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경제와 사회생활
만주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은 대부분 농업, 수렵 및 채삼과 광산업에 종사하였다. 지역에 따라 다소의 차이는 있었으나 중국인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의 조선인은 대부분 중국인에게 소작인으로 고용되어 농사를 지었다.566) 이러한 경우 일반적으로 지주의 명령에 무조건 복종하겠다는 계약하에 지주로부터 가옥·농구·종자·비료 등 일상 생활필수품을 급여받는데, 그들이 이주한 첫 해에는 농장의 노예와 다름없는 생활을 하게 되며 수확 후에 그 동안 급여받은 대가를 지주에게 반환해야만 하였다.567) 지역에 따라 소작료도 다소 차이가 있었다. 지주로부터 황무지를 빌려 개간할 경우 첫 해의 소작료는 수확의 10%, 두 번째 해는 수확의 20%, 3년째는 수확의 30%를 지불했지만, 4년째부터는 지주가 요구하는 地租를 지불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조는 초봄에 지주가 소작인과 소작료를 정하면 그해의 풍흉에 관계없이 정한 지조를 지불하여야 하는 定租였다. 생산량에 대한 분배는 지주와 소작인이 각각 50%씩 취하는 경우도 있었으나 대개 지주와 소작인이 4:6 또는 3:7의 비율로 분배하였다.568) 토지에 대한 공적인 세금은 지주가 부담하지만 청의 관헌·군인·지주 그리고 마적까지 잡다한 명목으로 조선 농민을 수탈하였다. 조선인이 토지를 소유하지 못한 이유는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불안으로 한곳에 오랫동안 정착하지 못하고 자주 이동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만주에서는 1909년 이전까지는 법적으로 토지를 소유할 수 없었으며 중국인 지주와 관헌으로부터 끊임없이 학대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소수 조선인만 토지를 소유할 수 있었고 대부분은 중국인의 소작인이 되었다.569)
그러나 부지런한 조선인은 농가마다 반드시 돼지·닭·개를 사육하였고, 농한기에는 미투리 삼기, 행상, 연료의 채취판매, 목탄 제조판매, 노동이나 축력을 이용한 운반업, 마포 짜기, 양잠, 전분제조, 양봉 등 각종 부업에 종사했다. 지방에 따라 감초와 인삼을 채취하거나, 목재를 벌채하기도 하고, 혹은 수렵이나 광산업에 종사하기도 했다. 정미업·미곡상·잡화상·여관·음식점·무역상·운반업·약종상·전당포를 경영하는 사람도 있었고, 의사·봉급생활자·고용인도 있었다.570)
노령지역으로 이주한 대다수의 조선인 또한 농업에 종사하였다. 러시아정부의 적극적인 귀화정책에 의하여 1871년에 블라고슬로벤노에에 이주한 조선인은 1호당 100제샤찌나씩 분배받았고, 1891년 이후 귀화한 경우에는 1호당 15제샤찌나씩 분배받았다.571) 대농으로 성공한 예도 적지 않았으나 대부분의 경우에는 식구수가 증가함에 따라 분배받은 토지만으로는 생계를 유지하기가 어려워 소작인이 되었다. 노령지역에서의 소작인의 경우는 지주가 소작인에게 농구와 식료품 일체를 지급한 경우에는 수확을 반분하였고, 단순히 토지만 대여한 경우에는 수확에 대하여 지주 40%, 소작인 60%로 분배하였다. 이외에 소작인은 지주와 모든 公課金을 같은 비율로 부담하였다. 이와 같은 소작조건은 소작인에게 사실상 그 부담이 과중한 편이었으며 더욱이 매년 居留稅까지 지불하여야 했으므로 비귀화 조선인의 생활은 곤궁하였다.572)
러시아농민이 유럽과 아시아에서 실시하여 온 농법은 흑룡강유역과 연해주에 적합하지 못하여 계속 실패하였으므로, 조선인에게 임차하여 소작료를 취하는 편이 훨씬 유리하였다. 조선농민은 파종과 작물에 많은 잔손질과 수고를 들이기 때문에 러시아농민의 2배의 수확을 올릴 수 있었다. 그리하여 1910년 항카호수(Ozero Chanka)를 제외한 연해주 일대의 토지는 조선인에 의하여 경작되었다 할 정도였다. 이들은 주로 메밀·참밀·귀리·콩은 물론 채소와 원예 농작물까지 재배하였다. 1910년에 니꼴스크와 우스티프키에(Ustipkie)에서 그리고 1917년에 그로데고보에(Grodegovoe)에서 벼농사가 성공하자 灌漑가 용이한 지역으로 조선인이 이주하였다.573)
일부 조선인은 1891년부터 흑룡강지역의 砂金鑛에서 노동하기 시작하였으나 러일전쟁 이후 러시아관헌은 조선노동자를 러시아 노동자 수의 1/2만을 고용하도록 그 수를 조절하였고, 1908년 이후 금광과 어장에서 1910년 7월부터는 관영사업에 조선인 고용을 일체 금지하였다. 그러나 연해주해안 각지에는 어업에 종사하는 조선인도 다수 있었다.574)
이주한 조선인의 대부분은 일찍부터 동족의식이 강하여 자연발생적으로 동향인이 함께 모여 상부상조하며 집단부락을 형성하고 있었다. 유력한 지도자에 의하여 자치적으로 운영되고 있던 이들 집단의 크기와 명칭은 일정치 않았다.575) 압록강 대안지역에서는 把頭라 불리는 지도자가 있어 주민의 상호 부조와 결속을 책임지고 있었으나 타부락과는 단절된 상태에서 고립된 사회를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이들은 마적의 약탈에 대처하기 위하여 조선의 郡·縣에 상당하는 지역을 會上으로 구획하고 파두를 회두라 불렀으며 이들 중 都會頭 또는 大會頭라 부르는 會上長을 선출하였다. 도회두는 회상내의 호구수와 장정수 및 병기를 파악하여 장부를 작성 보관하는 일에서부터 범죄자의 처벌, 공공요금의 수렴 그리고 군사활동을 위한 주민동원까지 담당하였다.576)
1884년경 연변의 조선인은 그 일대를 크게 四大保로 구획하고 보를 다시 조선의 面이나 鄕에 해당하는 社로 나누었다. 사는 鍾城대안의 경우 1사가 570여 호부터 280여 호로 그 크기가 일정치 않았다. 이 사는 다시 甲으로 1갑은 다시 牌로 분할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연변의 조선인은 모두 2만여 명으로 4,308호였으며 415패, 124갑, 39사, 4보로 구획되었다.577)
동간도의 琿春에서는 지역자치기구를 社 또는 鄕이라 하여 그 長을 社長 또는 鄕長·鄕約·鄕正이라 하였으며, 그 보조원으로 社內의 장로를 甲長으로 임명하였고, 10여 호를 관할하는 자를 牌頭라 하였다. 또 지방에 따라 사나 향 대신 100호, 50호로 구획하기도 했으며 조선인만 거주하는 지방에서는 기구의 장을 조선에서와 같이 執綱·尊位·里長·洞長 등으로 정하기도 하였다.578)
조선정부는 종래의 상부상조하던 조선인의 자치기구를 활용하여 이주인들을 관리하였다. 1907년 간도에 통감부 임시파출소를 설치한 일본은 간도를 北都所·會寧間島·鐘城間島·茂山間島로 하고 島社長을 1명씩 두었고, 이를 다시 41사, 290촌으로 구획하여 사에는 社長을 촌에는 村長을 두었으며 그 중 촌장은 각 촌민이 추천하였다. 그러던 중 1909년의 간도협약으로 지금까지 실시되어 오던 사를 폐지하고 면장을 선출하여 춘추 두 계절에 수고비를 지불하였다. 면장은 면회의를 개최하여 불법행위자를 징벌하고 이웃과 불목하거나 나이어린 사람이 윗사람을 능욕하였을 때 곤장 30대를 가하거나 境外로 추방할 권한을 가졌다. 이후 1910년 일제가 한국을 병탄하고 만주에까지 세력을 확대하게 되자 자연발생적으로 형성되었던 부락들이 점차 파괴되고 일본 행정체제로 구획되어 통치되었다.579)
노령지역으로 이주한 조선인 역시 그들 방식의 집단 마을을 형성하였다. 그들이 처음 이주하였을 때 연해주는 거의 무인지대로서 불과 수십 명이 본국의 관습대로 부락마다 연장자를 風長(風尊)으로 선출하였다. 그는 사소한 사건을 관장하고 러시아 관헌의 지령을 전달하는 말단행정 임무를 겸하였다. 러시아 관헌은 조선부락의 풍장제를 중국의 전통적인 마을 통치제도인 老爺制度로 인식하고, 이들 풍장을 都老爺·村老爺로 구분하고 도노야에게는 여러 촌의 노야를 총괄하는 지도자로서 조선인 전반에 대한 징벌의 권한을 위임하였다. 예를 들어 1907년에 블라디보스톡 新韓村의 노야는 위원 21명으로 韓人協議會를 조직하고, 이들은 때때로 啓東學校에 모여 각종사건에 대하여 회의를 열었다. 노야는 평상시에는 러시아 관청과의 교섭을 담당하였고, 기타 그 지역내에서 일어난 분쟁을 중재하기도 하고 서류를 代書하기도 했다. 노야, 후에 도노야의 직명은 그대로 자치단체의 명칭이 되었다. 조선인이 거주하는 촌에는 이러한 자치기구 이외에 상부상조하는 단체들이 조직되었다. 신한촌의 경우 계동학교 교사를 중심으로 약 20명이 韓人靑年會를 조직하여 일요일마다 학교에 모여 지식을 교환하기도 하고, 빈곤한 자, 병든 자, 사망자가 발생하였을 때 부조하였다. 이와 같이 학연, 지연, 혹은 혈연적 유대를 집단화한 단체는 다른 조선인의 촌에서도 많이 찾아 볼 수 있었다.580)
노령에 이주한 조선인은 같은 동양문화권인 만주지역에서와는 달리 이질적인 문화 속에서 생활하였으므로 1세보다 2세가, 노인보다 청소년이, 여자보다 남자가 러시아인과 잡거하여 러시아화하는 경우가 많았고, 한러 국경지역 보다는 오지에서 생활하는 자가 더 러시아화하였다. 그러나 절대 다수는 모국어를 사용함으로써 그들이 조선인임을 잊지 않았다.581)
조선인은 “밥은 굶어도 자식은 공부시킨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자제교육에 힘써왔다. 이주 조선인사회에 있어서도 자제교육은 가장 중대한 문제 중 하나였다. 이들은 십여 호만 모여도 서당을 설치하고 훈장을 모셔다가 자제교육을 실시하는 미풍을 유지하였다. 서당은 비교적 소규모로 교실 하나에 한서와 경전에 밝은 한학자를 훈장으로 모셔 와≪千字文≫·≪明心寶鑑≫·≪論語≫·≪孟子≫·≪大學≫등의 한문과 습자 및 한학을 가르쳤을 뿐, 時勢를 가르치거나 이에 적응할 수 있는 교육을 실시하지는 못하였다. 이들 서당의 학생수는 평균 7∼10명의 소수였고, 연령은 보통 8∼17세까지였다. 훈장의 보수는 금전 대신 농산물로 계산하였는데 지역에 따라 옥수수·쌀·콩·수수 등 기타 다량의 곡물로 지급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서당형식의 교육기관이 1905년 이전까지의 유일한 조선인의 교육기관이었다. 그후에도 도시에서 멀리 떨어진 지역에서는 이러한 형태의 교육이 계속되었다.582)
1905년 이후부터는 만주와 노령지역은 조선인의 조국독립운동의 기지가 되었고 일본제국주의의 압박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피난처가 되었다. 독립운동 지도자들은 만주·노령이 지리적으로 조국과 인접하여 있고, 이미 많은 조선인이 이주하여 정착해 있었으므로 조국광복을 위한 자금과 인력 확보를 위하여 도움이 되리라 판단하였다. 그러나 전혀 연고가 없었던 지역에서보다는 도움이 되었지만 초기 이주자들의 대부분은 경제적 곤궁 때문에 의식주 해결에 여념이 없었으므로 이들에게서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주의의 발로를 크게 기대할 수는 없었다. 또한 현지 국가의 정치·경제·사회상황이 항상 국권회복운동에 유리하지만은 않았다. 러시아정부는 1914년 이후 급변하는 국제정세와 과격한 사회주의이념의 확산으로 인하여 조선인의 독립운동을 견제하였다. 만주지역에서는 일제의 침략으로 인하여 조선인이 독립운동을 활발히 전개할 수 없었다. 게다가 독립운동 지도자들간의 의견 상충으로 조선인은 통일된 정치적 지도를 제공받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뜻있는 애국독립지사들은 조선인 2세들을 애국시민으로 교육시켜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것이 오히려 미래를 위하여 중요한 사업임을 깨닫게 되었다. 즉 국권수호운동의 실천적 방향을 교육에 두었던 것이다. 그 결과 1919년 3·1운동이 발발하자 만주·노령 각지에서 독립운동시위가 일어났고, 그 후에도 많은 조선인이 조국광복을 위하여 끊임없이 투쟁하였던 것이다. 더욱이 만주·노령 각지의 조선인이 긍지를 잃지 않고 언어와 풍습을 오늘날까지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많은 우국지사들이 민족의식 고취를 위하여 교육의 필요성을 통감하고, 이를 위해 신명을 바친 결과라 하겠다.
<任桂淳>
566) | 柳承宙,<朝鮮後期 西間島移住民에 대한 考察-江北日記의 解題에 붙여>(≪亞細亞硏究≫21-1, 1978), 304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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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7) | 朝鮮人組合 編, 앞의 책, 106쪽. |
568) | 朝鮮人組合 編, 위의 책, 20쪽. 허용구,<점산호들의 토지약탈>(김양 편집,≪조선백년사화≫1, 요령인민출판사, 1981), 32∼33쪽. |
569) | 李勳求, 앞의 책, 137쪽. |
570) | 고영일,<현보산 광산의 폭동>(김양 편집, 앞의 책), 75∼78쪽. 田原茂, 앞의 책, 30쪽. |
571) | 1제샤찌나는 2.7에이커로 약 3,300평이다. |
572) | 高承濟, 앞의 글, 158∼159쪽. 玄圭煥, 앞의 책, 829·836쪽. 南滿洲鐵道株式會社 編, 앞의 책, 129쪽. 李智澤, 앞의 글, 192쪽. |
573) | 金俊燁·金昌順, 앞의 책, 51쪽. 玄圭煥, 위의 책, 820·830·832·835·854쪽. 高承濟, 위의 글, 159쪽. 田原茂, 앞의 책, 159쪽. |
574) | 玄圭煥, 위의 책, 865∼868쪽 및 873쪽. 田原茂, 위의 책, 140∼141쪽. 南滿洲鐵道株式會社 編, 앞의 책, 120쪽. |
575) | 吳世昌,<在滿朝鮮人民會硏究>(≪백산학보≫25, 1979), 126쪽. |
576) | 柳承宙, 앞의 글, 301∼303쪽. |
577) | 허용구, 앞의 글, 28쪽. 申奭鎬·金聲均 외,≪韓國現代史 3:民族의 抵抗≫(新丘文化社, 1974), 230∼231쪽. |
578) | 허용구, 위의 글, 32쪽. 朝鮮總督府,<國境地方視察復命書>, 200쪽. |
579) | 임계순, 앞의 글, 624∼625쪽. |
580) | 위와 같음. |
581) | 玄圭煥, 앞의 책, 879쪽. 海野峯太郞,<ウスリ地方朝鮮人移民史:頭滿江を越えだ人々>(≪三千里≫40, 1984), 101쪽. |
582) | 임계순, 앞의 글, 629쪽. 田原茂, 앞의 책, 54쪽. 李勳求, 앞의 책, 237쪽. 玄圭煥, 앞의 책, 430∼43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