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 2·8운동 이후의 재일조선인 민족운동
2·8운동 주도세력은 3·1운동 때의 초기 주도세력과 달리 강경한 입장에서 끝까지 투쟁할 것을 결의했다.
한편 재일유학생의 구심으로 2·8운동 시기 다수가 가담했던 학우회는 투쟁의 과정에서 조직이 일부 와해되었다. 그러나 이후 재건이 진행되었는데, 1919년 10월 11일 학우회는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임시총회를 열고, 회장에 김달호, 총무에 김준연을 중심으로 새롭게 조직을 정비했다.
일부의 유학생들은 역원구성에 불만을 품고 學友會學生同盟會를 조직하기도 했다. 다시 중앙조직은 개편되어 1920년 6월 회장에 김준원, 총무에 卞熙瑢, 서기는 이창근이 담당했다. 그리고 외사부장에 고지영, 서무부장에 朴衡秉, 편집부장에 박석윤, 변론부장에 이긍종이 각각 임명되었다.
이렇듯 2·8운동은 학우회와 조선청년독립단에 의해 주도되었고, 그 투쟁의 과정 속에서 단련된 대부분의 청년·학생들은 몇몇을 제외하고는 지속적인 반일투쟁의 선봉에 서게 되었다.
이후 2·8운동의 주체는 다양한 위치에서 각각 다른 형태로 반일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최원순은 국내로, 이광수·최근우·이봉수·손두환·주요한·안승모·류경환·윤창만·오의선·윤보선·고의봉·황환·정근모·정병모 등은 상해로 갔다.548) 특히 재일유학생의 반일투쟁은 2·8운동이 일어난 이후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갔다. 1919년 2·8운동 이후 일본 유학생들은 재일조선인 내부에 들어가 이들을 계몽하고 각성시켜서 상호부조와 노동조건의 개선을 위해 헌신했다.549)
가) 동경지역
2·8운동의 다음날인 2월 9일 麴町區 中六番町 조선총독부에서 관할하는 기숙사에서는 서춘·이종근·최승만·김항복 등이 동맹퇴사를 모의하고 80여 명의 기숙사생의 총퇴사 단행을 성공시켰다.550) 이날 기숙사 입구 앞뜰에서 전 기숙사생이 모여 총퇴사를 결의하고, 한 사람의 이의도 없이 박수로 투쟁을 준비했다.
제2차 2·8운동 계획도 있었다. 유학생들은 2·8운동 3, 4일 후에 日比谷공원 광장에서 제국의회에 독립을 청원하고 후임임원을 선출하기 위해 전유학생대회를 열고, 회장에 이달을 선출하여551) 기만과 위협으로 무단정치를 자행하는 일본을 규탄하고 조선독립을 선포하는<선전문>을 작성하여 뿌리거나 선동연설을 하기로 했다.<선전문>은 1919년 2월 12일 최승만이 작성하고, 변희용·장인환·강종섭·최재우·최승만이 서명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고 말았다.552)
또한 유학생들은 2월 23일 2·8독립선언에서 요구한 민족대회 소집을 촉진하기 위한 집회553)와 시위를 계획했고, 변희용·최재우·강종섭·최승만·장인환 등은 검속되었다. 이후 2·8운동의 주체는 지역적·성적·출신성분적 차별성에 따라 각기 다른 형태로 반일운동에 헌신하게 된다. 특히 조선에서 3·1운동이 발발하자 동경의 재일유학생들은 3월 9일 재동경조선청년독립단 동맹휴교촉진부의 명의로 유학생들에게 학교를 동맹휴학하고 귀국하여 본국의 운동에 합류할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띄웠다.554) 그리하여 2·8운동 이후 5월 15일까지 본국에서의 운동에 참가하기 위하여 많은 유학생들이 귀국했다. 일본경찰의 조사기록만 보더라도 이 기간 동안에 귀국한 조선인 총수는 491명이었고, 그 가운데 유학생만 359명이었다.555)
한편 2·8독립선언이 있은 1년 뒤인 1920년에 김준연·최승만·박승철·서상국 등은<2·8독립선언 1주년기념축하문>을 작성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와 국내에 발송하여 독립의 기세를 올리려고 하다가 일본경찰의 감시로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1921년 11월 워싱턴에서 군비축소·중국문제·태평양문제에 관한 국제회의가 열리자 11월 5일 학우회는 임시총회를 가장해서 조선기독청년회관에서 모여 조선청년독립단의 대표 이동제·김송은·문원성·이흥삼·전민철의 이름으로<선언서>와<결의문>을 발표했다.556) 여기에서는 세계평화와 조선문제의 관계를 거론함에 있어 ‘조선 독립이 극동평화와 세계평화의 원동력’임을 확인하고 있다.
나) 오사카지역
3·1운동 이후 오사카에서도 시위운동이 준비되었고 이 계획은 기밀이 누설되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지만, 그 내막이 오사카지방 신문에 대서특필됨으로써 조선인의 독립시위가 끊이지 않고 계속되고 있다는 점을 알리는 데 그 역할을 다했다.557)
특히 3·1운동의 소식을 접한 염상섭은 오사카에서 이경근·백봉제·고영순·권태형·김시창·김형식·호정호 등과 만나 시위를 공동계획했으나 동의가 없었다. 이에 염상섭은 변희용의 도움으로 자금지원을 받고 자신이 기초한<선언서>와<격문>558)을 갖고 이경근과 백봉제를 만나 이들의 도움으로 복제했다.
염상섭은 오사카의 공장지대를 돌며<격문>과 붉은 완장을 돌리고 3월 19일 오후 3시에는 오사카 天王寺공원에서<조선독립선언서>230매와<격문>1매, 일문<조선독립선언서>13매를 휴대하고 시위를 주도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조선인들에게<조선독립선언서>를 나누어 주고 내각총리대신·중앙위원장·신문사·대학교수 등에게 보내는<선언서>를 낭독하고 경찰에 체포되었다.559)
‘재대판한국노동자일동 대표 염상섭’의 명의로 발표된<선언서>는 자유와 자각 그리고 독립에 대해 강조하고 민족자결주의를 천명하며, 일본이 주장하는 동조동근이나 일선동화가 억측임을 지적했다. 아울러 독립을 선언하는 명분과 근거로서 조선인의 자각과 자유에 대한 열망을 들고 있다.560)
이 사건은 2·8운동의 연결선상에서 오사카지역 재일조선인이 중심이 된 운동으로 1920년대 오사카지역 재일조선인 민족해방운동의 기원이 되었다.
한편 1919년 6월 후쿠오카현 치쿠호(筑豊)지방의 탄광에서 일어난 조선인 갱부의 쟁의가 3·1 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어났던 것은 잘 알려져 있다.561)
548) | <朝鮮人槪況>(대정 9년), 109∼110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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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9) | 강재언,<2·8독립선언과 3·1운동>(≪한민족독립운동사≫3, 국사편찬위원회, 1988), 215쪽. |
550) | <朝鮮人槪況>(대정 9년), 100쪽. |
551) | 위와 같음. |
552) | 최승만,<2·8독립선언의 실상과 사적 의의>(팜플렛, 서울YMCA), 4쪽. |
553) | <朝鮮人槪況>(대정 9년), 100쪽. |
554) | 위와 같음. |
555) | <朝鮮人槪況>(대정 9년), 101쪽. |
556) | <在京朝鮮留學生槪況>, 325쪽. |
557) | 정혜경, 앞의 책, 87쪽. |
558) | <朝鮮人槪況>(대정 9년), 107∼108쪽. |
559) | ≪매일신보≫, 1919년 4월 21일. |
560) | 국사편찬위원회,≪한국독립운동사≫3, 963쪽. |
561) | 朴慶植,≪在日朝鮮人運動史-8.15解放前-≫(三一書房, 1979), 63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