 의정서의 유효·적법성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 의정서는 경성 일원과 대궐을 무력으로 포위한 상태에서 국왕 및 重臣을 强談·威迫해가면서 체결한 것이었다. 즉 국가 및 국가대표에 대해서 강박이 가해진 경우였던 것이다.
이와 같은 이유로 인해 한국주차군은 국제법상 어떠한 합법적 주둔근거도 발견되지 않는, 즉 침략군인 것이었다. 이러한 침입은 러일전쟁을 위한 일시 체류·일시통과 목적도 아니었다. 이들은 열강의 수령 통보에 의해서 의사표시의 적법성이 인정된 한국정부의 중립선언을 유린하면서 침입해 왔다. 그리고 그로 인해서 시작된 사실상의 불법점령 상태를 戰後에까지 연장시키는 형태로서 주둔하였다. 즉 그것은 러일전쟁과 관련해서 시작된 위법의 점령군이요, 중립침범의 침략군이었던 것이다.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