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2. 해외민족운동1) 만주(1) 북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1. 무단통치체제의 확립
          • 1) 총독지배체제의 형성
          • 2) 조선총독 지배하의 탄압기관
            • (1) 헌병경찰체제
            • (2) 사법기관
            • (3) 군대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1)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수탈기반의 마련
            • (1) 토지조사사업의 전사
            • (2) 토지조사사업의 실시와 그 성격
            • (3)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집적
          • 2) 수탈을 위한 농업정책과 한국농민의 고난
            • (1) 관권의 농사 개입
            • (2) 면화재배의 강요
            • (3) 식민지적 수탈의 강화
            • (4) 몰락 농민의 증가
            • (5) 한국농민의 저항
          • 3) 임야조사사업과 국유림의 창출
          • 4) 광업과 어업의 장악
            • (1) 광업의 장악
            • (2) 어장의 장악
          • 5) 금융·재정의 식민지적 재편
            • (1) 금융의 장악
            • (2) 재정의 재편
          • 6)<회사령>과 기업활동의 억압
            • (1) 한국강점 이전의 일본자본 침투
            • (2)<회사령>의 시행과 기업발흥의 억압
            • (3) 일본자본의 왕성한 침투
            • (4) 노동구조와 노동쟁의
          • 7) 교통·운수·통신의 지배
          • 8) 무역의 대일 종속
        • 3. 식민지 지배체제의 특질
          • 1)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주의
            • (1) 무단통치에 의한 지배체제 구축기(병합∼3·1독립운동)
            • (2) 회유정책에 의한 민족개량화기(3·1독립운동∼중일전쟁)
            • (3) 민족말살을 통한 전시강제동원기(중일전쟁∼패전)
          • 2) 조선 총독의 권력
          • 3) 식민지 통치구조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1)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배경과 경향
            • (1) 배경
            • (2) 국내민족운동의 경향과 특징
          • 2) 의병계열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독립의군부
            • (2) 풍기광복단
            • (3) 민단조합
            • (4) 이증연의 비밀결사
          • 3) 계몽운동계열의 단체
            • (1) 기성볼단
            • (2) 조선국권회복단
            • (3) 조선산직장려계
            • (4) 단천 자립단
            • (5) 영주 대동상점
            • (6) 송죽회
            • (7) 애국창가집 편찬, 배포와 관련된 민족교육투쟁
          • 4) 혁명적 경향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광복회
            • (2) 선명당
            • (3) 흠치교의 비밀결사
            • (4) 청림교의 비밀결사
            • (5) 조선국민회
          • 5)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성격
        • 2. 해외민족운동
          • 1) 만주
            • (1) 북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2) 서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3) 북만 밀산부지역
          • 2) 러시아
            • (1) 러시아혁명 이전의 독립운동
            • (2) 러시아혁명 이후의 독립운동
          • 3) 중국 관내지역
            • (1) 한인의 이주와 한인사회의 형성
            • (2)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 구축
            • (3) 한인단체의 활동과 독립운동의 기반조성
          • 4) 미주
            • (1) 미주 한인사회의 형성과 한인단체의 결성과정
            • (2) 통일연합기관 설치와 독립군기지 개척운동
            • (3) ‘합병’ 반대투쟁과 군인양성운동
            • (4) 국민국가 수립론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설립
          • 5) 일본
            • (1) 1910·20년대 재일 조선인의 상태
            • (2) 191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3) 2·8운동
            • (4) 192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정세
          • 2) 해방과 평등의 새로운 사조 등장
          • 3) 독립운동의 새 기운
          • 4) 국내 상황
            • (1) 식민지 지배의 압박과 고통
            • (2) 식민지 지배의 모순 격화와 민생 피폐
          • 5) 3·1운동의 태동
            • (1) 상해 신한청년단의 활동과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
            • (2) 2·8독립선언
            • (3) 광무황제의 붕어와 인산
        • 2. 3·1운동의 전개
          • 1)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 (1)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 (2)<독립선언서>준비
            • (3)<독립선언서>의 배포와 최후의 회담
          • 2) 3·1운동의 발발
            • (1)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 (2) 만세시위운동의 시작
            • (3) 국내의 만세시위운동
        • 3. 3·1운동의 해외 확산
          • 1) 중국 만주
            • (1) 북간도의 시위운동
            • (2) 서간도의 시위운동
          • 2) 러시아 연해주
            • (1) 러시아혁명과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 (2) 파리 강화회의 대표파견
            • (3) 전로국내조선인회의
            • (4)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의 전개
            • (5) 국내진공 계획과 노인동맹단의 독립운동
          • 3) 미주
        • 4. 3·1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3·1운동에 대한 열강의 반응
            • (1) 중국
            • (2) 미국
            • (3) 영국
          • 2)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 (1) 3·1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 (2)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나. 간민회-공교회·농무계

 1913년 1월 13일, 前 간민교육회 회원들이 중심이 된 25명의 墾民會 발기인들은309) 延吉·和龍·汪淸·琿春 4개현의 百戶長들과 지방유력자들에게 2월 26일에 개최되는 간민회 창립총회에 대한 초청장을 발송하였다. 이 소집통지서에서 발기인들은 간민회가 북간도와 훈춘지역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중화민국의 ‘법률에 저촉치 아니하는 범위’에서 무슨 일이든지 한인의 복리증진을 도모하고, ‘민국정부의 일기관’으로서 정부에 대하여 한인의 생명재산의 보호청구권을 확보하려는 데 있었다.310)

 간민회는 간민교육회와는 대조적으로 중국 지방당국의 관할내에서 북간도 한인들의 자치적인 조직으로서의 정치적 지위를 인정받았다. 또한 간민회는 그 활동의 범위를 연길현에서 북간도 전체(연길·왕청·화룡·훈춘)로 확대하였다. 간민회는 전 延吉知府이자 현 吉林東南路觀察使인 陶彬의 사전승인을 받았다.

 2월 26일의 창립총회에서 간민회가 조직되었고 중국당국에 제출할 승인요청서에 첨부할 규약초안을 통과시켰다. 3월 30일, 중국당국은 간민회의 승인요청을 받아들어 공식 승인하였다. 간민회 중앙총회는 연길현 국자가의 前 간민교육회관에 두었으며, 간민회의 회원자격은 3년 이상 雜居區域에 거주한 남성 한인들에게만 부여하였다.

 이어 1913년 4월 26일 개최된 총회에서 간부들을 선출하였는데 회장에 金躍淵, 부회장에 白玉甫, 총무에 都城, 서기에 朴贊翊 등을 선출하였다. 간민회는 총회에 법률·교육·교섭 등 각 분과 사무를 집행하고, 각 지역에는 지방총회와 지회를 두는 등 자치적 성격을 완비하였다. 회장 김약연은 북간도 한인들간에 존경받는 기독교지도자로서 당시 용정에 있던 명동학교의 교장이었다. 이동춘은 당시 간민교육회에서 설립한 光成學校와 吉新女學校의 교장이었다. 대부분의 총회간부들은 국망을 전후하여 망명한 젊은 애국지사들로서, 3분의 2는 함경도출신이었다. 간민회는 한인마을에 조직활동가들을 파견하여 1913년 5월에는 연길·화룡·왕청 3개 현에 지방총회를 설립하였으며 50호마다 지회를 조직했다.

 1913년 7월 11일, 간민회는 동남로관찰사에게 한인호구조사를 신청하여 중국경찰의 긴밀한 협조를 받아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간민회는 1913년 7월 20일, 700명의 한인과 10명의 중국관리들이 참여한 가운데 연길현 국자가에 새로운 회관의 개관식을 개최하였다. 동남로관찰사인 도빈은 한인과 중국인간의 긴밀한 연대와 한인들에 대한 교육과 실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축하연설을 했다.311)

 간민회와 함께 애국청년들로 조직된 것이 靑年親睦會와 大東協新會였다. 특히 신민회의 자매단체인 靑年學友會에 해당하는 ‘精神團’인312) 청년친목회에서는≪청년≫이란 월간잡지를 발행하였고, 대동협신회에서는 계봉우가 쓴≪중등역사≫와 修身 역사교과서≪吾讐不忘≫등 교과서를 간행함과 동시에 월간잡지≪大震≫(주필:계봉우)을 발행하였다.313)

 중국인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1913년 8월 간민회 회원들이 중심이 된 한인기독교도들은 중국기독교인들과 중한연합전도회를 조직하였다. 전도회의 간부들은 같은 수로 한인과 중국인이 선임되었다. 일본의 방해를 사전에 방지하기 위하여 북간도 각지의 한인교회들을 형식상 중국 기독교교단에 소속시켰다.314)

 간민회는 이동휘·정재면·박찬익 등 3인의 대표를 북경으로 파견하였는데, 이들은 중화민국의 성립을 축하하고 대통령 원세개에게 중국내 한인들의 자치적인 지위 허용을 요청하였다.315) 1913년 중반 무렵, 중국 입적을 신청한 한인들은 약 25만에 달하였다.316)

 간민회는 창립 이후 1914년 3월에 해산되기까지 1년이 채 못되는 동안에, 간도동포에게 “조국정신을 고취하야 사상변천의 일대 신기원”을 이룩한 것으로 평가되었다.317) 이러한 성과는 간민회 간부들의 교육활동이 봉건적 인습과 아집에 빠져 있던 수많은 대중들의 거센 반대를 이겨내면서 이룩해낸 매우 값진 것이었다. 간민회의 교육권장원들은 간민교육회 시절과 마찬가지로, 구타를 당하거나 심지어는 결박을 당하여 간도 용정촌으로 압송되다가 중국관헌의 도움으로 구원되기도 했다.318)

 간민교육회와 마찬가지로, 간민회는 사우계의 완강한 비판에 직면하였다. 사우계는 중국국적 취득, 중국식 의복과 두발 채용과 같은 간민회의 ‘동화정책’을 강력히 비판하고 나섰던 것이다. 金鼎奎를 비롯한 사우계 회원들은 간민교육회나 간민회 회원들과 마찬가지로 1911년의 신해혁명을 환영하였지만, 그것은 공화정을 수립해서가 아니라 만주왕조를 타도하였기 때문이었다, 사우계는 간민회가 일진회와 마찬가지로 한인들의 철저한 중국화를 도모함으로써 독립이란 목적을 상실하고 있다고 비판하였다. 이 점은 간민회의 ‘동화정책’이 중국당국의 비호하에 일본의 개입을 저지하는 데 목적이 있었으며, 궁극적인 목표는 역시 조국의 독립에 있음을 간과한 것이었다.

 간민회 간부들은 유학자들이 자신들의 진의를 오해하고 있었음을 알고 있었고, 상호간에 오해를 해소하기 위한 대화가 필요함을 인식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기독교도들의 수령’인 李東輝가 1913년 8월 10일 김정규에게 편지를 보내어 길신여학교에서 공통의 목표, 즉 조국의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협력방안을 논의하기 위한 회담을 갖자고 요청하였던 것이다.319)

 간민회에 대한 보다 강력한 반발은 오래전에 북간도에 이주한 지주들로부터 왔다. 북간도 전체 한인들을 통합하려는 간민회의 야심찬 정책에 반대하여, 1913년 6월 29일 최남기·한진동·홍자문·위영인 등은 300명을 회원으로 하는 農務契를 조직하였다. 농무계는 그 목표를 간민회 파괴에 두고, 회원을 주로 간민회가 북간도 한인사회에 해악을 가져온다고 믿는 舊이주민들과 유학자들 가운데서 충원하였다. 사우계의 유학자들이 간민회의 ‘동화정책’과 근대적 신교육에 반대한 데 대하여, 농무계는 간민회가 정치적으로 북간도 한인의 자치조직의 지위를 갖는 데 크게 반발하였던 것이다.320)

 중국당국과 간민회는 농무계 지도자들인 최남기·홍자문·남철붕·한진동 등을 일본의 첩자라는 의구심을 갖고 있었다. 일본당국이 농무계의 反간민회 정책을 활용하려는 데서 그러한 의혹을 더했다. 친일적인 입장에 있었던 일부 지도자들과는 달리 대부분의 농무계 회원들은 ‘완고하고 무식한 농민들’이었다. 그러나 이들 농민들은 일본당국에 의하여 이용될 가능성이 있었다.321)

 한편, 康有爲가 이끄는 북경의 孔敎會 활동에 자극받은 북간도 사우계의 한인유학자들은 1913년 11월 29일 공교회 연길지회를 조직하였다. 연길 국자가에 집결한 386명의 한인유학자들은 간민회의 신교육과 동화정책에 대한 반대입장을 선언하고 간부들을 선출하였다. 이들은 공교회가 중국정부에 의하여 공인된 조직임에 반하여 간민회는 길림의 지방당국자에 의하여 승인된 데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였다.322)

 간민회는 공교회 역시 농무계와 같은 목적을 갖고 있다고 보았다. 즉, 중앙정부의 승인에도 불구하고, 중국 지방당국은 서당을 재건하고 근대적 학교들의 활동을 방해하고 있는 공교회 회원들의 활동을 금지하고 처벌해야 한다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특히 공교회 용정지회는 일본영사관의 통제를 받는 친일조직으로 알려져 있었다. 중국당국은 공교회 연길지회 간부인 정안립이나 박의풍 등을 역시 일본과 연계를 갖고 있는 인물로 간주하고 있었다. 일본당국은 1913년 가을부터 한인내에서의 갈등을 활용하기 시작하여 간민회를 반대하기 위한 조직으로서 농민회를 조직하였다.323)

 1913년 말 간민회는 호구조사원들을 각 한인마을에 파견하여 호구조사를 실시하였다. 간민회는 가호 당 30전을 거두어 들였는데, 중국경찰이 간민회 호구조사원들을 동행했다. 이 때 농무계와 공교회가 간민회를 반대하기 위하여 협력하기로 합의하였다. 이들은 연길과 길림의 중국당국에 이동춘·김립·도성 등 간민회 간부들을 비판하는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들 진정서에서 밝힌 간민회의 비행은 간민회의 사숙개량회 해산(1912년 9월), 공교회 회원 구타, 간민교육회 회장 이동춘의 공금횡령, 간민회 가입을 원하지 않은 농민들에 대한 추방위협, 호구조사시 30전의 강제징수, 공교회 집회의 해산과 회원 구타(1913년 11월) 등이었다.324)

 최남기·홍자문 등 농무계 지도자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 간민회를 반대하고 중국당국에 항의하기 위한 집회를 조직하였다. 1914년 1월 7일, 농무계 지도자들의 선동에 의하여 연길에 집결한 2천여 명의 한인농민들은 간민회 핵심간부들을 죽이고 회관을 불사르겠다고 위협하였으며, 간민회가 30전을 징수하는 것을 금할 것을 요구하였다. 60명의 중국경찰과 100명의 군인들에 의하여 집회에 참가한 대부분의 농민은 해산되었고, 300명이 체포되었다. 중국당국의 조사 결과, 대부분의 농민들이 분명한 목표없이 나왔으며 30전 징수에 반대하지 않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농무계 간부 홍자문은 간민회 간부들의 비행을 입증할만한 증거를 제시하는 데 실패하였다. 그러나 중국당국은 간민회의 30전 징수를 금하였다.325)

 1914년 2월 4일 간민회는 총회를 개최하고 농무계의 1월 7일 사건에 대한 사후대책을 논의하였다. 총회는 친일적인 ‘불순분자’의 침투와 분란을 방지하기 위하여 신입회원의 자격요건을 강화하였다. 총회는 새로이 간부들을 선출하였는데, 이동춘·김립·도성 등 농무계와 공교회의 공격대상이었던 인물들이 배제되었다.326)

 총회 얼마 후에 간민회는 입적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1만여 명이 참가한 대중집회를 조직하였다. 이 집회에서 이동춘과 김립이 북경에 파견될 한인대표로 선출되었고, 이들은 북경에 가서 원세개를 만났다. 원세개는 내무부에 한인들의 중국입적을 지원할 것을 명하였다. 이들은 북간도로 귀환하여 대대적인 중국입적을 준비하였으나, 얼마 후에 있은 간민회의 해산으로 좌절되었다.327) 1914년 3월 14일, 동남로관찰사인 도빈은 자치적인 성격을 가진 모든 단체를 해산하라는 원세개의 명령에 따라 간민회와 농무계를 해산하였다.328)

 이러한 중국당국의 간민회와 농무계 해산은 일본의 외교적 압력에 따른 것이었다. 1914년 1월 7일의 농무계사건 이후 일본의 한신문이 간민회가 한인의병세력 및 중국과 러시아당국의 지원을 받아 북간도 용정의 일본영사관을 습격하고 모든 일본인과 친일적 한인들을 처형한 후 2월 또는 3월 북한지방으로 진격할 것이라고 보도하였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톡 신한촌의 권업회 기관지인≪권업신문≫, 2월 15일자는 이러한 보도가 간민회를 파괴하려는 일본인들에 의하여 조작된 것이라고 비판하였다. 결국 용정의 일본영사관은 간민회와 농무계가 조선에서의 일본통치에 나쁜 영향을 끼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하면서 동남로관찰사인 도빈에게 이 두 단체의 해산을 요구하였던 것이다.329)

 해산후에도 간민회와 농무계 두 단체는 중국당국을 상대로 한 상호비방을 계속하였다. 양측의 충돌을 해결하기 위하여 도빈은 연길·화룡·왕청 3개 현의 知府들에게 간민회에 대한 농무계의 고발내용을 조사하고 두 단체 대표들을 인터뷰할 것을 명령하였다. 3개 현 지부들은 최종보고서에서 농무계의 간민회 고발내용은 사실무근이며, 농무계가 일본인들과 협력하였다는 소문 역시 사실이 아니다고 결론지었다.330)

309) 간민회발기인은 간민교육회 회장인 이동춘을 비롯하여, 具春先·鄭在冕·柳基淵·金立·張基泳·李鏞·都成·鄭昌贇·白玉甫 등 25명이다.
310)<墾民會組織總會召集通知書>.
311)≪신한민보≫, 1913년 9월 5일.
312)<이동휘-안창호편지(1914년 1월 7일)>(독립기념관독립운동사연구소,≪도산 안창호 자료집≫1, 1990, 이하≪도산자료집≫으로 약함), 400쪽.

<이동휘-안창호편지(1914년 2월 23일)>(≪도산 안창호 자료집≫2), 298쪽.
313) 四方子,<北墾島 그 過去와 現在>(≪獨立新聞≫, 1920년 1월 1일).
314) Byung Yool Ban, op.cit., pp. 166∼167.
315) 朴哲周,<대지의 성좌>(≪박계주전집≫6, 삼영출판사, 1957), 325∼326쪽.
316)≪신한민보≫, 1913년 6월 30일.
317) 四方子,<北間島 그 過去와 現在>(≪독립신문≫, 1920년 1월 1일).
318) 위와 같음.
319) 金鼎奎,≪龍淵金鼎奎日記≫中(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1994), 497쪽. 이동휘는 김정규에게 6일 후에 만날 것을 제의했지만, 김정규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320) Byung Yool Ban, op.cit., pp. 169∼170.
321) Byung Yool Ban, ibid., pp. 171∼172.
322) 金鼎奎, 앞의 책, 503쪽.

≪권업신문≫, 1994년 1월 25일.
323) Byung Yool Ban, op.cit., pp. 172∼174.
324) Byung Yool Ban, ibid., pp. 174∼175.
325) Byung Yool Ban, ibid., p. 176.
326) Byung Yool Ban, ibid., p. 177.
327)≪신한민보≫, 1914년 5월 7일.
328) Byung Yool Ban, op.cit., p. 178.
329) Byung Yool Ban, ibid., pp. 178∼179.
330) Byung Yool Ban, ibid., pp. 179∼180.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