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초기의 헌병경찰제도-군사경찰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대장이 한국주차군사령관으로 1904년 10월 7일 부임하자 자의로 한국 전역에 일본 군율을 적용하고 함경남북도에 군정을 선포하고 서울과 전주지구에 군사경찰제를 실시하였다.552) 이로써 한국은 일종의 제도화된 일본군정 하에 놓이게 된 것이다. 이때 전국 12개 도시에 12개 憲兵分隊와 56개 憲兵分遣所가 설치되어 2개 사단의 일본육군과 375명(1904년 3월 11일 현재) 이상의 헌병기동대가 동원되었으며553) 주차헌병대는 육군보병의 후원을 받으면서 군사시설의 보호를 구실삼아 군사경찰은 물론 치안경찰을 담당하였다.
1905년 1월 경시청 경시 마루야마 시게도시(丸山重俊)가 한국정부의 경무고문으로 취임한 이래 그의 보좌기관을 중앙과 각 道에 한국의 경무조직과 대응시켜 배치하여 사실상 한국경찰의 전권을 장악하였다.
이후 주차헌병대는 편제·배치에 변천을 거듭하면서 1905년 10월 16일의 러일강화조약 발효를 맞는다. 이때 주차헌병대는 12개 분대를 경성·부산·원산·인천·의주·평양·안주·개성·臨溟·輸城·전주·대구에 두었고, 그 밑에 56개의 헌병분견소를 설치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러일전쟁시의 병력을 배경으로 하여 실시된 군정은 비록 단기였으나 육군대장급의 사령관이 지휘하고 헌병대가 그 주역을 담당했다는 점에서 조선총독부 무단정치의 原型으로 볼 수 있다. 일본육군 군벌들은 전후에도 이 무관조직의 군정체제를 유지할 것을 요망했으나554) 이토를 중심한 문민파 일파는 육군의 발호를 경계하여 문치조직을 주장하였다. 결국 이토가 천황의 特旨를 얻어 초대 통감으로 임명됨으로써 문관조직으로 낙착되었다.
헌병대의 배치는 1906년 3월말의 육군대신 통달<在韓駐箚各部隊要員整理의 件>에 의해서, 현역 연기자 및 예비역·후비역인 헌병하사·상등병 184명을 해산시키면서, 분견소도 32개로 축소되었다. 이후 1906년 10월 29일, 헌병조례 개정에 의해서, 주차헌병대는 제14헌병대로 개칭되었다. 이것은 편제상 일본에서 분견된 형식이었는데, 대장은 고가(古賀要三郞)중좌였다. 제14헌병대는 京城에 본부를 두고 7개 분대를 경성(분견소:인천·개성·춘천), 전주(분견소:대전·목포·군산), 대구(분견소:마산·부산), 평양(분견소:황주·진남포), 정주(분견소:영변·신의주), 함흥(분견소:원산·장진·성진·혜산진), 鏡城(분견소:청진·회령·웅기)에 배치하였다.
통감부는 문관통감 이토를 수반으로 방대한 문관관료기구로 창설된 문치주의 표방의 기구였다. 치안기능은 헌병 중심에서 경찰 중심으로 옮겨갔으며 군율을 완화하는 등 문치적 경향이 농후하였다. 그러나 문치적 노선은 어디까지나 표면적 형태이고 무력에 의한 주권침탈과 민족생존권의 박탈이 기본정책이었다. 더욱이 통감부 설치 이래로 심화된 침략에 대한 한민족의 거족적 항쟁이 전개되자 문치를 주장한 이토 자신이 이를 억압하기 위하여 적극적으로 군대와 헌병을 증감시켜 억압적 치안체제를 구축해 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