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2. 해외민족운동1) 만주(1) 북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1. 무단통치체제의 확립
          • 1) 총독지배체제의 형성
          • 2) 조선총독 지배하의 탄압기관
            • (1) 헌병경찰체제
            • (2) 사법기관
            • (3) 군대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1)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수탈기반의 마련
            • (1) 토지조사사업의 전사
            • (2) 토지조사사업의 실시와 그 성격
            • (3)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집적
          • 2) 수탈을 위한 농업정책과 한국농민의 고난
            • (1) 관권의 농사 개입
            • (2) 면화재배의 강요
            • (3) 식민지적 수탈의 강화
            • (4) 몰락 농민의 증가
            • (5) 한국농민의 저항
          • 3) 임야조사사업과 국유림의 창출
          • 4) 광업과 어업의 장악
            • (1) 광업의 장악
            • (2) 어장의 장악
          • 5) 금융·재정의 식민지적 재편
            • (1) 금융의 장악
            • (2) 재정의 재편
          • 6)<회사령>과 기업활동의 억압
            • (1) 한국강점 이전의 일본자본 침투
            • (2)<회사령>의 시행과 기업발흥의 억압
            • (3) 일본자본의 왕성한 침투
            • (4) 노동구조와 노동쟁의
          • 7) 교통·운수·통신의 지배
          • 8) 무역의 대일 종속
        • 3. 식민지 지배체제의 특질
          • 1)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주의
            • (1) 무단통치에 의한 지배체제 구축기(병합∼3·1독립운동)
            • (2) 회유정책에 의한 민족개량화기(3·1독립운동∼중일전쟁)
            • (3) 민족말살을 통한 전시강제동원기(중일전쟁∼패전)
          • 2) 조선 총독의 권력
          • 3) 식민지 통치구조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1)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배경과 경향
            • (1) 배경
            • (2) 국내민족운동의 경향과 특징
          • 2) 의병계열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독립의군부
            • (2) 풍기광복단
            • (3) 민단조합
            • (4) 이증연의 비밀결사
          • 3) 계몽운동계열의 단체
            • (1) 기성볼단
            • (2) 조선국권회복단
            • (3) 조선산직장려계
            • (4) 단천 자립단
            • (5) 영주 대동상점
            • (6) 송죽회
            • (7) 애국창가집 편찬, 배포와 관련된 민족교육투쟁
          • 4) 혁명적 경향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광복회
            • (2) 선명당
            • (3) 흠치교의 비밀결사
            • (4) 청림교의 비밀결사
            • (5) 조선국민회
          • 5)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성격
        • 2. 해외민족운동
          • 1) 만주
            • (1) 북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2) 서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3) 북만 밀산부지역
          • 2) 러시아
            • (1) 러시아혁명 이전의 독립운동
            • (2) 러시아혁명 이후의 독립운동
          • 3) 중국 관내지역
            • (1) 한인의 이주와 한인사회의 형성
            • (2)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 구축
            • (3) 한인단체의 활동과 독립운동의 기반조성
          • 4) 미주
            • (1) 미주 한인사회의 형성과 한인단체의 결성과정
            • (2) 통일연합기관 설치와 독립군기지 개척운동
            • (3) ‘합병’ 반대투쟁과 군인양성운동
            • (4) 국민국가 수립론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설립
          • 5) 일본
            • (1) 1910·20년대 재일 조선인의 상태
            • (2) 191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3) 2·8운동
            • (4) 192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정세
          • 2) 해방과 평등의 새로운 사조 등장
          • 3) 독립운동의 새 기운
          • 4) 국내 상황
            • (1) 식민지 지배의 압박과 고통
            • (2) 식민지 지배의 모순 격화와 민생 피폐
          • 5) 3·1운동의 태동
            • (1) 상해 신한청년단의 활동과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
            • (2) 2·8독립선언
            • (3) 광무황제의 붕어와 인산
        • 2. 3·1운동의 전개
          • 1)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 (1)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 (2)<독립선언서>준비
            • (3)<독립선언서>의 배포와 최후의 회담
          • 2) 3·1운동의 발발
            • (1)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 (2) 만세시위운동의 시작
            • (3) 국내의 만세시위운동
        • 3. 3·1운동의 해외 확산
          • 1) 중국 만주
            • (1) 북간도의 시위운동
            • (2) 서간도의 시위운동
          • 2) 러시아 연해주
            • (1) 러시아혁명과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 (2) 파리 강화회의 대표파견
            • (3) 전로국내조선인회의
            • (4)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의 전개
            • (5) 국내진공 계획과 노인동맹단의 독립운동
          • 3) 미주
        • 4. 3·1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3·1운동에 대한 열강의 반응
            • (1) 중국
            • (2) 미국
            • (3) 영국
          • 2)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 (1) 3·1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 (2)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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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간도지역의 민족운동
가. 한민교육회·간민교육회-사우계

 북간도지역은 19세기 후반 이래 함경도 농민들이 대거 이주해와 이미 상당한 규모의 한인사회가 형성되어 있었다. 1910년 일제의 강압적인 국망 이후 이 곳으로 대거 망명해온 민족운동가들은 학교와 교회를 설립하고, 신문과 잡지를 발간함으로써 근대적인 민족교육을 통하여 유력한 독립운동근거지로의 변화를 도모하였다.

 북간도지역에서의 최초의 민족운동조직은 1909년 9월의<間島協約>체결 직후에 이루어졌다.<간도협약>의 체결로 일본은 오랫동안 한·청간에 분쟁이 되어온 간도영유권을 청국에 넘겨주는 대신에(1조), 龍井村·局子街·頭道溝·百草溝 4개 지역의 거주와 무역을 위한 개방, 吉會敷設權(吉林線을 會寧까지 연장한 철도, 6조) 등 이권과 한인들의 재판에 대한 법정입회권을 받아냈다.<간도협약>은 한인들의 지위에 관한 중요한 조항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간도지역에서의 거주권(3조)·토지가옥소유권(5조)의 권리를 받아내는 대신, 재판·납세의무 등 청국의 행정처분을 받도록 되었다. 이처럼 일제는 간도지역의 한인은 ‘한국臣民’으로서 외국인에게 금지되어 있는 諸권리들을 인정받도록 하였다고 평가했으나, 한인들이 청국에 귀화하지 않은 한 통감부 임시파출소(1907년 8월)를 뒤이은 일본영사관 및 분소의 설치를 통하여 한인에 대한 직접통제권을 주장할 수 있는 법률적 근거를 마련하였던 것이다.297)

 민족운동가들은<간도협약>의 이러한 독소적 조항에 반발하였다. 瑞甸書塾과 明東書塾의 중심인물이었던 기독교신자 朴茂林(朴楨瑞)이<간도협약> 체결 직후 당시 延吉知府 陶彬의 통역관이었던 李同春의 협력으로 청국관청의 승인을 얻어 韓民自治會를 조직한 것이다.298) 이 한민자치회는 연길현 국자가에 사무소를 두었는데, 그 “內密과 體制가 完備하야 我民의 歸依할만한 단체”였다.299)

 그러나 한민자치회는 일본의 항의를 받은 청국의 명령으로 해산되고 말았다. 청국 역시 간도지역에서 한인들의 독자적인 세력이 지나치게 강화되는 것을 우려하여 주동자인 李鳳雨·尹海 등의 찬동을 받아 1910년 3월, 한인자제들의 교육을 목적으로 한 韓民敎育會300)를 조직케 하였다. 한민교육회는 북간도 한인동포의 자치권 확보를 추구했던 한민자치회 관계자들과 일본의 외교적 압력을 무시할 수 없었던 청국 당국자간의 타협적 산물로서, 그 이면에는 일본세력의 확대저지라고 하는 공통적인 목표가 깔려 있었다. 그리하여 당시 일제관헌은 한민교육회를 한민자치회의 ‘化身’으로 파악했던 것이다.301)

 한민교육회는 한인들로부터 기금을 모집하고 延吉縣의 20개 구역마다 보통소학교의 설치를 추진하였다. 또한 한민교육회는 중국의 지방당국자들과의 협력관계를 강화하기 위하여, 1910년 6월 자체내에 硏究會를 조직하였다. 연구회는 청국이 ‘조선인에 대한 시정상의 기관’으로 간주하였으며, 청국 지방관에게 한인통치에 관한 각종의 조사보고와 통치에 관한 의견 등을 건의케 하였다. 아울러 교육회는 한인들 가운데 청국의 ‘腹心의 인물’들을 양성하기 위한 기관으로 교육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민교육회 회장과 부회장에는 이동춘과 윤해가 각각 선출되었고, 연구회 회장으로는 이봉우가 선출되었다. 교육회는 각지에 교육회원을 파견하여 학교 설립과 자금모집에 전력을 기울였다. 1910년 9월, ‘한일합병’ 직후 한민교육회는 조직명칭을 서둘러 墾民敎育會로 바꾸었다. 이러한 명칭변경은 ‘韓’을 ‘墾’으로 바꾼 데 불과하지만, ‘한일합병’ 이후 일본이 ‘대한제국의 신민’은 곧바로 ‘일본의 신민’이 되었다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정치적인 고려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간민교육회는 한인들에게 중국국적 취득을 적극 권장하는 정책을 취했다. 청국의 지지를 배경으로 합법적이고 공개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함이었다. 같은 맥락에서 연구회는 ‘한일합병’ 직후인 9월 이후에는 도빈 지부의 지시에 따라 위원을 각지에 파견하여, 항일유세를 하게 하는 한편, ‘薙髮易服, 辨髮淸裝’을 권유하였다.302) 또한 연길현 局子街의 교육회내에 模範學堂을 설립하여 초등학교 과정과 교원양성과정을 설치했다. 모범학당은 한인자제들을 청국식으로 교육하는 관립학교로서, 북간도 한인학교의 모델 역할을 했다.

 간민교육회에는 1909년 말 이후 1910년에 걸쳐 망명한 반일적인 진보적 인물들, 특히 일제관헌에 의하여 ‘排日黨의 소굴’로 지목되고 있던 서북학회 회원들이 대거 회원으로 참여함으로써 점차 세력을 확장하였다. 그리하여 간민교육회는 1911년 2월경에는 북간도 전지역에 걸쳐 200여 명에 달하는 회원을 확보하기에 이르렀다.303)

 당시 간민교육회의 중심인물은 회장 이동춘을 비롯하여 부회장 윤해·朴贊翊 등은 이동휘와 가까운 인물들이었다. 최근에 1911년 초 이동휘의 북간도 방문을 전후하여, 이동휘가 기독교전도와 교육활동을 위하여 불러들인 이동휘의 ‘교육생’ 30여 명이 교육회 회원으로서 맹활약하였다.304) 회원은 기독교인들이 중심이었지만, 박찬익·백순·현천묵과 같은 대종교도들도 참여하였다. 특히 회장인 이동춘은 20년전에 국내로부터 북간도에 이주해 온 재산가이자 애국지사로서 한인간에 명망이 높았다. 그는 청국당국의 한인관련 고문 겸 통역으로서, 국자가의 모범학당에서 중국어를 가르치는 등 청국 지방관들과 한인들간의 교섭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간민교육회는<간도협약>과 ‘한일합병’ 이후 한인들을 ‘일본의 신민’이라고 강변하며 관할권을 확보하려는 일본에 맞서 반일적 애국지사들이 청국의 보호하에서 교육을 표방하고 북간도 한인사회를 결집하기 위한 조직이었다. 청국 연길지부와 간민교육회간에 합의·제정된 것으로 보이는 간민교육회의<普通條約>과<秘密條約>에 따르면, 간민교육회는 비록 청국의 지방관에 부속하고 활동상황을 보고하도록 되어 있으나, 간부들은 청국의 지방관과 같은 예우를 받게 되어 있었다. 뿐만 아니라 교육회는 한인자제들에 대한 의무교육을 실시하고, 한인소유의 교육기관(학당·사숙)들에 대한 관할권을 확보하는 등 자치적 성격까지 구비하게 되었다. 이러한 바탕에서 간민교육회는 창립 이후 중국 지방당국의 ‘원만한 찬동’을 얻었을 뿐만 아니라, 1910년 9월 10일에는 “墾北移民의 최유력자로 결성된 72형제파에서 회관을 사서 기부”하는 등 동포들의 적극적인 후원을 받았다. 그리하여 간민교육회는 간도각지에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를 파견함으로써 반일계몽운동을 추진할 인재양성에 주력하며, 후일의 북간도 민족운동의 기초를 쌓았던 것이다.305) 간민교육회는 매월≪月報≫를 발행하여 북간도는 물론, 노령 연해주와 미주지역 등 다른 지역의 한인들에게도 배포하였다.

 간민교육회 회원들은 근대적인 교육과 기독교를 전파하고, 청국의 의복과 머리모양을 한 때문에, ‘維新派’·‘신학패’ 또는 ‘新輩’로 불렸다. 또한 반대파들은 이들을 냉소적인 의미가 담긴 ‘薙髮패’라 부르기도 했다.

 간민교육회의 활동이 북간도 한인들에게 전적으로 환영받았던 것은 아니다. 이들 교육회 회원들이 근대적 교육에 적대적인 농민들의 반발로 농촌으로부터 축출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심지어는 보수적인 한인들이 교육권유차 방문한 교육회 회원들을 구타하거나 잡아서 용정에 있는 일본영사관에 넘겨주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던 것이다.

 간민교육회에 대한 강력한 저항은 전통적인 유학자들로부터 왔다. 이들은 1908년 여름 함경북도 경성에서 항일의병투쟁을 이끈 바 있는 金貞奎·池章會·車鎬均 등이었다. 노령 연해주의 ‘한일합병’ 반대투쟁의 지도자인 柳麟錫·李南基와 가까운 인물들로, 이들은 1908년 말에서 1909년 중반에 이르는 시기에 북간도지역으로 망명하였던 것이다. 이들은 간민교육회와 이를 후원하는 청국 지방당국의 정책에 강력히 반발하였다. 이들은 간민교육회의 서구적이며 기독교적인 근대교육과 중국 입적 장려 및 ‘치발역복 변발청장 정책’에 반대하였다. 특히 청국당국이 간민교육회에 전통적 교육을 행하고 있는 자신들의 私塾을 폐지할 권한을 부여한 데 대하여 큰 위기감을 갖고 있었다. 鄭安立·김정규·차호균·지장회 등 24명의 유학자들은 私塾改良會를 발기하였다. 이들은 발기문에서 사숙을 개량함으로써 ‘신학패’들의 탄압을 피하며 유학경전 강독에 의한 유학교육을 견지할 것을 선언하였다. 1912년 9월에 개최된 창립총회에서 이들 유학자들은 사숙개량회는 근대적 교육을 반대하고 전통적인 사숙을 옹호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신학패’들로부터 북간도지역의 교육 주도권을 빼앗기 위한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을 선언하였다.306)

 그러나 이 사숙개량회의 창립총회는 중국당국의 사전허가를 얻지 못하였다. 더구나 간민교육회는 창립총회 의장이었던 南哲朋 등 그 지도자들이 친일조직인 일진회 회원이라는 사실을 비판하였고, 중국 지방당국 역시 이들 배후에 일본당국이 있다는 의구심에서 그 해산을 명령하기에 이르렀다. 중국지방당국의 공인획득에 실패한 사숙개량회 주도자들은<呂氏鄕約>에 기초한 유학이념의 옹호라는 목표를 가진 비밀조직 士友契를 조직하였다. 사우계는 비밀리에 회원을 확충한 결과 1913년 가을에는 100여 명의 회원을 확보하였다.307)

 간민교육회에 대한 보다 체계적이고 강력한 파괴공작은 일제당국에 의하여 진행되었다. 조선총독부와 간도 일본총영사관은 일진회 회원인 이희덕·최남기 등에 대한 재정적 지원과 지도를 통하여 朝鮮人會를 조직하였다. 조선인회는 한인들을 중국당국의 보호로부터 떼어내어 “조선인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하고, 궁핍한 인민들을 구제한다”는 목표를 내세웠다. 조선인은 또한 간민교육회가 북간도의 한인사회에 분쟁을 야기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일본당국 역시 조선인소학교·서당·노인회·불당·일진회의 종교인 侍天敎에 자금을 지원함으로써 조선인들의 친일화를 도모하였다.308)

 현재 간민교육회가 언제 어떻게 해산되었는가는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남아 있지 않다. 간민교육회가 내부적으로 지방파쟁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일본당국의 외교적 압력을 받은 중국당국의 명령으로 해산된 것만은 확실하다.

297) 金正柱,≪朝鮮統治史料≫1(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0), 248∼254쪽.
298)<局子街墾民敎育會ニ關スル件(1911. 2. 13)>(≪日本外務省文書≫, MT.11259), 163∼164쪽.
299) 尹政熙,<間島開拓史>(≪한국학연구≫3집-별집, 인하대 한국학연구소, 1991년 3월), 22쪽.
300) 계봉우가 후일 ‘墾北集會의 鼻祖’로 평가했던 墾民敎育會는 엄격히 말하면, 이 韓民敎育會를 지칭하는 것이다(四方子,<北墾島 그 過去와 現在>(≪獨立新聞≫, 1920년 1월 1일).
301)<局子街墾民敎育會ニ關スル件(1911.2.13)>(≪日本外務省文書≫, MT.11259), 163∼164쪽.
302)<延吉敎育會及硏究ノ行動ニ關スル情報(1910. 10. 31)>(≪日本外務省文書≫, MT. 11259), 56∼59쪽.
303)<局子街墾民敎育會ニ關スル件(1911. 2. 13)>(≪日本外務省文書≫, MT.11259), 160∼162쪽.

<局子街墾民敎育會員ノ學校設立ニ關スル件(1911. 5. 2)>(MT.11259), 221쪽.
304) 국사편찬위원회,≪韓國獨立運動史≫2(1983), 544∼545쪽.
305) 四方子,<北墾島 그 過去와 現在>(≪獨立新聞≫, 1920년 1월 1일).
306) Byung Yool Ban(반병률),<Korean Nationalist Activities in the Russian Far East and North Chientao, 1905∼1921>(Ph. D. Dissertation, University of Hawaii, 1996), pp. 159∼160.
307) Byung Yool Ban, ibid., pp. 160∼161.
308) Byung Yool Ban, ibid., pp. 161∼162.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