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한인사회의 형성과 발전
1903∼1905년 사이에 하와이제도에 도착한 7,000여 명의 한인들은 오하우(Ohau)·하와이(Hawaii)·마우이(Maui)·카우아이(Kauai)의 네 섬에 산재한 30여 곳의 사탕수수 농장에 많게는 수백 명에서 적게는 수십 명 단위로 고용되어 집단생활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들은 하루 10시간의 중노동에 품삯은 남자가 65센트, 여자와 아이들은 50센트 정도를 받았다. 성인 남자의 경우 한달 평균 25일간 쉬지 않고 일을 하게 되면 16달러를 받을 수 있었다. 1인당 식비가 6∼7달러 정도이고 숙소는 농장에서 무상으로 제공되었기 때문에 저축할 여유는 있었다고 보여진다. 따라서 착실히 돈을 모으게 되면, 힘든 농장생활을 청산하고 도시로 진출하거나 미국 본토로 이주할 수도 있었다. 실제로 하와이에서 한인들의 도시진출은 다른 어떤 민족들보다도 그 속도가 빠르며 또 그 비율이 높았다. 이러한 특징은 한인 이민의 대부분이 도시출신으로서 다양한 직업을 가졌던 사실과 연결시켜 해석되고 있다.589)
미주의 통일적 교민단체인 大韓人國民會가 1910년에 실시한 인구조사에 따르면, 그 동안에 귀국한 사람이 983명(남자 964명, 여자 19명)이고 미국 본토로 이주한 사람은 2,011명(남자 1,999명, 여자 12명)이며 사망자가 45명이었다. 하와이에 그대로 거주하는 사람은 4,187명이었으며 새로 107명의 아이들이 출생했다. 출산율이 저조한 것은 독신자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것이 앞서 지적한 ‘사진결혼’인데, 그 결과 한인사회가 사회적 경제적으로 안정되면서 활기를 띨 수 있었다.
1925년 하와이 호놀루루 주재 일본총영사관의 조사에 따르면, 한인들 가운데 농장노동자의 숫자는 매년 감소하고 있었다. 1905년 4,946명이었던 농장노동자는 1910년에 1,732명으로 대폭 줄어들었고, 1924년에는 997명까지 떨어졌다. 이러한 가운데 한인들의 생활수준은 전반적으로 향상되어 나갔다. 농장노동자 중 일부는 자영농 또는 차지농으로서 독립하거나 농장관리인이 되었으며, 도시로 진출한 사람들은 소규모 자영업을 하거나 고용인이 되었다. 자영업의 경우에는 세탁업·제봉업·가구업·제화업·이발업·여관업 등이었으며, 고용인은 상업·수공업·광업·운수통신업·공공서비스업 등 사회의 거의 모든 분야에 걸쳐 있었다. 또한 소수이지만 종교인·교육가·관리·의사 등의 전문직종에 종사하는 사람도 생겨났다.590)
한편, 1905년 멕시코의 동남부 유까딴(Yucatan)州의 메리다(Merida)에 도착한 1,000여 명의 한인들은 22∼24개 곳의 농장에 많게는 30명 이상, 적게는 4∼5명씩 분산·수용되었다. 더위가 혹심해 온도가 화씨 90∼100도 이상으로 오르내리는 곳에서 하는 주된 노동은 伐木 운반작업과 大麻 어저귀 밭에서 가시를 제거하고 뿌리를 자르는 일이었다. 식량은 최소한도의 배급에 그쳤으며 밤에는 토굴과 같은 곳에서 잠을 자야만 했다. 이처럼 열악한 환경에서 질병에 걸리면 치료도 받지 못하고 방치되었다. 그들의 참혹한 형상은 노예가 아니면 개와 말에 비견될 정도였다.591)
만 4년의 계약기간이 끝난 다음에야 그들은 비로소 자유민이 될 수 있었지만 그 동안 농장에 갇혀 지냈기 때문에 뚜렷한 생활방도를 찾기가 어려웠다. 이러한 소식에 접한 대한인국민회는 특파원을 파견하여 교민들의 실정을 조사하고 구제사업을 벌이는 한편 그들을 미국으로 이주시키려는 계획을 세우고 미국정부와 교섭했지만 성사되지 않았다. 그 후 농장과 도시를 전전하면서 어렵게 생활하던 교민들 가운데 일부(288명)가 1921년에 쿠바로 이주했다.592)
하와이에서 미국 본토로, 그리고 멕시코에서 쿠바로 점차 그 생활무대를 넓혀나갔던 미주한인의 이민 제1세대는 환경과 문화가 전혀 다른 곳에서 오직 노동만으로 어렵고 힘든 삶을 개척해 나갔다. 그런 가운데서도 그들은 한인교회와 학교를 세우고 또 자치단체를 만들어 한인사회를 형성·발전시켜 나갔다.
특히 초기 이민사회에서는 “한인이 사는 곳에는 항상 교회가 있었다”라고 할 정도로 교회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그것은 신앙공동체이기 이전에 소수민족으로서의 소외감과 고국에의 향수를 달래면서 서로 위안을 얻고 또 새로운 삶의 의지를 다지는 만남의 장소였던 것이다. 이민 10년만에 하와이 각 지방에는 39곳의 교회가 설립되고 전체 한인의 절반이 넘는 2,800명의 기독교인이 모여들었다. 초기에 이민이 적고 또 넓은 지역에 산재해 있던 미국 본토에서도 한인교회가 7곳에 교인이 452명이었다.593)
교회는 곧 학교이기도 했다. 주일학교와 ‘국어학교’가 주로 교회안에 마련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교육을 받지 못했던 이민 제1세대들이 국어뿐만 아니라 영어를 배우면서 국내 소식을 듣고 현지사회에 적응할 수 있는 정보를 얻었다. 그리고 미국에서 출생한 아이들은 이곳에서 한국의 언어와 문화 및 역사를 배움으로써 민족적 정체성을 나름대로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그들은 공립학교에도 다녔다. 다른 소수민족에 비해 한인 아동들의 취학율은 무척 높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초기 한인들은 교육을 통해서만 자신들의 후손이 사회적·경제적 지위를 향상시켜 나갈 수 있다는 점을 확실히 깨닫고 있었던 것이다.594)
자치단체 역시 이주 초기부터 생겨났다. 하와이의 각 농장에서 집단생활에 들어갔던 한인들은 ‘洞會’를 조직하여 서로간의 친목을 다지면서 상호부조와 권익신장을 도모했다. 그리고 1903년 8월에 벌써 민족운동의 성격을 띤 新民會가 호놀루루에서 결성되기도 했다. 이 단체는 일제의 침략으로부터 한국의 국권을 보호한다는 목적을 내세우고 강령으로서 동족단결, 민지계발, 국정쇄신을 제시했다. 미국 본토에서는 가장 먼저 한인사회가 형성되기 시작했던 샌프란시스코에서 桑港친목회가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共立協會로 확대 발전하면서 미주 각처 20여 개의 한인단체들을 통합하는 구심점이 되었다. 이리하여 한국의 주권이 상실되기 직전인 1910년 5월 10일에 미주한인사회의 통일적 지도기관이자 ‘무형정부’임을 자처했던 대한인국민회가 공식 출범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실제로 대한인국민회는 1910년대 중반에 미주뿐만 아니라 시베리아와 만주·중국 본토에까지 그 지부 조직을 확대해 나가면서 국외한인사회를 통합하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원대한 계획과 포부를 가졌었다. 이러한 노력들이 제1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후 민족자결주의에 기초한 ‘세계개조’의 움직임과 맞물리면서 3·1운동을 일으키는 도화선이 되었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으로 그 결실을 맺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595)
우리 나라 최초의 공식적인 노동이민에 기초한 미주한인사회의 형성과 발전은, 비록 그 규모는 적었다 할지라도, 새로운 서구세계와의 만남이자 진취적인 개척정신의 발현 과정이었다. 아울러 일제에 의한 국권 침탈과 상실이라는 암울한 시대에 국외에 또 하나의 민족운동의 근거지를 마련하고 공화제 정치이념에 바탕을 둔 신국가건설의 원동력이 되었다는 점에서 그 역사적 의의를 높이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596)
<高珽烋>
589) | Wayne Patterson, 앞의 글, 82∼87쪽. Sun Bin Yim, “The Social Structure of Korean Communities in California, 1903∼1920”, Labor Immigration under Capitalism:Asian Workers and Communities(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84), pp. 515∼54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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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0) | Bernice B. H. Kim, 앞의 글, 158∼161쪽. 吳世昌,<韓人의 美洲移民과 抗日運動>(≪民族文化論叢≫6, 영남대, 1984), 132∼134쪽. |
591) | 尹炳奭, 앞의 글, 19∼25쪽. 보다 상세한 내용은 李英淑 編,≪한국∼멕시코 移民 80년사:유까딴의 첫 코리언≫(인문당, 1988) 참조. |
592) | 김원용, 앞의 책, 12∼27쪽. |
593) | 柳東植,<在美韓人의 定着過程에서의 宗敎의 役割―하와이의 韓人社會와 基督敎를 中心으로>(≪연세논총≫28, 연세대 대학원, 1988), 2∼6쪽. |
594) | 吳世昌, 앞의 글, 146∼147쪽. |
595) | 吳世昌, 위의 글, 134∼141쪽. 尹炳奭, 앞의 글, 29∼71쪽. |
596) | 방선주,<미주지역에서 한국독립운동의 특성>(≪한국독립운동의 이해와 평가≫,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5), 181∼187쪽. 민병용,<미주에서의 독립운동사 연구>( 같은 책), 482∼484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