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이민의 구성과 특징
미지의 세계인 하와이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은 어떠한 사람들이었을까. 먼저 지적해야 할 것은 노동이민의 특성상 20·30대의 성인남자가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즉, 하와이로 간 7,226명 가운데 남자가 6,048명, 부녀자는 637명, 그리고 어린이가 547명이었다. 멕시코로 간 1,033명 가운데는 남자가 702명, 여자가 135명, 어린이가 196명이었다. 그런데 이주자들이 나중에 귀국하지 않고 현지에 뿌리를 내릴 경우 남녀간의 성비불균형은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사진결혼’이 이루어지게 되는데, 1910년부터 1924년까지 1,000명 내외의 신부가 미국으로 건너가게 되었다.586)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혼을 하지 못한 독신자들이 많았다. 해방 직전에 이르기까지 하와이와 미주본토의 전체 한인이 1만 명 내외에 머물렀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 다음으로는 이민자들의 출신배경과 직업이 매우 다양했다는 점이다. 하와이로 이주한 사람들 가운데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도시 노동자였다. 그 다음으로는 전직 군인과 하급관료 출신이었다. 이외에도 수공업자, 정치적 망명객, 학생, 경관, 광부, 목공, 머슴, 승려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농민은 전체 이주자 가운데 1/7 정도에 지나지 않았던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그리고 지역적으로 볼 때도 도시에서 생활하던 사람들이 거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멕시코 이민의 경우에도 서울·평양 등의 대도시와 인천·부산·마산·원산 등의 항구도시 출신이 전체의 90%를 넘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조선 후기이래 지속되어 온 농민층의 분화현상에 따라 농민들의 도시로의 진출과 임금노동자화 되어 갔던 추세를 반영하는 것으로 풀이되고 있다. 아울러 국내에서의 이민 모집이 주로 도시에서 이루어졌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다.
하와이로 이주한 한인들이 도시 출신으로서 다양한 직업을 갖고 있었으며 또 비교적 높은 문자 해독율(전체의 40% 정도로 추정됨)을 보이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곳에 먼저 이주해 자리를 잡고 있던 중국인이나 일본인들과 비교할 때 매우 대조적이었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왜냐하면 이들의 경우 특정지역의 농촌출신으로서 거의 대부분 농민들이었기 때문이었다.587)
세 번째로 지적할 것은, 하와이로의 이민은 단순한 경제적 이유에서만이 아니라 정치적·교육적·종교적 동기도 크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점이다. 즉, 한편으로는 1904년 2월에 발발한 러일전쟁으로 말미암아 국권이 상실될지도 모른다는 위기감, 그리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기독교에 바탕을 둔 문명부강국으로서의 미국에 대한 인식이 하와이로의 이민을 부추겼을 가능성이 컸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하와이 이민자들 가운데 정치적 망명객과 신학문을 배우려는 학생 그리고 기독교 전도사들이 다수 끼어 있었고, 이들은 곧 미주에 형성된 한인사회의 지도자로 부상했다.588)
586) | 김원용, 앞의 책, 27∼29쪽. ‘사진결혼’으로 미국에 들어온 여자들의 경제적 사회적 활동상에 대해서는, Eun Sik Yang, “Korean Women of America: From Subordination to Patnership, 1903∼1930”, Amerasia 11-2, 1984, pp. 1∼28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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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7) | Bernice B. H. Kim(김봉희), “The Koreans in Hawaii”(M. A. Thesis, University of Hawaii, 1937), pp. 85∼86. Wayne Patterson, “Upward Social Mobility of the Koreans in Hawaii”(Korean Studies 3, 1976), pp. 82∼87. |
588) | 김원용, 앞의 책, 29∼32쪽 및 40∼41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