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간민회-공교회·농무계
1913년 1월 13일, 前 간민교육회 회원들이 중심이 된 25명의 墾民會 발기인들은309) 延吉·和龍·汪淸·琿春 4개현의 百戶長들과 지방유력자들에게 2월 26일에 개최되는 간민회 창립총회에 대한 초청장을 발송하였다. 이 소집통지서에서 발기인들은 간민회가 북간도와 훈춘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중화민국의 ‘법률에 저촉치 아니하는 범위’에서 무슨 일이든지 한인의 복리증진을 도모하고, ‘민국정부의 일기관’으로서 정부에 대하여 한인의 생명재산의 보호청구권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310)
간민회는 간민교육회와는 대조적으로 중국 지방당국의 관할내에서 북간도 한인들의 자치적인 조직으로서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또한 간민회는 그 활동의 범위를 연길현에서 북간도 전체(연길·왕청·화룡·훈춘)로 확대하였다. 간민회는 전 延吉知府이자 현 吉林東南路觀察使인 陶彬의 사전승인을 받았다.
2월 26일의 창립총회에서 간민회가 조직되었고 중국당국에 제출할 승인요청서에 첨부할 규약초안을 통과시켰다. 3월 30일, 중국당국은 간민회의 승인요청을 받아들어 공식 승인하였다. 간민회 중앙총회는 연길현 국자가의 前 간민교육회관에 두었으며, 간민회의 회원자격은 3년 이상 雜居區域에 거주한 남성 한인들에게만 부여하였다.
이어 1913년 4월 26일 개최된 총회에서 간부들을 선출하였는데 회장에 金躍淵, 부회장에 白玉甫, 총무에 都城, 서기에 朴贊翊 등을 선출하였다. 간민회는 총회에 법률·교육·교섭 등 각 분과 사무를 집행하고, 각 지역에는 지방총회와 지회를 두는 등 자치적 성격을 완비하였다. 회장 김약연은 북간도 한인들간에 존경받는 기독교지도자로서 당시 용정에 있던 명동학교의 교장이었다. 이동춘은 당시 간민교육회에서 설립한 光成學校와 吉新女學校의 교장이었다. 대부분의 총회간부들은 국망을 전후하여 망명한 젊은 애국지사들로서, 3분의 2는 함경도출신이었다. 간민회는 한인마을에 조직활동가들을 파견하여 1913년 5월에는 연길·화룡·왕청 3개 현에 지방총회를 설립하였으며 50호마다 지회를 조직했다.
1913년 7월 11일, 간민회는 동남로관찰사에게 한인호구조사를 신청하여 중국경찰의 긴밀한 협조를 받아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간민회는 1913년 7월 20일, 700명의 한인과 10명의 중국관리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길현 국자가에 새로운 회관의 개관식을 개최하였다. 동남로관찰사인 도빈은 한인과 중국인간의 긴밀한 연대와 한인들에 대한 교육과 실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축하연설을 했다.311)
간민회와 함께 애국청년들로 조직된 것이 靑年親睦會와 大東協新會였다. 특히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靑年學友會에 해당하는 ‘精神團’인312) 청년친목회에서는≪청년≫이란 월간잡지를 발행하였고, 대동협신회에서는 계봉우가 쓴≪중등역사≫와 修身 역사교과서≪吾讐不忘≫등 교과서를 간행함과 동시에 월간잡지≪大震≫(주필:계봉우)을 발행하였다.313)
중국인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1913년 8월 간민회 회원들이 중심이 된 한인기독교도들은 중국기독교인들과 중한연합전도회를 조직하였다. 전도회의 간부들은 같은 수로 한인과 중국인이 선임되었다. 일본의 방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북간도 각지의 한인교회들을 형식상 중국 기독교교단에 소속시켰다.314)
간민회는 이동휘·정재면·박찬익 등 3인의 대표를 북경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중화민국의 성립을 축하하고 대통령 원세개에게 중국내 한인들의 자치적인 지위 허용을 요청하였다.315) 1913년 중반 무렵, 중국 입적을 신청한 한인들은 약 25만에 달하였다.316)
간민회는 창립 이후 1914년 3월에 해산되기까지 1년이 채 못되는 동안에, 간도동포에게 “조국정신을 고취하야 사상변천의 일대 신기원”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었다.317) 이러한 성과는 간민회 간부들의 교육활동이 봉건적 인습과 아집에 빠져 있던 수많은 대중들의 거센 반대를 이겨내면서 이룩해낸 매우 값진 것이었다. 간민회의 교육권장원들은 간민교육회 시절과 마찬가지로, 구타를 당하거나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여 간도 용정촌으로 압송되다가 중국관헌의 도움으로 구원되기도 했다.318)
간민교육회와 마찬가지로, 간민회는 사우계의 완강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사우계는 중국국적 취득, 중국식 의복과 두발 채용과 같은 간민회의 ‘동화정책’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다. 金鼎奎를 비롯한 사우계 회원들은 간민교육회나 간민회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1911년의 신해혁명을 환영하였지만, 그것은 공화정을 수립해서가 아니라 만주왕조를 타도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우계는 간민회가 일진회와 마찬가지로 한인들의 철저한 중국화를 도모함으로써 독립이란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 점은 간민회의 ‘동화정책’이 중국당국의 비호하에 일본의 개입을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궁극적인 목표는 역시 조국의 독립에 있음을 간과한 것이었다.
간민회 간부들은 유학자들이 자신들의 진의를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고, 상호간에 오해를 해소하기 위한 대화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기독교도들의 수령’인 李東輝가 1913년 8월 10일 김정규에게 편지를 보내어 길신여학교에서 공통의 목표, 즉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갖자고 요청하였던 것이다.319)
간민회에 대한 보다 강력한 반발은 오래전에 북간도에 이주한 지주들로부터 왔다. 북간도 전체 한인들을 통합하려는 간민회의 야심찬 정책에 반대하여, 1913년 6월 29일 최남기·한진동·홍자문·위영인 등은 300명을 회원으로 하는 農務契를 조직하였다. 농무계는 그 목표를 간민회 파괴에 두고, 회원을 주로 간민회가 북간도 한인사회에 해악을 가져온다고 믿는 舊이주민들과 유학자들 가운데서 충원하였다. 사우계의 유학자들이 간민회의 ‘동화정책’과 근대적 신교육에 반대한 데 대하여, 농무계는 간민회가 정치적으로 북간도 한인의 자치조직의 지위를 갖는 데 크게 반발하였던 것이다.320)
중국당국과 간민회는 농무계 지도자들인 최남기·홍자문·남철붕·한진동 등을 일본의 첩자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일본당국이 농무계의 反간민회 정책을 활용하려는 데서 그러한 의혹을 더했다. 친일적인 입장에 있었던 일부 지도자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농무계 회원들은 ‘완고하고 무식한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농민들은 일본당국에 의하여 이용될 가능성이 있었다.321)
한편, 康有爲가 이끄는 북경의 孔敎會 활동에 자극받은 북간도 사우계의 한인유학자들은 1913년 11월 29일 공교회 연길지회를 조직하였다. 연길 국자가에 집결한 386명의 한인유학자들은 간민회의 신교육과 동화정책에 대한 반대입장을 선언하고 간부들을 선출하였다. 이들은 공교회가 중국정부에 의하여 공인된 조직임에 반하여 간민회는 길림의 지방당국자에 의하여 승인된 데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322)
간민회는 공교회 역시 농무계와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즉, 중앙정부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중국 지방당국은 서당을 재건하고 근대적 학교들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는 공교회 회원들의 활동을 금지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특히 공교회 용정지회는 일본영사관의 통제를 받는 친일조직으로 알려져 있었다. 중국당국은 공교회 연길지회 간부인 정안립이나 박의풍 등을 역시 일본과 연계를 갖고 있는 인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일본당국은 1913년 가을부터 한인내에서의 갈등을 활용하기 시작하여 간민회를 반대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농민회를 조직하였다.323)
1913년 말 간민회는 호구조사원들을 각 한인마을에 파견하여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간민회는 가호 당 30전을 거두어 들였는데, 중국경찰이 간민회 호구조사원들을 동행했다. 이 때 농무계와 공교회가 간민회를 반대하기 위하여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은 연길과 길림의 중국당국에 이동춘·김립·도성 등 간민회 간부들을 비판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들 진정서에서 밝힌 간민회의 비행은 간민회의 사숙개량회 해산(1912년 9월), 공교회 회원 구타, 간민교육회 회장 이동춘의 공금횡령, 간민회 가입을 원하지 않은 농민들에 대한 추방위협, 호구조사시 30전의 강제징수, 공교회 집회의 해산과 회원 구타(1913년 11월) 등이었다.324)
최남기·홍자문 등 농무계 지도자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간민회를 반대하고 중국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집회를 조직하였다. 1914년 1월 7일, 농무계 지도자들의 선동에 의하여 연길에 집결한 2천여 명의 한인농민들은 간민회 핵심간부들을 죽이고 회관을 불사르겠다고 위협하였으며, 간민회가 30전을 징수하는 것을 금할 것을 요구하였다. 60명의 중국경찰과 100명의 군인들에 의하여 집회에 참가한 대부분의 농민은 해산되었고, 300명이 체포되었다. 중국당국의 조사 결과, 대부분의 농민들이 분명한 목표없이 나왔으며 30전 징수에 반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농무계 간부 홍자문은 간민회 간부들의 비행을 입증할만한 증거를 제시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중국당국은 간민회의 30전 징수를 금하였다.325)
1914년 2월 4일 간민회는 총회를 개최하고 농무계의 1월 7일 사건에 대한 사후대책을 논의하였다. 총회는 친일적인 ‘불순분자’의 침투와 분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입회원의 자격요건을 강화하였다. 총회는 새로이 간부들을 선출하였는데, 이동춘·김립·도성 등 농무계와 공교회의 공격대상이었던 인물들이 배제되었다.326)
총회 얼마 후에 간민회는 입적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1만여 명이 참가한 대중집회를 조직하였다. 이 집회에서 이동춘과 김립이 북경에 파견될 한인대표로 선출되었고, 이들은 북경에 가서 원세개를 만났다. 원세개는 내무부에 한인들의 중국입적을 지원할 것을 명하였다. 이들은 북간도로 귀환하여 대대적인 중국입적을 준비하였으나, 얼마 후에 있은 간민회의 해산으로 좌절되었다.327) 1914년 3월 14일, 동남로관찰사인 도빈은 자치적인 성격을 가진 모든 단체를 해산하라는 원세개의 명령에 따라 간민회와 농무계를 해산하였다.328)
이러한 중국당국의 간민회와 농무계 해산은 일본의 외교적 압력에 따른 것이었다. 1914년 1월 7일의 농무계사건 이후 일본의 한신문이 간민회가 한인의병세력 및 중국과 러시아당국의 지원을 받아 북간도 용정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고 모든 일본인과 친일적 한인들을 처형한 후 2월 또는 3월 북한지방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보도하였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권업회 기관지인≪권업신문≫, 2월 15일자는 이러한 보도가 간민회를 파괴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결국 용정의 일본영사관은 간민회와 농무계가 조선에서의 일본통치에 나쁜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동남로관찰사인 도빈에게 이 두 단체의 해산을 요구하였던 것이다.329)
해산후에도 간민회와 농무계 두 단체는 중국당국을 상대로 한 상호비방을 계속하였다. 양측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하여 도빈은 연길·화룡·왕청 3개 현의 知府들에게 간민회에 대한 농무계의 고발내용을 조사하고 두 단체 대표들을 인터뷰할 것을 명령하였다. 3개 현 지부들은 최종보고서에서 농무계의 간민회 고발내용은 사실무근이며, 농무계가 일본인들과 협력하였다는 소문 역시 사실이 아니다고 결론지었다.330)
309) | 간민회발기인은 간민교육회 회장인 이동춘을 비롯하여, 具春先·鄭在冕·柳基淵·金立·張基泳·李鏞·都成·鄭昌贇·白玉甫 등 25명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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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0) | <墾民會組織總會召集通知書>. |
311) | ≪신한민보≫, 1913년 9월 5일. |
312) | <이동휘-안창호편지(1914년 1월 7일)>(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도산 안창호 자료집≫1, 1990, 이하≪도산자료집≫으로 약함), 400쪽. <이동휘-안창호편지(1914년 2월 23일)>(≪도산 안창호 자료집≫2), 298쪽. |
313) | 四方子,<北墾島 그 過去와 現在>(≪獨立新聞≫, 1920년 1월 1일). |
314) | Byung Yool Ban, op.cit., pp. 166∼167. |
315) | 朴哲周,<대지의 성좌>(≪박계주전집≫6, 삼영출판사, 1957), 325∼326쪽. |
316) | ≪신한민보≫, 1913년 6월 30일. |
317) | 四方子,<北間島 그 過去와 現在>(≪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 |
318) | 위와 같음. |
319) | 金鼎奎,≪龍淵金鼎奎日記≫中(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497쪽. 이동휘는 김정규에게 6일 후에 만날 것을 제의했지만, 김정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
320) | Byung Yool Ban, op.cit., pp. 169∼170. |
321) | Byung Yool Ban, ibid., pp. 171∼172. |
322) | 金鼎奎, 앞의 책, 503쪽. ≪권업신문≫, 1994년 1월 25일. |
323) | Byung Yool Ban, op.cit., pp. 172∼174. |
324) | Byung Yool Ban, ibid., pp. 174∼175. |
325) | Byung Yool Ban, ibid., p. 176. |
326) | Byung Yool Ban, ibid., p. 177. |
327) | ≪신한민보≫, 1914년 5월 7일. |
328) | Byung Yool Ban, op.cit., p. 178. |
329) | Byung Yool Ban, ibid., pp. 178∼179. |
330) | Byung Yool Ban, ibid., pp. 179∼1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