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미주지역
가. 이민 경위
583)1902년 12월 22일 제물포 항구에서 121명의 한인이 하와이를 향해서 출발했다. 미주지역으로의 공식적인 노동이민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것은 우리 나라 역사상 처음으로 서구 세계로의 이주민의 진출이 본격화되었음을 알려주는 일대 사건이었다.
18세기말 태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하와이제도에 백인들이 진출하면서 경제적 변혁을 가져오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름아닌 사탕수수 재배의 발달이었다. 그런데 이에 필요한 노동력을 거의 전적으로 외부로부터 들여 온 인력에 의존하고 있었다. 처음에는 중국에서 많은 노동자가 수입되었으나 점차 포르투갈이라든가 일본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하와이왕국은 경제적 실권을 쥔 백인들의 주동으로 1898년에 미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이 무렵 백인 농장주들은 급증하고 있던 일본인 노동자들을 견제하면서 농장에 필요한 인력을 안정적으로 확보하기 위하여 한국으로 눈을 돌리게 되었다.
하와이 농장주들과 한국정부를 연결시켜 준 사람은 주한미국공사인 알렌(Horace N. Allen)이었다. 그는 1902년 초 휴가차 미국으로 건너갔다가 서울로 돌아오는 길에 하와이에 잠시 들렀다. 이때 그는 사탕수수 농장주협회의 극진한 대접을 받으면서 한국인 노동자를 불러들이는 문제에 대하여 장시간 의견을 나누었다. 그 해 4월 초 서울에 귀임한 알렌은 高宗을 설득하여 이민사업을 성사시키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알렌이 나중에 본국 정부에 보낸 보고서에 따르면, 고종은 1882년에 발효된<입국금지법>에 따라 중국인이 갈 수 없는 미국에 한국인들이 갈 수 있다는 점에 대하여 민족적 자긍심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의 요인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중요한 사실은 당시 국내 상황이 계속되는 가뭄으로 혹심한 기근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국외로의 합법적인 이주를 고려할 수 있는 경제적·사회적 조건이 만들어져 있었던 셈이다. 여기에 더하여 미국과의 우호적 관계증진을 통하여 주변 열강의 침탈로부터 국권을 지키고자 했던 고종의 희망도 크게 작용했다고 볼 수 있다.
한국정부는 1902년 11월 16일에 외국 이민을 전담할 기관으로서 宮內府 산하에 閔泳煥을 총재로 한 綏民院을 설치했다. 그리고 이 기관으로부터 하와이로의 노동자 모집과 파송의 일을 위임받은 데쉴러(David W. Deshler)는 동서개발회사(East-West Development Company)를 별도로 설립했다. 본사를 인천에 둔 이 회사는 부산과 원산 등 주로 항구 도시에 지점 형식의 사무소를 설치한 후 한인 책임자를 통하여 이민 희망자들을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들이 낸 광고문에서는 하루 10시간 노동에 매월 미화 15불(한화로는 57원)의 급료와 더불어 거처 및 의료가 무상으로 지원되는 좋은 조건이 제시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처음에는 선뜻 이민 지원자가 나서지 않았던 것 같다. 하와이는 국내와의 내왕이 비교적 자유로운 만주와 노령지역과는 달리 한번 떠나면 쉽게 돌아올 수 없을 뿐 아니라 그야말로 문물과 풍속이 한국과는 완전히 다른 미지의 땅이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존스(George H. Jones)와 같은 미국인 선교사와 한국인 신자들이 중간에서 이민을 적극 권유하기도 했다.
하와이로의 노동이민은 1903년에 16척의 선편으로 1,133명, 1904년에 33척에 3,434명, 1905년에는 16척에 2,659명이 떠났다. 모두 합하여 7,226명으로서 비교적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05년 4월에 한국정부는 돌연 이민금지령을 내렸다. 그 주된 이유는 하와이에서 한인 노동자들이 일본인 노동자들과 경쟁하는 것을 막으려고 한 일본의 압력 때문이었다.
1904년 7월경 한 일본인 이민회사가 자국의 외무대신에게 보낸 서신에 따르면, 당시 하와이에 거주하는 일본인은 이 지역 전체 인구의 과반수가 되는 7만 명 정도로서 이들이 매년 1억 원이 넘는 돈을 본국으로 송금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만큼 일본인들의 하와이 이민은 개인적이든 국가적이든 성공적인 사업이었던 셈이었다. 그런데 한인 이민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일본인들의 기득권이 침해당할 우려가 커지고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조처를 취해야만 한다고 건의했던 것이다. 이러한 건의를 받은 일본정부는 러일전쟁에서 승기를 잡게 되자 한국정부에 내밀한 압력을 행사했고, 이것이 결국 이민금지령으로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584)
한편, 하와이 이민과는 별도로 1905년 4월 초 1,033명의 한인이 제물포 항구에서 멕시코로의 이민을 떠났다. 이들의 이민을 알선한 사람은 영국인 메이어스(John G. Meyers)였다. 그는 멕시코 농장주들과 동양인 이민을 계약하고 중국과 일본에서 모집하려고 했으나 실패한 후 한국에 와서 大陸殖産會社를 경영하고 있던 일본인 오바 칸이치(大庭貫一)와 손을 잡고 일을 추진했다. 메이어스가 중국과 일본에서의 이민 모집에 실패했던 이유는 멕시코에서의 농장생활이 매우 열악한 환경과 조건에서 노예처럼 혹사당하는 것으로 알려졌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이러한 사정을 잘 몰랐기 때문에 이민 모집에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 후 멕시코로 떠났던 이민자들의 비참한 생활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이에 대한 정부의 진상 조사와 대책을 촉구하는 여론이 일게 되었다. 그러나 이 무렵 이미 외교권을 상실해 가고 있었던 정부로서는 마땅한 대책을 세우기가 어려웠다. 결국 멕시코로의 ‘불법이민’ 송출사건은 일본의 압력에 의한 이민금지령을 대외적으로 합리화시키는 명분으로만 이용되었을 뿐이었다.585)
583) | 미주지역의 초기 이민에 대한 학계의 연구동향과 성과에 대해서는 고정휴,<미주지역 독립운동에 관한 연구의 회고와 전망>(≪한국사론≫26, 국사편찬위원회, 1996), 536∼540쪽 참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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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4) | 崔永浩,<韓國人 初期 하와이 移民-始作과 終末의 動機->(≪全海宗博士華甲紀念 史學論叢≫, 일조각, 1979), 699∼712쪽. 尹炳奭,<國外 韓國人의 歷史와 文化, 社會에 관한 基礎的 硏究(Ⅰ)-美洲 韓人社會의 成立과 民族運動->(≪한국학연구≫2 별집,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1990), 3∼10쪽. 보다 상세한 내용은 Wayne Patterson, The Korean Frontier in America:Immigration to Hawaii, 1896∼1910 (Honolulu : University of Hawaii Press, 1988) 참조. |
585) | 김원용,≪재미한인오십년사≫(리들리 캘리포니아, 1959), 9∼11쪽. 尹炳奭, 위의 글, 14∼19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