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근대 문학과 예술
1. 근대 문학의 발전
1) 개화기의 시대적 과제와 문체, 문학장르의 관련
개화기의 문학을 말하기 위하여는 그 문학과 불가분의 관련을 가진 그 시대 문체 즉, 개화기의 문체396)의 동향을 살펴 두어야 한다. 개화기의 문체 선택은 그 시기의 시대적 과제에 긴밀히 대응하고 있었다. 그것이 개화기의 시대적 과제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었던 것은, 이 시기에 한창 문체 변동이 진행되고 있었던 특수한 사정과 관련을 갖는다. 개화기의 작가들은 문체 선택에 있어서 우리 문학사의 여느 시대의 작가들과는 판이한 입장에 놓일 수밖에 없었다. 국문체·국한문체·한문체의 세 문체가 각각 제 나름의 주장을 앞세우면서 작가쪽의 선택을 요구했던 것이 개화기 문체의 실상이었기 때문이다.
종전에 국문체와 한문체의 이중구조를 보이던 문체가 국문체·국한문체·한문체의 삼중구조로 처음 나타난 것은 1886년에 간행된≪한성주보≫를 통해서였다.≪한성주보≫의 창간호는 종전의 두 문체 이외에 다음과 같이 국한문체로 작성한 기사를 싣고 있어, 이 시기에 문체 변동의 시동이 걸렸음을 보여 주었다.
예문①…[뉵쥬총논]디형둥굴미구술갓탄고로일홈을디구라ㅎ니바다와뉵디와…
예문②…[勅諭抄錄]十月初八日朝報云 傳敎에 去年事를 읏지 참아말랴
星霜이 已周니予心에傷悼홈미이를것업도다.
예문③…[周報 序]洪惟我聖上睿智天縱規謨宏遠旣通和列國命統理衙門設博文局…
위의 인용에서와 같이 개화기 문체의 삼중구조의 하나로 나타났던 국한문체는 정병하의≪農政撮要≫를 비롯한 몇몇 단행본의 문체로 채택되면서 기세를 올렸다. 그러나 당초에 널리 지지층을 확보하면서 등장한 것이 아니었던≪한성주보≫의 국한문체 및 국문체는 수구세력의 집요한 반대에 부딪혔던 듯하다. 그 결과 삼중구조의 문체를 동시에 채택하여 개화기 문체 변동의 계기를 마련하였던≪한성주보≫는 뒤로 갈수록 순한문체만의 신문으로 주저앉고 말았다.
≪한성주보≫가 제기하였던 삼중구조의 문체에 다시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은 것은 1895년에 간행된≪西遊見聞≫과 1896년에 창간된≪독립신문≫이었다.≪서유견문≫을 국한문체로 간행한 유길준은 이 책의 서문에서 이 문체를 선택한 이유를 “語意의 平順홈을 取하야 文字를 略解하는 자라도 易知하기를 爲홈”이라고 밝혔다.≪독립신문≫을 국문체만으로 발간한 서재필 역시 이 문체 채택의 이유를 유길준과 비슷하게 밝혀 놓았다. 그는≪독립신문≫이 “한문은 아니 쓰고 다만 국문으로만 쓰는 거슨 샹하 귀천이 다 보게 홈이라”라고 말하면서, 국문이 “배호기가 쉬흔이 됴흔 글”이라고 했다.≪서유견문≫의 간행과≪독립신문≫의 창간 이후, 국한문체와 국문체는 서서히 한문체를 압박하면서 그 시대에 걸맞는 문체로서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1896년에서 1898년 사이에 여러 신문, 잡지들의 문체로 채택되면서 기세를 올려 가던 국문체와 국한문체는 1898년에 창간된≪제국신문≫과≪황성신문≫의 문체로 채택되면서 상당히 안정된 양상을 보였다. 이 두 신문을 통해 국문체와 국한문체가 당대의 문체로서 안정된 양상을 보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이 두 신문들이 1896년∼1898년 사이에 국문체 및 국한문체를 채택하였던 다른 신문, 잡지들과는 성질을 달리 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1896년∼1898년 사이에 간행된 다른 신문, 잡지들이≪그리스도 신문≫,≪대조선독립협회회보≫처럼 기독교계에서 발행한 것이거나 어떤 특정 단체의 기관지로 발행한 것이었던 것과는 달리 이 두 신문들은 일반 대중을 상대로 발행하였다는 점이 중요한 차이점이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반 대중을 상대로 경쟁을 벌였던≪제국신문≫과≪황성신문≫의 부침을 문체 경쟁의 결과만으로 받아들이기는 어렵다. 신문의 경쟁에는 문체 이외에도 다수의 경쟁 요인들이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대의 대중이,≪제국신문≫이 한문을 모르는 여성들까지 독자로 포용할 수 있도록 국문체로 판을 짰고,≪황성신문≫이 주로 남성 독자들을 포용할 수 있도록 국한문체로 판을 짰다는 점을 중요한 차이점으로 받아들여, 전자를 ‘암신문’, 후자를 ‘숫신문’으로 불렀다는 사실은 당대에 있어서 신문의 문체 선택이 얼마나 중요한 경쟁 요인이었던가를 알려 주는 자료이다.397) 당시에 만들어진 자료를 참고하면≪제국신문≫은 독자 확보 경쟁에서≪황성신문≫에게 패배한 것으로 되어 있다.398) 그러한 결과를 낳은 데는 물론 여러 원인들을 꼽을 수 있겠으나, 문체 선택 또한 중요한 원인들 중의 하나였을 것임에 틀림없다.
이 두 신문의 경쟁 이후, 개화기의 문체 경쟁에서 국한문체가 점차로 세력을 장악해 나가는 형세를 보였다. 다시 말하여 개화기의 국한문체는 종전에 한문체가 누리던 권위, 곧 지식인, 상류 지배층, 남성의 문체로서의 권위를 물려받아, 한문체·국문체를 압도하여 나갔던 것으로 추정되는 것이다.399) 국한문체가 개화기의 주도적인 문체였다는 점은 무엇보다도 당시의 신문·잡지·서적의 대다수가 이 문체를 채택하였다는 사실로 나타난다. 당대의 문체를 주도한 국한문체의 이러한 형세는 다수 논객들의 주장에 힘입어 이루어진 것으로, 이광수의 다음 논설은 개화기 공간에서 벌어졌던 문체 논쟁의 추이를 보여 주는 것으로 주목할 만하다.
然則 엇던 文體를 使用까. 純國文인가. 國漢文인가! 余의 마로 진 純國文으로만 쓰고 십흐며, 면 될 쥴을 알되…今日의 我韓은 新智識을 輸入 급급 라. 이 에 해키 어렵게 純國文으로만 쓰고 보면 新智識의 輸入에 저해가 되슴으로 此意見은 잠가 두엇다가 他日을 기다려 베풀기로 고 只今 余가 주장 바 文體 亦是 國漢文 幷用이라(이광수, ‘今日 我韓用文에 對하여’,≪황성신문≫제3430호∼제3432호, 1910. 7. 2∼1910. 7. 27).
국한문체를 당대의 문체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는 이광수의 위와 같은 주장 이후에 당대의 논객들은 더 이상 문체 문제로 부심할 수 있는 여유를 갖지 못하였다. 1910년 8월 29일에 일제가 우리 국권을 송두리째 빼앗아 버린 마당에 문체 문제에 대한 논의는 더 이상 진행시키기 어려웠던 것이다. 국가의 상실이라는 뜻밖의 사태 전개로 말미암아 우리는 국한문체를 주도적인 문체로 하는 오랜 세월을 살아 가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위에서 살펴본 개화기의 문체 변동은 개화기 문학 작가들이 그들 나름의 문체를 선택하고, 그 문체로 시대의 과제에 대응하며 그들 나름으로 적절한 장르를 결정, 창안하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다음에 개화기 작가의 여러 유형 인물들이 시대의 과제에 어떻게 대응했으며, 문체와 장르 선택에서 어떤 태도를 취했던가를 약술하기로 한다.
396) | 앞으로도 빈번하게 사용할 ‘개화기의 문체’란 용어는 국문체, 국한문체, 한문체 같은 표기 문자의 차이를 가리키는 데 적절한 용어는 아닌 듯하다. 문체의 일반적 개념이 ‘미리 정해 놓은 제재에 대한 최량의 표현 수단의 선택’ 또는 ‘어느 한 주제의 둘레에 모여드는 다양한 의미, 미묘하게 틀리는 의미의 상호관련간의 선택’≪Graham Hough(김영수 역), ‘문체와 문체론’(예원각, 1976, 24쪽)이라고 한다면, 우리들이 관용해 온 ‘개화기의 문체’란 용어는 이런 개념과는 동떨어진 것이다. 사정이 이와 같음에도 불구하고 이 글에서는 학계의 관행을 따라 이 용어를 그대로 사용하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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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7) | 최 준,≪한국신문사≫(일조각, 1965), 85쪽. |
398) | 이종일,<묵암 비망록>(≪韓國思想≫17, 한국사상연구회, 1980) 및≪각회사조사≫(‘안춘근 문고’ 중의 필사본, 정신문화연구원 소장, 1908). |
399) | 이기문,≪개화기의 국문연구≫(일조각, 1970), 17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