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1920년대의 상태
1920년대 재일조선인의 도일은 식민지 조선에 대한 일본의 식민지 경제정책이 주요한 배경을 이룬다.
1920년대 국내의 이농민들은 농촌과 도시 노동시장의 수용능력 부족으로 대부분이 농촌노동력이나 도시노동력으로 수용되지 못하는 상황 속에서 도시 실업자로 유리걸식하거나 국외 이주를 통해 활로를 찾고자 했다. 또한 이농민 전업화 여부와 관계없이 국내에서 보다 더 많은 노동임금을 위해 도일을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러한 조선인의 도일은 1910년대와 마찬가지로 철저히 일본제국주의의 필요에 따라 진행되었다. 1922년 12월 여행증명제도가 철폐되고 1923년에는 ‘도항증명제’가 실시되었다. 일본 경제는 1923년경부터 만성적 공황상태에 빠지게 되었고 이에 따라서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단체모집이 허가되지 않았다.531) 그러나 1923년 관동대지진 때의 파괴된 시가지의 복구를 위해 노동력이 요구되자 일본 정부는 ‘도항증명제’를 폐지했다.532) 그러나 일본 경제의 상황이 악화되자 내무성은 1925년 8월 도일을 제한해 달라는 요청을 했고 연이어 조선인 노동자의 실업문제가 야기되어 1925년 10월부터 도항저지(제한)가 실시되었다.533)
이후 1928년 7월 조선총독부는 도일허가조건을 까다롭게 하여 지참금을 60엔 이상 소지하고 노동브로커의 모집에 의한 것이 아닌 조선인의 도일만 허용했다. 1927년 3월 일본 경제는 금융공황으로 큰 타격을 받게 되었고 1929년 세계공황에 의해 보다 심화되자 일본 기업의 조선인 노동자 단체 모집은 제한되고 재도일증명서제로 도일은 보다 통제되었다.
1920년대 재일조선인의 대다수는 교토(京都)·오사카·고베(神戶)지역에 거주했다. 이 지역에 재일조선인이 많이 거주한 원인은 상공업 중심지로 노동력의 수요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특히 관동대지진 이후 조선인 노동자가 증가했다.
1920년대 중반이 되면 오사카·동경 중심으로 인구집중현상이 보인다. 오사카와 동경지역은 일본 경제의 중심지역으로 노동시장의 요구가 일본내에서 가장 높았던 곳이다. 도일한 조선인이 이 두 지역으로 몰리게 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나고야(名古屋)에 조선인이 증가하기 시작한 것은 1920년대 후반으로 이 지역에서도 산업·교통의 중심 도시였던 나고야에 가장 많이 거주했다. 특히 이곳에 조선인 인구가 증가한 원인은 나고야가 게이신(京濱)·한신(阪神)에 다음가는 3대 산업지역의 하나로 발전한 것과 1925년부터 시작된 실업구제사업 실시 때문이었다.
교토지역에서는 오사카·나고야와 달리 일용노동자가 적었다. 이곳에는 1925년 경우 직공이 인부의 수보다 다수를 차지했다. 주로 염색·방적·나염의 직공·심부름꾼·잡역 등으로 노동했다.534)
재일조선인 노동자는 1920년대 직공과 광부·토건인부가 되었다. 1926년에 완성된 阪神國道 보수공사에는 연인원 백수십만 명이 동원되었으며 그 중 1/3은 조선인이었다. 특히 실업구제사업이 실시됨에 따라 도시에 집중되어 있던 재일조선인 노동자가 지방의 토목공사장으로 이동하여 노동했다.535) 이와 함께 조선인 노동자들이 건강하다는 미명 아래 광산에서도 가장 힘들고 어려운 채탄작업에 집중배치되었다.
재일조선인은 경기변동에 직면하여 항상 먼저 희생이 되어 실업상태에 빠졌다. 조선인 일일노동자의 고용도 불안정했다. 1925년의 한 조사에 의하면 전체 재일조선인 노동자의 약 3%가 실업상태에 있었는데 그 가운데 일일노동자의 경우는 19.7%의 실업율을 나타냈다. 특히 건설노동자의 경우 겨울 동안 대부분 휴직상태에 있었다. 일본 정부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이들 조선인의 실업문제는 어디까지나 부차적인 것이었으며 재일조선인의 지위는 최하층 노동자로 상징되었다.
이주자가 급속히 늘어난 1920년 전후 조선인 마을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조선인 마을은 조선인에 의한 自衛의 장소로 ①함바(飯場), 회사의 사택에 거주하기 시작하여 이곳을 거점으로 조성된 경우, ②토지 소유자가 명확하지 않은 저지대·습지대·하천부지 등에 자력으로 임시건물을 지으면서 조성된 경우, ③일본인이 주거하지 않는 집에 거주하면서 형성된 경우, ④아파트·연립주택 등을 빌어 집단으로 거주하면서 형성된 경우 등이 있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을내에는 조선음식점과 재료가게가 생겨나게 되었고 조선말만으로도 충분히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