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2권 대한제국Ⅳ. 일제의 국권침탈2. 통감부 설치기의 통치체제2) 통감부의 군사·경찰제도(3) 헌병경찰제도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1. 대한제국의 성립 배경
          • 1) 청일전쟁 이후 동아정세의 변화
          • 2) 조선의 위기와 정부의 대응
        • 2. 고종의 황제즉위 과정
          • 1) 황제즉위의 논리
          • 2) 고종의 황제즉위식
        • 3. 대한제국의 성립과 열국의 반응
          • 1) 국호 ‘대한’의 제정과 반포
          • 2) 열국의 승인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1. 대한제국의<국제>및 군사제도
          • 1)<대한국국제>의 제정 과정
            • (1) 교전소의 설치
            • (2) 법규교정소를 통한<대한국국제>의 제정
          • 2)<대한국국제>의 내용과 역사적 성격
            • (1)<대한국국제>의 내용
            • (2)<대한국국제>의 역사적 성격
          • 3) 대한제국의 군사제도
            • (1) 군제개혁의 방향
            • (2) 원수부를 통한 황제권 강화
          • 4) 중앙 및 지방군의 기능과 역할
        • 2. 광무양전·지계사업
          • 1) 양전사업의 추진 배경과 목적
          • 2) 양지아문의 설립과 양전시행
            • (1) 양지아문의 토지측량과 광무양안
            • (2) 광무양안과 ‘시주’의 성격
          • 3) 지계아문의 설립과 관계발급사업
          • 4) 광무양전·지계사업의 성과와 의의
        • 3. 산업진흥정책
          • 1) 광무정권과 궁내부
          • 2) 광무년간의 근대화정책
            • (1) 교통·운수업
            • (2) 화폐·금융
            • (3) 상공업
            • (4) 광산
        • 4. 대한제국기의 자강·구국교육정책
          • 1) 경본예참의 국가주의 자강교육
          • 2) 국민주의 자강교육
          • 3) 구국교육정책과 의무교육운동
        • 5. 대한제국기의 재정정책
          • 1) 재정정책 기조의 변화
          • 2) 정부세입의 축소와 황실수입의 확대
            • (1) 정부세입의 만성적 부족
            • (2) 재원의 내장원 이관과 황실수입의 확대
          • 3) 황실·군사부문의 지출 증대와 황실의 자금 축적
            • (1) 황실·군사비의 팽창과 행정·사업비의 축소
            • (2) 황실재정의 지출 양상과 여유자금의 축적
      • Ⅲ. 러일전쟁
        • 1. 러일전쟁의 배경
          • 1) 러일전쟁과 한국
          • 2) 청일전쟁 후 동아시아 국제관계
          • 3) 의화단사건과 열강관계
          • 4) 영일동맹과 러일협상
        • 2. 러일전쟁의 경과와 전후처리
          • 1) 러일전쟁의 경과
          • 2) 전후처리와 동아시아 국제관계
            • (1) 영일동맹의 개정
            • (2) 태프트-가츠라밀약
            • (3) 포츠머스조약
          • 3) 러일전쟁과 한국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1. 국권의 제약
          • 1) 한일의정서와 부수협정의 체결
          • 2)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와 을사5조약
            • (1) 일제의 한국 ‘보호국’화 정책과 국제적 승인과정
            • (2) ‘보호’조약 체결을 위한 사전공작
            • (3) 을사5조약의 체결
        • 2. 통감부 설치기의 통치체제
          • 1) 보호국체제와 통감부
            • (1) 보호국체제
            • (2) 통감과 통감부의 권한
          • 2) 통감부의 군사·경찰제도
            • (1) 러일전쟁과 한국주차군의 탄생
            • (2) 군사제도
            • (3) 헌병경찰제도
        • 3. 통감부의 식민지화 정책
          • 1) 식민지화의 기반조성
            • (1) 만한경영론
            • (2) 경제의 장악과 이식민 촉진을 위한 기반 조성
            • (3) 군사기지화 작업
            • (4) 행정·사법제도의 개정
            • (5) 기타 식민지화를 위한 기반조성
          • 2) 통감부시기 재정제도의 개편
            • (1) 일제의 재정제도 이식과 재정기구 장악
            • (2) 식민지화를 위한 재정운영-세입·세출예산 분석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1. 고종의 국권회복 노력과 강제퇴위
          • 1) 밀사파견 외교의 전개
          • 2) 고종의 통치권 회복 시도
          • 3) 이완용 내각의 성립과 고종의 강제퇴위
        • 2. 한일신협약(정미7조약)의 체결
        • 3. 군대해산과 사법권 피탈
          • 1) 군대해산과 의병봉기
          • 2) 일제의 사법권 장악
        • 4. 일진회의 합방청원운동
          • 1) 일진회의 창립과 정계진출
          • 2) 3파연합과 합방청원운동
        • 5. 한일합병조약의 체결
          • 1) 일본정부의 한국병합 방침
          • 2) 병합조약의 체결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Ⅲ. 3·1운동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다. 후기의 헌병경찰제도-치안경찰

 대한제국에 대한 일본의 경찰권은 i) 경무고문계, ii) 통감부 경찰계(통감부 경찰부→각 이사청 경찰) 및 iii) 일본 본국 외무성 경찰계(영사재판권에 의한) 등으로 三元化되어 갔다.555) 통감부 설치 후 1906년 2월 칙령으로 한국주차헌병은 군사경찰 외에 행정경찰 및 사법경찰도 관장토록 하고 행정경찰과 사법경찰에 관하여는 통감의 지휘를 받게 하였다. 즉 군사경찰은 군사령관의 지휘를 받는 외에 일반경찰사무에 대하여는 오로지 통감의 지휘를 받게 함으로써 고문경찰에 대한 통감의 지휘·감독과 더불어 일층 경찰기관의 통일을 기할 수 있게 되었다.556)

 1907년 7월 정미7조약 제5조에 의하여 일본인을 한국관리에 임용할 수 있게 되자 8월 경무고문 마루야마 시게도시(丸山重俊)는 경시총감에, 그리고 각도 경무고문지부 보좌관은 각도 경시에 각기 임명되었으며 뒤이어 10월 한국칙령 제29호로서 종래의 경무고문제도는 폐지하여 전국의 경찰은 내부대신 관리하에 내부 경무국에서 그 사항을 총괄하였다. 한편 통감부 및 이사청관제도 개정하여 통감부 경찰관이 폐관되어 한국정부에 임용됨으로써 고문경찰·한국경찰·통감부경찰이 통합되었다.557) 이와 같이 하여 한일경찰을 통합하고 한국경찰관을 당해 일본관헌의 지휘·감독 하에 두었고 주차헌병이 통감에 예속되어 경찰권을 장악하였다. 1909년 7월에는<한국사법 및 감옥사무위탁에 관한 각서>558)를 통해서 한국사법권을 탈취했으며 다시 1910년 6월에는 한국의 행정경찰권을 일본에 위탁케 함으로써 한국의 경찰사무는 완전히 일본의 수중에 들어간 것이다.

 한편 격화하는 민족독립운동을 억압하기 위하여 경찰업무에 관해서는 한국주둔 일본군대의 관여가 본격화되었음은 앞에서도 논급한 바이다. 우선 1906년 8월에는 서울에 주재하는 한국주둔군사령관이 한국방위를 담당하였다. 이것은 외형상으로는 한국방위라는 대외적 국방임무에만 연결시키고 있었지만 내용상으로는 국내적 경찰업무에 깊이 관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미 러일전쟁 이래 일본의 주둔헌병대가 한국인 무력항일투쟁을 진압한다는 명목으로 한국내 보안경찰기능에 관여하기 시작하였으며 급기야 일반행정 내지 사법경찰에까지 일본헌병대가 직접 개입하게 되었다.559)

 이후 주차헌병은 1907년 10월 4일 아카이시(明石)소장이 제14헌병대장으로 취임하면서 비약적으로 확충되기 시작하였다. 제14헌병대는 그해 10월 7일에 다시 한국주차헌병대로 환원되었다. 이것은 그해 10월 8일자<한국주차헌병에 관한 건>에 의해서 치안경찰을 주무로 하게 되었다. 이들은 본부를 경성, 분대를 경성·천안·영산포·평양·함흥·부산560)·용정촌(간도)에 두었고, 분대 밑에 분견소를 설치하였다. 규모는 1907년말 현재 460여 개 분견소에 장교 이하 2,400여 명의 주차헌병을 두었다.561)

 1908년 5월부터 배일운동을 보다 조직적으로 억압하기 위해 한국주차군대 헌병대·경찰관을 모두 일본군 사령관의 지휘·명령하에 통합했으며 헌병대에 1908년 7월 한국인 헌병보조원을 배속시키고 그 분견소 수를 2배 이상으로 증원하는 등 헌병대를 대폭적으로 증강했다.562) 한국인 헌병보조원은 1908년 6월에 칙령으로 창설되었으며563) 일본헌병대에 위탁되어 그 지휘하에서 일본헌병의 근무를 보조한 밀정으로 주로 의병을 수색하고 민정을 정찰하며 치안유지에 협조하기 위해 창설한 것이었다. 그 정원은 약 4천 명으로 주로 전년도에 해산된 한국군병 중에서 모집하였으며 이들 보조원은 일본헌병 1명에 대해 2명 내지 3명씩 배속시켜서 그 지휘·감독하에 두었다.

 헌병보조원은 만 20∼45세의 조선인 한글 해독자 중에서 모집되었으며, 군 속의 신분을 보유하고 ‘폭도의 진압과 안녕 질서의 유지를 위하여’ 헌병의 업무를 보좌하는 것이 임무였다.564) 정원은 약 4천 명인데, 7월 1일부터 9월에 걸쳐 채용이 완료되었다. 이러한 헌병보조원제도는 해산된 한국정부군을 헌병보조원으로 흡수함으로써 그들의 의병화를 차단하고 토벌의 목적도 달성하려는 以夷制夷의 술책이었다.565) 이와 같이 치안을 군대에 의존함으로써 文治는 결국 실패로 끝나고 군대식 치안체제를 다시 형성해 간 것이다.

 헌병보조원은 전원 주차헌병대가 관장하며, 1개월 이내의 견습기간을 마친 후 헌병 1인당 2∼3명씩 배치되었다. 대우는 본봉·출장여비와 일어 해득자에 대한 통역수당 등인데, 순사 봉급과 같은 수준이었다. 근무성적 우수자에 대해서는 2등급의 勤功章이 수여되어 1909년에는 631명이 제1종, 1,369명이 제2종 근공장을 수령하였다.

 주차헌병 조직은 종래의 2배 이상으로 확충되었다. 1908년 7월에 헌병보조원이 배치되면서 한국내의 헌병기관은 6개 분대566)와 39관구로 조정되었다. 이 밑에 분견소 441개와 파견소 9개가 배치되었으며, 이와 별도로 간도에도 1개 분대와 10개 분견소가 배치되었다. 그 인원은 1908년말 현재 헌병은 장교 이하 2,347명과 헌병보조원 4,234명이었다. 1909년 1월에 이것은 51개 관구에 452개 분견소, 13개 파견소로 조정되었다. 4월부터는 의병토벌과 관련해서 천안·영산포분대 밑에 임시파견소 45개가 증설되었다. 5∼6월에는 경성·영산포·평양·함흥분대에 임시판견소 14개가 증설되었으며, 7월에는 간도분대 밑에도 6개의 파견소가 증설되었다. 간도분대는 1909년 11월 1일에 통감부 간도출장소와 함께 폐지되었고, 대신 羅南에 鏡成분대가 신설되었다.

 이리하여 1910년 3월말 현재로 주차헌병조직은 한국내 7개 분대 57관구에 457분견소, 4 출장소로, 장교 이하 2,369명과 헌병보조원 4,392명으로 구성되었다. 1909년부터는 헌병보조원 감독을 창설하면서 초년도에 365명을 임명하였는데, 이들은 3개월 이상 복무한 우수 보조원으로써 임명되었으며 단독근무제였다.

 1910년 6월 24일 수상서리 朴齊純과 통감 테라우치는<경찰권 위탁에 관한 각서>를 교환하였다. 이에 의해서 한국정부의 경찰청은 폐지되고,<통감부 경찰관서 관제>가 공포되었다.567) 이에 의한 경찰 중앙관서는 경무총감부이며, 주차군 헌병대장이 경무총감을 겸함으로써 전체 경찰과 헌병을 지휘하게 되었다. 지방 경찰관서는 각도에 설치된 경무부와 하급기관인 경찰서인데, 각도 헌병의 長인 憲兵佐官이 道경무부장을 겸직하였다.

 이에 의해서 주차헌병대본부는 주차헌병대사령부로 개칭되고, 도 단위인 13개 헌병대본부, 몇 개 군을 관할하는 77개의 헌병분대, 그 밑에 헌병분견소와 헌병파견소가 설치되었다. 이들은 13도내 101개의 경찰서 및 347개의 파출소·주재소와 함께 치안경찰 업무를 집행하였다.

<표 5>헌병경찰기구(1910. 6∼1919)

 이와 같이 한·일의 경찰조직을 통감부 소관으로 통합시켜 여기서 군사경찰인 헌병과 일반경찰이 완전히 합일된 헌병경찰체제가 확립되었던 것이다. 그 헌병경찰기구는<표 5>와 같으며 이 체제는 1919년 사이토총독의 기구개혁으로 보통경찰제도로 변혁되기까지 병합 후에도 억압체제로서 지속되었다.

<金雲泰>

555)≪日韓外交資料集成≫8, 178∼179쪽.
556)≪韓國施政年報≫, 明治 39·40년, 123쪽.
557)≪日韓外交資料集成≫8, 179∼180쪽.
558)≪日韓外交資料集成≫6下, 1256∼1258쪽.
559)조선총독부 편,≪施政二十五年史≫(1935), 29∼30쪽.
560)부산헌병분대는 1908년 3월에 폐지되고, 대신 대구헌병분대가 신설되었다.
561)田保橋潔, 앞의 책, 118쪽.

明石 헌병대장이 헌병경찰관을 일원화시켜 병력을 대폭 강화한 것은 의병토벌이 목표였다. 1906년부터 항일운동의 最盛期인 1908년 말까지의 기간에만 피해 死者 일인 120여 명, 한국인 1,250명, 소실가옥 6,800여 호, 토벌에 의한 군대·헌병·경찰관의 손해는 사망 일인 127명, 한국인 52명, 부상 일인 252명, 한인 약간 명, 의병 사자 15,000명에 달했다.
562)헌병의 배치상황을 보면 1908년 7월 현재 6分隊(경성·평양·천안·대구·영산포·함흥), 39관구, 441분견소, 9파출소 및 간도의 1분대, 10분견소이었다. 1908년말 현재 헌병장교 이하 2,347명, 현병보조원 4,234명, 1909년 6월말 현재 헌병장교 이하 2,380명, 현병보조원 4,309명에 달하였다(≪第二次 韓國施政年報≫, 明治 41년·43년, 58∼60쪽).
563)1908년 6월 16일, 조선국 군부령 제3호 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
564)헌병보조원 모집에 관한 건 제2조·제11조.
565)≪朝鮮駐箚軍歷史≫, 338쪽.
566)소재지는 경성·평양·천안·대구·영산포·함흥.
567)1910년 6월 29일, 칙령 제296호. 7월 1일부터 시행됨.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