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편 한국사근대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Ⅲ. 3·1운동2. 3·1운동의 전개2) 3·1운동의 발발(3) 국내의 만세시위운동
    • 01권 한국사의 전개
      • 총설 -한국사의 전개-
      • Ⅰ. 자연환경
      • Ⅱ. 한민족의 기원
      • Ⅲ. 한국사의 시대적 특성
      • Ⅳ. 한국문화의 특성
    • 02권 구석기 문화와 신석기 문화
      • 개요
      • Ⅰ. 구석기문화
      • Ⅱ. 신석기문화
    • 03권 청동기문화와 철기문화
      • 개요
      • Ⅰ. 청동기문화
      • Ⅱ. 철기문화
    • 04권 초기국가-고조선·부여·삼한
      • 개요
      • Ⅰ. 초기국가의 성격
      • Ⅱ. 고조선
      • Ⅲ. 부여
      • Ⅳ. 동예와 옥저
      • Ⅴ. 삼한
    • 05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Ⅰ-고구려
      • 개요
      • Ⅰ. 고구려의 성립과 발전
      • Ⅱ. 고구려의 변천
      • Ⅲ. 수·당과의 전쟁
      • Ⅳ. 고구려의 정치·경제와 사회
    • 06권 삼국의 정치와 사회 Ⅱ-백제
      • 개요
      • Ⅰ. 백제의 성립과 발전
      • Ⅱ. 백제의 변천
      • Ⅲ. 백제의 대외관계
      • Ⅳ. 백제의 정치·경제와 사회
    • 07권 고대의 정치와 사회 Ⅲ-신라·가야
      • 개요
      • Ⅰ. 신라의 성립과 발전
      • Ⅱ. 신라의 융성
      • Ⅲ. 신라의 대외관계
      • Ⅳ. 신라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가야사 인식의 제문제
      • Ⅵ. 가야의 성립
      • Ⅶ. 가야의 발전과 쇠망
      • Ⅷ. 가야의 대외관계
      • Ⅸ. 가야인의 생활
    • 08권 삼국의 문화
      • 개요
      • Ⅰ. 토착신앙
      • Ⅱ. 불교와 도교
      • Ⅲ. 유학과 역사학
      • Ⅳ. 문학과 예술
      • Ⅴ. 과학기술
      • Ⅵ. 의식주 생활
      • Ⅶ. 문화의 일본 전파
    • 09권 통일신라
      • 개요
      • Ⅰ. 삼국통일
      • Ⅱ. 전제왕권의 확립
      • Ⅲ. 경제와 사회
      • Ⅳ. 대외관계
      • Ⅴ. 문화
    • 10권 발해
      • 개요
      • Ⅰ. 발해의 성립과 발전
      • Ⅱ. 발해의 변천
      • Ⅲ. 발해의 대외관계
      • Ⅳ. 발해의 정치·경제와 사회
      • Ⅴ. 발해의 문화와 발해사 인식의 변천
    • 11권 신라의 쇠퇴와 후삼국
      • 개요
      • Ⅰ. 신라 하대의 사회변화
      • Ⅱ. 호족세력의 할거
      • Ⅲ. 후삼국의 정립
      • Ⅳ. 사상계의 변동
    • 12권 고려 왕조의 성립과 발전
      • 개요
      • Ⅰ. 고려 귀족사회의 형성
      • Ⅱ. 고려 귀족사회의 발전
    • 13권 고려 전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중앙의 정치조직
      • Ⅱ. 지방의 통치조직
      • Ⅲ. 군사조직
      • Ⅳ. 관리 등용제도
    • 14권 고려 전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전시과 체제
      • Ⅱ. 세역제도와 조운
      • Ⅲ. 수공업과 상업
    • 15권 고려 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사회구조
      • Ⅱ. 대외관계
    • 16권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 개요
      • Ⅰ. 불교
      • Ⅱ. 유학
      • Ⅲ. 도교 및 풍수지리·도참사상
    • 17권 고려 전기의 교육과 문화
      • 개요
      • Ⅰ. 교육
      • Ⅱ. 문화
    • 18권 고려 무신정권
      • 개요
      • Ⅰ. 무신정권의 성립과 변천
      • Ⅱ. 무신정권의 지배기구
      • Ⅲ. 무신정권기의 국왕과 무신
    • 19권 고려 후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정치체제와 정치세력의 변화
      • Ⅱ. 경제구조의 변화
    • 20권 고려 후기의 사회와 대외관계
      • 개요
      • Ⅰ. 신분제의 동요와 농민·천민의 봉기
      • Ⅱ. 대외관계의 전개
    • 21권 고려 후기의 사상과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변화
      • Ⅱ. 문화의 발달
    • 22권 조선 왕조의 성립과 대외관계
      • 개요
      • Ⅰ. 양반관료국가의 성립
      • Ⅱ. 조선 초기의 대외관계
    • 23권 조선 초기의 정치구조
      • 개요
      • Ⅰ. 양반관료 국가의 특성
      • Ⅱ. 중앙 정치구조
      • Ⅲ. 지방 통치체제
      • Ⅳ. 군사조직
      • Ⅴ. 교육제도와 과거제도
    • 24권 조선 초기의 경제구조
      • 개요
      • Ⅰ. 토지제도와 농업
      • Ⅱ. 상업
      • Ⅲ. 각 부문별 수공업과 생산업
      • Ⅳ. 국가재정
      • Ⅴ. 교통·운수·통신
      • Ⅵ. 도량형제도
    • 25권 조선 초기의 사회와 신분구조
      • 개요
      • Ⅰ. 인구동향과 사회신분
      • Ⅱ. 가족제도와 의식주 생활
      • Ⅲ. 구제제도와 그 기구
    • 26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Ⅰ
      • 개요
      • Ⅰ. 학문의 발전
      • Ⅱ. 국가제사와 종교
    • 27권 조선 초기의 문화 Ⅱ
      • 개요
      • Ⅰ. 과학
      • Ⅱ. 기술
      • Ⅲ. 문학
      • Ⅳ. 예술
    • 28권 조선 중기 사림세력의 등장과 활동
      • 개요
      • Ⅰ. 양반관료제의 모순과 사회·경제의 변동
      • Ⅱ. 사림세력의 등장
      • Ⅲ. 사림세력의 활동
    • 29권 조선 중기의 외침과 그 대응
      • 개요
      • Ⅰ. 임진왜란
      • Ⅱ. 정묘·병자호란
    • 30권 조선 중기의 정치와 경제
      • 개요
      • Ⅰ. 사림의 득세와 붕당의 출현
      • Ⅱ. 붕당정치의 전개와 운영구조
      • Ⅲ. 붕당정치하의 정치구조의 변동
      • Ⅳ. 자연재해·전란의 피해와 농업의 복구
      • Ⅴ. 대동법의 시행과 상공업의 변화
    • 31권 조선 중기의 사회와 문화
      • 개요
      • Ⅰ. 사족의 향촌지배체제
      • Ⅱ. 사족 중심 향촌지배체제의 재확립
      • Ⅲ. 예학의 발달과 유교적 예속의 보급
      • Ⅳ. 학문과 종교
      • Ⅴ. 문학과 예술
    • 32권 조선 후기의 정치
      • 개요
      • Ⅰ. 탕평정책과 왕정체제의 강화
      • Ⅱ. 양역변통론과 균역법의 시행
      • Ⅲ. 세도정치의 성립과 전개
      • Ⅳ. 부세제도의 문란과 삼정개혁
      • Ⅴ. 조선 후기의 대외관계
    • 33권 조선 후기의 경제
      • 개요
      • Ⅰ. 생산력의 증대와 사회분화
      • Ⅱ.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34권 조선 후기의 사회
      • 개요
      • Ⅰ. 신분제의 이완과 신분의 변동
      • Ⅱ. 향촌사회의 변동
      • Ⅲ. 민속과 의식주
    • 35권 조선 후기의 문화
      • 개요
      • Ⅰ. 사상계의 동향과 민간신앙
      • Ⅱ. 학문과 기술의 발달
      • Ⅲ. 문학과 예술의 새 경향
    • 36권 조선 후기 민중사회의 성장
      • 개요
      • Ⅰ. 민중세력의 성장
      • Ⅱ. 18세기의 민중운동
      • Ⅲ. 19세기의 민중운동
    • 37권 서세 동점과 문호개방
      • 개요
      • Ⅰ. 구미세력의 침투
      • Ⅱ. 개화사상의 형성과 동학의 창도
      • Ⅲ. 대원군의 내정개혁과 대외정책
      • Ⅳ. 개항과 대외관계의 변화
    • 38권 개화와 수구의 갈등
      • 개요
      • Ⅰ. 개화파의 형성과 개화사상의 발전
      • Ⅱ. 개화정책의 추진
      • Ⅲ. 위정척사운동
      • Ⅳ. 임오군란과 청국세력의 침투
      • Ⅴ. 갑신정변
    • 39권 제국주의의 침투와 동학농민전쟁
      • 개요
      • Ⅰ. 제국주의 열강의 침투
      • Ⅱ. 조선정부의 대응(1885∼1893)
      • Ⅲ. 개항 후의 사회 경제적 변동
      • Ⅳ. 동학농민전쟁의 배경
      • Ⅴ. 제1차 동학농민전쟁
      • Ⅵ. 집강소의 설치와 폐정개혁
      • Ⅶ. 제2차 동학농민전쟁
    • 40권 청일전쟁과 갑오개혁
      • 개요
      • Ⅰ. 청일전쟁
      • Ⅱ. 청일전쟁과 1894년 농민전쟁
      • Ⅲ. 갑오경장
    • 41권 열강의 이권침탈과 독립협회
      • 개요
      • Ⅰ. 러·일간의 각축
      • Ⅱ. 열강의 이권침탈 개시
      • Ⅲ. 독립협회의 조직과 사상
      • Ⅳ. 독립협회의 활동
      • Ⅴ. 만민공동회의 정치투쟁
    • 42권 대한제국
      • 개요
      • Ⅰ. 대한제국의 성립
      • Ⅱ. 대한제국기의 개혁
      • Ⅲ. 러일전쟁
      • Ⅳ. 일제의 국권침탈
      • Ⅴ. 대한제국의 종말
    • 43권 국권회복운동
      • 개요
      • Ⅰ. 외교활동
      • Ⅱ. 범국민적 구국운동
      • Ⅲ. 애국계몽운동
      • Ⅳ. 항일의병전쟁
    • 44권 갑오개혁 이후의 사회·경제적 변동
      • 개요
      • Ⅰ. 외국 자본의 침투
      • Ⅱ. 민족경제의 동태
      • Ⅲ. 사회생활의 변동
    • 45권 신문화 운동Ⅰ
      • 개요
      • Ⅰ. 근대 교육운동
      • Ⅱ. 근대적 학문의 수용과 성장
      • Ⅲ. 근대 문학과 예술
    • 46권 신문화운동 Ⅱ
      • 개요
      • Ⅰ. 근대 언론활동
      • Ⅱ. 근대 종교운동
      • Ⅲ. 근대 과학기술
    • 47권 일제의 무단통치와 3·1운동
      • 개요
      • Ⅰ. 일제의 식민지 통치기반 구축
        • 1. 무단통치체제의 확립
          • 1) 총독지배체제의 형성
          • 2) 조선총독 지배하의 탄압기관
            • (1) 헌병경찰체제
            • (2) 사법기관
            • (3) 군대
        • 2. 식민지 수탈구조의 구축
          • 1) 토지조사사업과 토지수탈기반의 마련
            • (1) 토지조사사업의 전사
            • (2) 토지조사사업의 실시와 그 성격
            • (3) 동양척식주식회사의 토지 집적
          • 2) 수탈을 위한 농업정책과 한국농민의 고난
            • (1) 관권의 농사 개입
            • (2) 면화재배의 강요
            • (3) 식민지적 수탈의 강화
            • (4) 몰락 농민의 증가
            • (5) 한국농민의 저항
          • 3) 임야조사사업과 국유림의 창출
          • 4) 광업과 어업의 장악
            • (1) 광업의 장악
            • (2) 어장의 장악
          • 5) 금융·재정의 식민지적 재편
            • (1) 금융의 장악
            • (2) 재정의 재편
          • 6)<회사령>과 기업활동의 억압
            • (1) 한국강점 이전의 일본자본 침투
            • (2)<회사령>의 시행과 기업발흥의 억압
            • (3) 일본자본의 왕성한 침투
            • (4) 노동구조와 노동쟁의
          • 7) 교통·운수·통신의 지배
          • 8) 무역의 대일 종속
        • 3. 식민지 지배체제의 특질
          • 1) 일제의 조선침략과 식민주의
            • (1) 무단통치에 의한 지배체제 구축기(병합∼3·1독립운동)
            • (2) 회유정책에 의한 민족개량화기(3·1독립운동∼중일전쟁)
            • (3) 민족말살을 통한 전시강제동원기(중일전쟁∼패전)
          • 2) 조선 총독의 권력
          • 3) 식민지 통치구조
      • Ⅱ. 1910년대 민족운동의 전개
        • 1. 국내민족운동
          • 1)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배경과 경향
            • (1) 배경
            • (2) 국내민족운동의 경향과 특징
          • 2) 의병계열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독립의군부
            • (2) 풍기광복단
            • (3) 민단조합
            • (4) 이증연의 비밀결사
          • 3) 계몽운동계열의 단체
            • (1) 기성볼단
            • (2) 조선국권회복단
            • (3) 조선산직장려계
            • (4) 단천 자립단
            • (5) 영주 대동상점
            • (6) 송죽회
            • (7) 애국창가집 편찬, 배포와 관련된 민족교육투쟁
          • 4) 혁명적 경향의 민족운동단체
            • (1) 대한광복회
            • (2) 선명당
            • (3) 흠치교의 비밀결사
            • (4) 청림교의 비밀결사
            • (5) 조선국민회
          • 5) 1910년대 국내민족운동의 성격
        • 2. 해외민족운동
          • 1) 만주
            • (1) 북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2) 서간도지역의 민족운동
            • (3) 북만 밀산부지역
          • 2) 러시아
            • (1) 러시아혁명 이전의 독립운동
            • (2) 러시아혁명 이후의 독립운동
          • 3) 중국 관내지역
            • (1) 한인의 이주와 한인사회의 형성
            • (2) 중국혁명세력과의 연대 구축
            • (3) 한인단체의 활동과 독립운동의 기반조성
          • 4) 미주
            • (1) 미주 한인사회의 형성과 한인단체의 결성과정
            • (2) 통일연합기관 설치와 독립군기지 개척운동
            • (3) ‘합병’ 반대투쟁과 군인양성운동
            • (4) 국민국가 수립론과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설립
          • 5) 일본
            • (1) 1910·20년대 재일 조선인의 상태
            • (2) 191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3) 2·8운동
            • (4) 1920년대 일본지역 민족해방운동
      • Ⅲ. 3·1운동
        • 1. 3·1운동의 배경
          • 1) 제1차 세계대전 전후의 국제정세
          • 2) 해방과 평등의 새로운 사조 등장
          • 3) 독립운동의 새 기운
          • 4) 국내 상황
            • (1) 식민지 지배의 압박과 고통
            • (2) 식민지 지배의 모순 격화와 민생 피폐
          • 5) 3·1운동의 태동
            • (1) 상해 신한청년단의 활동과 해외 독립운동가들의 움직임
            • (2) 2·8독립선언
            • (3) 광무황제의 붕어와 인산
        • 2. 3·1운동의 전개
          • 1) 3·1운동의 초기 조직화
            • (1) 민족대연합전선의 형성
            • (2)<독립선언서>준비
            • (3)<독립선언서>의 배포와 최후의 회담
          • 2) 3·1운동의 발발
            • (1) 민족대표의 독립선언
            • (2) 만세시위운동의 시작
            • (3) 국내의 만세시위운동
        • 3. 3·1운동의 해외 확산
          • 1) 중국 만주
            • (1) 북간도의 시위운동
            • (2) 서간도의 시위운동
          • 2) 러시아 연해주
            • (1) 러시아혁명과 연해주 한인들의 독립운동
            • (2) 파리 강화회의 대표파견
            • (3) 전로국내조선인회의
            • (4) 독립선언과 시위운동의 전개
            • (5) 국내진공 계획과 노인동맹단의 독립운동
          • 3) 미주
        • 4. 3·1운동의 영향과 의의
          • 1) 3·1운동에 대한 열강의 반응
            • (1) 중국
            • (2) 미국
            • (3) 영국
          • 2) 3·1운동의 역사적 의의
            • (1) 3·1운동의 민족사적 의의
            • (2) 3·1운동의 세계사적 의의
    • 48권 임시정부의 수립과 독립전쟁
      • 개요
      • Ⅰ. 문화정치와 수탈의 강화
      • Ⅱ.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수립과 활동
      • Ⅲ. 독립군의 편성과 독립전쟁
      • Ⅳ. 독립군의 재편과 통합운동
      • Ⅴ. 의열투쟁의 전개
    • 49권 민족운동의 분화와 대중운동
      • 개요
      • Ⅰ. 국내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운동
      • Ⅱ. 6·10만세운동과 신간회운동
      • Ⅲ. 1920년대의 대중운동
    • 50권 전시체제와 민족운동
      • 개요
      • Ⅰ. 전시체제와 민족말살정책
      • Ⅱ. 1930년대 이후의 대중운동
      • Ⅲ. 1930년대 이후 해외 독립운동
      • Ⅳ.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체제정비와 한국광복군의 창설
    • 51권 민족문화의 수호와 발전
      • 개요
      • Ⅰ. 교육
      • Ⅱ. 언론
      • Ⅲ. 국학 연구
      • Ⅳ. 종교
      • Ⅴ. 과학과 예술
      • Ⅵ. 민속과 의식주
    • 52권 대한민국의 성립
      • 개요
      • Ⅰ. 광복과 미·소의 분할점령
      • Ⅱ. 통일국가 수립운동
      • Ⅲ. 미군정기의 사회·경제·문화
      • Ⅳ. 남북한 단독정부의 수립
마. 북부지방

가) 황해도

 황해도의 독립만세시위는 3월 초 서울의 독립선언과 동시에 다수의 지역에서 시위운동을 시작하였고, 3월 중순에 뜸하다가 3월말부터 4월 10일까지 다시 격화되는 양상을 보였다. 3월 1일에는 서울에서 사전연락이 되어있던 해주·옹진·사리원·황주·서흥·연백·수안·곡산 등지에서 선언서를 배포·낭독하였으나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그러나 2일 황주읍내에서 300명의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시위운동이 퍼져나가기 시작하였다. 3일에는 해주·금천 변리·옹진·봉산 사리원·수안 등지에서, 4일에는 옹진 읍내, 곡산읍내와 광천 등지로 퍼져나갔다. 특히 3월 28일부터 4월 10일까지 도내 대부분 지역에서 치열한 시위운동이 재확산되었고, 장연에서는 3월 18일과 22일까지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3월 2일의 황주시위는 시가행진을 하다가 시위군중이 황주경찰서에 쇄도하여 유리창을 전부 깨는 치열한 항일의식을 보여주었다. 수안시위는 3·1운동기의 대표적인 격렬한 시위운동의 하나로 꼽히는데,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200여 명의 시위군중은 3일 아침 일찍부터 시위운동을 시작하여 3차에 걸쳐 헌병분견대에 쇄도하여 “조선이 독립하였으므로 분견대를 인도하라”고 요구하다 일군의 발포로 사망 9명, 부상 18명의 사상자가 났다. 재령군에서는 9일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읍내에서 2,000명이 시위를 벌인 데 이어 10일에는 재령 內宗에서 4,500명의 대규모 시위운동이 일어났고, 옹진·재령·서흥·수안·황주군에서는 3월 10일 경까지 크고 작은 시위운동이 계속되었다.

 해주에서는 3월 1일 선언서가 배포 된 후 10일 천도교인·기독교인·학생이 중심이 된 400명의 시위운동이 있은 이후 11일 청단, 14일 읍내, 17일 청룡면 등 시위가 이어졌고, 3월 중순에는 송화·수안·신천 등지에서, 특히 연백에서는 3월 15일과 16일 연안, 16일 나진포, 18일 다시 연안에서 2,000명의 시위대가 헌병분대를 습격하였으며, 22·23·24일 계속 군내에서 시위운동이 계속되었다.

 황해도내 연백군을 제외한 대부분 지역에서 3월 20일부터 26∼27일까지 휴지기를 거친 다음 28일 경부터 다시금 시위운동이 불타올랐다. 28일의 해주읍내에서는 수천 명이, 31일에는 3,000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30일에는 안악 동창리에서 전날 구금된 인사를 구출하기 위하여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또한 4월 3일 금천군 구이면에서는 4,000명이, 5일에는 평산 物開에서 3,000명, 장연 苔灘에서 1,000명, 7일에는 재령읍내에서 2,000명 등 대규모 시위운동이 이어졌다. 면사무소·우편소·헌병 및 경찰관 주재소를 습격하는 공세적 시위운동이 벌어져 일본 군경과의 충돌과 발포로 인해 수안에서 9명 사망한 것 이외에도, 연백 白川에서 4명, 금천 구이면에서 1명, 평산군 기린·누천 등지에서 9명, 서흥의 綠鞍에서 6명, 재령에서 1명, 봉산 읍내에서 1명, 안악 온정리에서 4명이 목숨을 잃었다.

 해주와 신천이 비교적 전기간을 통하여 지속적으로 시위운동을 전개한 반면 금천과 신계·평산 등지는 3월말, 4월초에 가서야 비로소 시위운동을 시작하였으며, 곡산과 황주·은율은 3월초의 시위운동으로 끝났다.

나) 평안남도

 평안남도 대부분 지역에서 시위운동은 3월 초순에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3월 중순에는 거의 시위운동이 없다가 3월 하순에 가서 일부 군, 즉 중화·강동·성천·평원·안주군에서만 시위운동이 있었다.

 3월 1일 평양·진남포·안주에서 서울과 동시에 시위운동이 벌어졌으며, 2일에는 이 지역들 외에 용강·중화·강서, 3일에는 순천, 4일에는 성천, 5일에는 덕천과 양덕 등지로 파급되어 갔다.

 평양에서는 3월 1일 오후 1시 장로교인들은 숭덕학교 교정에, 감리교인들은 남산현 교회 앞 뜰에, 천도교인들은 천도교구당에 각각 모여 광무황제 奉悼式을 거행한 다음 바로<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독립선포식을 거행하였으며, 시내로 나와 시가행진에 들어갔다. 이후 2일부터 5일까지 매일 시위운동이 끊이지 않았는데, 4일의 시위는 新陽里에서 여성들만 수백 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진남포에서도 3월 1일 시위운동을 시작하여 2일에는 1,000명의 시위군중이 경찰서를 습격, 기물을 파괴하였다. 이후 6일까지 시위운동이 지속되었다. 안주에서는 3월 1일 읍내에서 300명이 시위를 시작한 이후 2일에는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3,000명, 3일에는 2,000명이 구금자를 탈환하려는 시위가 이어졌다.

 안주군에서는 3월 1일 오후 5시 장로교 東禮拜堂 청년들을 중심으로 300명이 읍내에 모여<독립선언서>를 배포하며 독립선포식을 열었다. 3월 2일 읍내에서 3,000명의 시위운동이, 3일에도 다시 2,000명이 시위운동을 하였다. 3일의 시위는 천도교인이 주도하였다. 전날까지 구금된 시위주도자를 탈환하고자 헌병분견대를 습격하였다. 3월 23일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2,000명의 시위대가 立石에서 시위운동이 있었다. 안주 군수 金羲善은 3·1운동이 일어나자 관직을 버리고 망명하여 상해 임시정부에 참여하였다.

 용강군에서는 3월 2일 읍내에서 첫 시위운동이 있었고, 6일 해운면 용반 1리에서 주민 70여 명이 시위행진을 시작하여 용반 2리·궁산리·일병리 주민을 규합하며 온정리에 들어가 주재소에 투석하여 유리창을 부수고 해산하였다. 광량만에서도 1천여 시위대가 만세시위를 벌였다. 8일 서화면에서도 300명의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중화군에서는 3월 2일 祥原·新邑에서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시위가 시작되어 경찰관주재소의 철퇴를 요구하였다. 경찰이 이들을 해산시키려 하자 군중들은 저들을 주재소 안에 몰아넣고 총기와 탄약을 빼앗았으며, 순찰 나온 중화경찰서장을 포박하여 대치하였다. 3일 예수교인을 중심으로 다시 시가행진을 벌이며 주재소에 쇄도하여 구금된 인사들을 탈환하려 하여 시위대와 일군경 사이에 백병전이 벌어졌다. 같은 날 또한 중화읍내에서 예수교인과 천도교인이 제휴하여 수백 명이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10일 읍내 장터에서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28일과 4월 16일 당정면 적선리, 두정리에서 그리고 4월 5일 간동면 간동장터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 400여 명이 시위운동을 벌인 끝에 해산하였다.

 강서군에서는 3월 2일 증산면 집용리 교회에서 예배를 끝내고 밖에 나와 인근 주민들과 합세하여 만세를 부르며 증산읍내로 진입을 시도하다가 일본 경찰의 제지를 받고 해산하였다. 3일 읍내에서 4,000명이 집결하였다. 기독교측과 천도교측이 사전에 조직적으로 주민들을 참여시켰다. 오전 10시 독립선포식을 하고 시가행진을 시작하였다. 헌병분견대장은 평양에서 헌병 하사 2명과 보명 1명의 지원을 받아 시위대를 향하여 실탄사격을 가하여 사망 9명, 부상 4명의 인명피해를 내었다. 6일에도 읍내에서 1,000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4일 대동군 금제면 원장리에서 시위운동을 벌이던 시위군중은 모락장 시위운동을 계획하던 기독교 지도자들이 사전에 발각되어 구금되자 이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4,000명이 태극기를 앞세우고 대열을 지어 25리 떨어진 강서군 반석면 상사리를 향해 나아갔다. 일본 헌병들이 시위대를 향하여 실탄사격을 가해 수명이 죽거나 부상당하였다. 그러나 시위대는 흩어지지 않고 투석으로 맞서며 주재소에 불을 지르고, 계속 총을 쏘며 피신하는 헌병주재소장 佐藤과 헌병 보조원 3명을 붙잡아 살해하고 붙잡혀 있던 동지들을 구해내었다. 이 과정에서 13명이 죽고 6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6일 함종에서는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2,5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8일에도 300명이 제2차 시위를 벌였다.

 순천군에서는 3월 3일과 4일 慈山에서 천도교인이 중심이 된 시위운동이 있었는데 특히 4일의 시위는 1,5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읍내에서도 4일에 천도교당에 수백 명이 집합하여 태극기를 올리고 경고문을 배포하고 해산하면서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를 전개하였다. 5일 신창면 장날을 기하여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1,000명의 시위군중이 독립선포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일본 헌병이 시위대에 폭행을 가하며 저지하였다. 6일 시위대는 다시 헌병주재소에 쇄도하였으며, 7일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합세하여 5,000명의 시위대가 시위운동을 벌였다.

 성천군에서는 3월 4일 읍내 천도교구당에 군내 천도교인 4,000명이 총집합하여<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태극기를 들고 일본 헌병대 앞으로 나아갔다. 일본 헌병과 조선인 보조원이 시위대를 향하여 무차별 발포를 하여 30명이 숨지고 38명이 부상당하였으며 300명이 구금당하였다. 5일에는 붙잡힌 300명이 시위운동을 했으며, 7일에도 읍내에서 시위운동이 있었다. 이후 3월말에 가서 31일 삼흥면, 4월 1일과 3일 능중, 2일 대곡면에서 각각 시위운동이 있었다.

 덕천군에서는 3월 5일 읍내에서 소규모 시위를 시작으로 6일 300명의 읍내 시위, 7일 다시 600명의 읍내시위가 있었고 일병 31명이 출동하여 40명이 구금되었다.

 양덕군에서는 3월 5일 읍내에서 300명의 농민시위가 있었고, 6·8일에도 이어졌다. 5일 시위운동은 천도교구당 앞에서 독립선언식을 하고 헌병대·우편국이 있는 하석리 방면으로 시가행진을 하는데, 헌병대가 출동, 시위대를 향하여 실탄사격을 하여 사망 20명, 중상자 50명의 인명피해를 내었다.

 맹산군에서는 3월 6일 천도교인 30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9일 다시 천도교인 수십 명이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10일 다시 약 100명이 시위를 벌이자 헌병분견대가 주도자를 붙잡아 고문을 가했다. 이에 시위대는 헌병분견소에 쇄도하여 저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에 분견소에서 시위대를 뜰 안에 들어오게 한 다음 군중을 포위하고 총을 난사하여 50여 명이 죽고, 겨우 3명만 탈출할 수 있었다.

 대동군에서는 3월 6일 읍내·고평면·대보면·대평·선교·만경대·평천·오야·원장 등 9군데에서 시위운동이 벌어졌다. 이날 읍내에서는 600명이 시위운동을 벌여 경찰서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대평면과 선교에서도 각각 600명 규모의 시위운동이 벌어졌다. 7일 선교에서는 300명이 제2차 시위를 벌였고, 9일 대평에서 제2차 시위가 있었다.

 평원군에서는 3월 6일 순안에서 500명이 봉기하여 격렬한 시위를 벌이며 경찰서에 쇄도해 갔다. 이날 어파 역전촌에서도 1,0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9일 숙천에서는 예수교인 100명이 예배를 마치고 독립만세 시위행진을 하였다.

 강동군에서는 3월 7일 원탄면과 고읍면에서 수십 명의 기독교인이 시위를 벌였다. 30일과 31일 읍내 천도교인들이 첫날 500명, 둘째날 1,000명의 시위군중을 이끌며 시위를 벌였다. 4월 8일에도 읍내에서 700명의 시위가 있었다.

 영원군에서는 3월 7일 읍내에서 천도교인 35명이 독립선언식을 하고 가두행진을 하다 전원 체포되었다. 9일 천도교인 150명이 시위운동을 벌이며 헌병분견대로 쇄도하여 구금된 인사들의 석방을 요구하였다. 이틈에 구금되었던 인사들은 안에서 문을 부수고 탈출하였다. 시위대의 수가 점점 불어나자 덕천읍내에서 파견되어 온 일본군 20명이 시위대 뒤에서 총을 난사하여 사망 15명, 부상 34명의 인명손상을 내고, 70명이 체포되었다.

 개천에서는 4월 21일 외동면 순흥 안씨촌의 청년 70여 명이 중심이 되어 읍내 장터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고 20리 떨어진 무진대 장터까지 가서 만세시위를 벌인 뒤 해산하였다.

다) 평안북도

 평안북도 만세시위는 3월 초 의주와 선천을 중심으로 철산·정주 등에서 치열한 전개양상을 보였다. 그 후 3월 중순에 들어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3월 말 다시 치열하게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가장 치열했던 곳은 의주군이었고, 정주·태천·구성·용천·삭주·초산 등지에서도 치열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선천군에서는 3월 1일 신성중학교 학생들과 천도교인, 기독교인이 앞장서 천남동 시장에서 1천여 장꾼들과 함께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시가행진을 하였다. 선천수비대가 일경과 함께 시위대를 저지하며 충돌이 일어나자 일본군은 발포를 하여 12명이 부상을 입었다. 3일 다시 1,300명이 읍내에서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4일에는 다시 6,000명이 집결한 가운데 만세시위를 벌이며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였다. 5일에는 군내 삼봉, 운종면 신미도, 수청면 가물남, 심천면 고군영 등지에서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그 중에서 신미도 시위는 주민들이 헌병주재소를 점거하고 면사무소를 인수하여 약 20일 동안 자치적인 행정사무를 집행한 특징이 있다.

 의주군의 만세시위운동은 전국에서도 가장 치열하게 시위운동을 전개한 곳의 하나다. 이곳은 민족대표의 한 사람인 유여대 목사가 직접 운동을 지도하였다. 3월 1일 읍내 서부교회 앞에 이날 1,600명이 모인 가운데 독립선언식을 거행하고 주야 2차에 걸쳐 시위운동을 펼쳤다. 2일과 3·5일 읍내에서 계속 시위운동이 벌어졌다. 2일의 시위부터는 천도교측에서도 가세하였다. 읍내 지역의 시위는 이후 27일 3,000명의 시위, 4월 7일에도 300명의 시위로 이어갔다. 읍내 이외의 지역에서도 크고 작은 시위운동이 끊임없이 이어졌다. 3월 3일 비현에서 300명, 5일 수구진에서 200명, 소곶관에서 500명, 6일 고령삭면에서 200명, 영산시에서 100명, 7일 옥강진에서 200명, 9일 가산면에서 120명, 고관면에서 150명, 11일 다시 고관면에서 150명, 15일과 16일 광평면에서, 15일 가산면과 옥상면에서 발발하였으며, 17일 고성면에서 200명의 시위가 일어났다. 3월말에 들어 의주군의 시위운동은 다시 격렬한 불꽃으로 타올랐다. 30일 영산시와 수구진, 평구진에서 각각 200∼400명 규모의 시위가 일어났다. 31일 고령삭면 영산시장에서 4,000명의 시위가 일어나 헌병주재소를 파괴하였다 일병 11명이 출동하여 발포함으로써 우리측 4명이 사망하고, 4명이 부상하였다. 4월 1일 수진면에서는 다수의 군중이 친일파 가옥에 방화하였으며, 읍내에서는 1,200명이 격렬한 시위를 전개하였다. 이날 구룡포에서도 400명, 청성진에서 300명, 위원면에서는 다수의 군중이 세관감시서에 쇄도하여 공격하였다. 2일에는 枇峴에서 3,000명이, 수구진에서 2,0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는데, 수구진 시위대는 면사무소를 습격하다 일군의 발포로 2명이 사망하고 2명이 부상하였다. 이날 또한 玉尙面에서는 주민 2,000명이 면사무소로 몰려가 “우리는 이미 독립선언을 하였으니, 면사무소를 마땅히 폐지하고 우리가 새로 조직할 自治民團에 면사무소 청사와 비품, 재산 일체를 넘기라”고 선언하고 면사무소를 접수하여 십 수일간 자치사무를 집행하였다. 4일에는 하단에서 500명, 광성면에서 600명, 6일에는 양광면에서 500명이 각각 시위운동을 벌였다. 광성면 시위에서는 일병 10명이 출동하여 발포함으로써 사망 4명, 부상 5명의 인명 손상을 입었다.

 신의주에서는 3월 4일 300명이 독립선언식을 갖고 시위운동을 벌이자 일본군 수비대가 출동하여 강제 해산시켰다. 5일에도 교외 所串館에서 3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용천군에서는 3월 4일과 5일 陽市에서 각각 600명과 500명의 시위운동이 있었고, 6일과 11일 南市에서 200명이 시위운동을 벌여 주재소를 습격하였다. 25일 용암포에서 1,000명이 시가행진을 하며 시위운동을 하였고, 31일 남시에서 3,000명이 재차 시위운동을 벌이며, 헌병주재소를 습격하다 일병의 발포로 7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밖에 양광면 충열동에서 4월 1일과 6일 300명 시위, 같은 날 외하면에서 800명 시위, 4월 7일 읍내면에서 300명이 시위를 벌였다.

 철산군에서는 3월 5일 車輦館에서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3,000명이 시위를 벌였으며, 7일 철산읍내에서 다시 3,000명의 시위군중이 기독교 교회당에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일본군 철도원호대가 행렬의 뒤에서 총격을 가해 9명이 죽고 40∼50명이 부상당하였다. 4월 7일 백양면 풍천에서 300명의 시위대가 저녁 8시 시위운동을 시작하여 경찰관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습격하다 27명이 구금되었다.

 영변군에서는 3월 8일 기독교인과 농업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600명이, 9일에는 천도교인이 중심이 된 수백 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정주군에서는 3월 7일 고읍, 8일 읍내에서 각각 시위운동이 있었고, 11일 동주면에서 면사무소를 습격하는 시위가 있었다. 본격적인 시위는 31일 읍내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합세하여 4,000명의 군중이<독립선언서>를 뿌리며 시가를 행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시위대를 향하여 칼과 쇠갈구리를 휘두르며, 무차별 사격을 가해 수십 명이 죽고 70명을 구금하였다. 일제는 인명살상에 그치지 않고 4월 2일 새벽 천도교 정주교구당을 방화하여 전소시키고, 이날 밤 다시 정주 용동 오산학교와 기숙사, 용동교회을 방화하여 이 또한 전소시켰다.

 삭주군에서는 3월 10일 읍내에서 시위운동이 시작되어 31일에는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합세하여 2,000명의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고, 4월 2일에도 읍내에서 1,500명, 4일에는 5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태천군에서는 3월 10일 일단의 군중들이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다. 31일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합세하여 2,5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4월 2일에도 읍내에서 다시 1,500명의 시위운동이, 4일에는 500명의 시위운동이 각각 있었다. 이날 서면에서도 5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구성군에서는 3월 10일 읍내에서 시위가 있어 일병 15명이 출동하여 저지하였고, 30일에는 900명이 2회에 걸쳐 시위운동을 전개하였으며, 4월 1일에는 3,000명의 시위군중이 시위운동을 펼쳐 일병의 발포로 3명이 부상을 입었다. 3월 18일 新市에서 기독교인이 중심이 된 300명이, 31일 다시 1,000명이, 4월 1일에도 다시 1,500명이 시위를 벌였는데, 31일의 시위에서는 헌병주재소를 습격하기도 하였다.

 초산군에서는 3월 16일 읍내에서 300명의 기독교인들이 시위운동을 벌인 데 이어 30일 다시 4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31일에는 다시 읍내에서 천도교인 4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고 군내 최대의 시위운동으로서 4월 1일 3,000명이 읍내에서 시위운동을 벌였다. 군대가 출동하여 시위대는 해산하였으나, 이날 밤 600명이 다시 집결하여 시위운동을 계속했고, 다음날 밤에는 산위에 올라가 횃불을 들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자성군에서는 3월 16일 중강진에서 신성학교 졸업생 金宗河가 중심이 되어 시위운동에 돌입하니 상가들도 철시하여 호응하였다. 4월 10일 장토면 주민 40여 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창성군에서 본격적인 시위는 4월 1일 읍내 기독교 교회 장로인 康濟羲 주도로 전 군 차원의 시위운동을 벌였다. 먼저 일본헌병대에 독립선언축하식 개최를 통고하고 1,000명 이상의 시위군중과 함께<독립선언서>낭독과 시가행진을 벌였다. 시위대에 대하여 일군이 발포하여 2명이 현장에서 사망하고 수 명이 부상을 당했다. 동창면 대유동에서는 3월 31일 천도교인 60여 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4월 1일의 읍내 시위도 대유동이 중심이 되었다. 2일 대유동에서 다시 500명의 시위가 있었다. 5일 청산면 학송리에서 천도교인과 기독교인이 합세하여 300명의 시위운동을 펄쳤다. 일병의 발포로 6명이 숨지고 20명이 부상을 입었다. 6일 청산면 청룡리에서 천도교인 70명이 만세시위를 벌이다 일본 헌병대와 충돌하여 7명이 사망하고 5명이 부상당하였다.

 벽동군에서는 3월 31일 읍내에서 200명이 독립만세시위운동을 벌였다. 다음날인 4월 1일에도 800명의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위원군에서는 3월 31일 읍내에서 천도교인 30명의 시위가 있었다.

 운산군에서는 4월 5일 북진에서 천도교인이 중심이 된 300명의 시위대가 시위운동을 벌여 일병의 발포로 8명이 부상당하였고, 35명이 구금되었다. 같은 날 읍내에서 2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강계군에서는 4월 8일 읍내에서 기독교인과 천도교인이 연합하여 800명이 북과 나팔을 불며 시위운동을 벌였다. 일군은 북문 문루에 수비대를 매복해 두었다가 시위대의 도착을 기다려 무차별 발포하여 3명이 숨지고, 10명이 부상당하였으며, 13명이 체포되었다. 11일에는 고산진에서도 시위가 있었다.

라) 함경남도

 함경남도의 만세시위운동은 원산·함흥과 영흥을 중심으로 정평·북청·신흥·이원과 단천에서 초기에 시작되었다. 3월 중순에는 초기의 시위가 이어지면서 새로이 고원·풍산·갑산·장진·덕원·삼수·홍원에서 시위운동이 시작되어 도내 시위의 절정을 이루었다. 후기에 들어가면 원산·함흥·홍원 등지에서 산발적인 시위가 있었을 뿐 대체로 종결되었다.

 원산부내에서는 3월 1일 오후 2시 원산 장날을 기해 북과 나팔을 불며 시위운동을 시작하니 2,500명이 운집하였다. 일본 경찰·헌병·소방대가 동원되어 소방호스로 물감을 뿌리며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였다. 시위는 오후 6시까지 계속되었고 30명이 체포되었다. 4월 5일에는 전 시가가 철시함으로써 무언의 저항을 보였다.

 함흥군에서는 3월 3일 함흥 장날을 거사일로 잡고 기독교계 지도자들과 함흥고등보통학교 등의 학생대표들을 중심으로 준비를 하고 있던 중 2일 읍내에서 일반 시민들이 산발적인 시위운동을 시작하였다. 3일 새벽 함흥 전역에 경찰은 비상선을 치고 예비검속을 하여 시위를 준비하던 기독교계 지도자와 학생대표들이 모두 구금되었다. 구금된 이들이 고문을 받는 중에도 독립만세를 외치자 철장 속에서의 만세함성이 시민들의 가슴을 울렸다. 학생·시민 1,000여 명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거리를 누볐다. 함흥읍내의 시위운동은 이렇게 하여 4일 전 시가가 철시하고 200명의 기독교인과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5일·6일 계속되었고, 일본군 100명이 출동하여 첫날 88명이 구금된 데 이어 둘째 날 46명, 셋째 날 60명이 구금되었다. 6일 함주군 지경리에서 250명의 군중이 모여 경찰관 주재소 앞에서 만세시위를 벌였다. 같은날 저녁 하조양면 주민 400명은 오로리 헌병주재소까지 행진하며 일제를 규탄하였다. 8일 퇴조리에서 200명, 9일 동흥리에서 50명, 10일과 11일 읍내에서, 21일 다시 함주군 지경리에서 300명이 경찰관주재소를 습격하는 시위운동을 벌였다. 4월 8일에는 덕천에서 소규모 시위가 있었다. 4일에는 함흥의 각 관청에 종사하던 한국인 10여 명이 사퇴하였다. 함흥면 朴相甫는 독립운동의 소식을 널리 알리기 위하여≪독립신문≫을 등사하여 5월 15일까지 시내에 뿌리다 체포되었다.

 영흥군에서는 3월 3일<독립선언서>가 관내에 배포되고 17일 500명이 모여 시위운동을 벌였다. 7일 동상리에서 150명이, 21일에는 선흥면 성리 장날이 파할 때를 기다려 200명의 시위군중이 성리 경찰관주재소 앞에서 시위를 벌이며 구금자 석방을 요구하며 주재소 유리창과 기물을 파괴하였다.

 정평군에서는 3월 7일 읍내 풍납리에 200명이 집결하여 만세시위를 벌였다. 14일과 15일에도 읍내에서 시위운동을 벌였는데. 기독교인들이 주도하였다. 8일에는 춘유면 기독교인들의 시위움직임이 있었고, 다시 13일 신하리 장날을 기해 300명의 춘유면 기독교인이 중심이 되어 헌병주재소와 일본인 철도숙사를 습격하였다. 일병의 발포로 10여 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14일 선덕면 선덕장터에 500명의 시위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고창하며,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16일과 17일 고산면 풍송리에서 일단의 시위군중이 주재소 앞에서 시위운동을 벌인 뒤 해산하였다. 풍송리 시위는 20일까지 5일간이나 계속되었다.

 북청군 최초의 시위는 3월 8일 천도교인과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5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고, 11일 360명이 읍내 천도교당 앞에 모인 가운데 제2차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 경찰은 예비검속을 통하여 주도자들을 구금하고, 읍내외를 차단하였으나 읍외 사람들은 남문과 서문 밖에서, 읍내 사람들은 성안에서 상호 호응하며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펼쳤다. 14일에도 읍내에서 100명의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시위운동이 있었다. 12일 평산면에서 100명의 사립학교 학생 중심의 시위, 12·13·16일에 신창면 신창리에서 100∼150명의 시위운동을 벌였다. 14일에는 양천면에서 천도교인 80명이, 15일 양화면에서 사립학교 학생 중심의 80명 시위가, 16일 창성리에서 천도교인 150명이, 17일에는 거산면 주민 300명이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17일과 18일에 걸쳐 上車書面에서 천도교인 150명이 방촌시장에서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李求準과 高明哲 등은 등사판으로 납세거절, 대정연호 거부, 한인 관공리 퇴직 권고 등을 촉구하는 격문을 만들어 조선독립단의 이름으로 배포하고, 후속호에는≪대한독립신문≫이라는 이름으로 각지의 만세시위 소식과 논설을 실었다. 이들은 평산 면사무소와 가회면 사무소 방화를 기도하기도 하였다.

 신흥군에서는 3월 9일 읍내에서 80명이, 10일에는 보통학교 학생이 중심이 되어 500명이 시위운동을 벌여 헌병 분견소에 2차에 걸쳐 쇄도하며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이원군에서는 3월 10일과 11일 읍내에서 300명의 시위군중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들 시위는 李道宰 등 지사와 천도교 지도자들이 ‘조선독립이원지단’을 결성하고 선도하였던 것이다. 14일과 18일·20일에도 읍내 시위가 있었는데, 20일의 시위는 천도교인들이 중심이 되어 1,500명이 헌병분견대를 습격하는 등 치열한 양상을 나타내었다. 11일 시위운동은 남면 遮湖로 번져 보통학교 학생 및 주민 1,500여 명이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13·16일에도 계속 시위운동이 있었다. 동면의 시위는 11일 상화리 청년들 중심으로 시위운동이 있었다. 14일 동화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된 70명, 15일 천도교인 중심의 300명, 27일 1,000명의 시위운동으로 계속되었다. 동면 시위 중 “우리에게서 빼앗아 간 세금을 도로 내 놓아라”는 요구도 제기되었다.

 단천군의 만세시위는 3월 10일 300명의 천도교인이 교당에 모여 敎祖 순도 기념식을 거행하고<독립선언서>를 낭독한 후 1,000명의 주민들과 함께 시가행진에 돌입함으로써 시작되었다. 헌병주재소에 쇄도하는 군중을 향하여 마구 사격을 가하여 7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였다. 22일 북두일면 대신리 주민 300명은 단천 읍내 참상에 분개하여 헌병분견대에 쳐들어가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였다. 헌병들은 또다시 시위군중에 발포하여 8명이 현장에서 숨졌다.

 고원군에서는 3월 3일 향교에서 광무황제 추도식을 베풀고 6일 천도교인을 중심으로 읍내에서 시위운동을 벌였다. 19일 기독교인들이 읍내 하시장에서 100여 명이 모여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풍산군에서는 3월 14일 풍산 천도교당에서 1,000명의 시위군중들이 독립기원 기도와 연설을 듣고 일제의 만행을 규탄하며 독립만세를 외쳤다. 헌병들이 칼과 몽둥이로 군중을 해산시키려 하자 시위군중은 헌병분견소로 쳐들어가 기물을 부수고 병기를 탈취하려 하였다. 이때 초소에서 일제 사격을 가해 2명이 숨지고 10명이 부상을 입었다.

 갑산군에서는 3월 15일 천도교 교당에 200여 명의 교인들이 모여 시위행진을 시작하였다. 시위군중은 1,000명으로 불어났고, 시위대는 헌병의 제지를 뚫고 군청을 습격하였다.

 장진군에서는 3월 14일 고토리 주민 200여 명이 독립만세를 외치며 시가행진을 하다 저지하는 헌병들과 충돌하여 헌병주재소로 쇄도하였다. 이에 하갈리 헌병대의 지원을 받아 발포로써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덕원군에서는 3월 15일 중평장에서 300명의 시위가 벌어져 19명이 구금당했다. 24일 읍내에서 수백 명이 시위운동을 벌이며 헌병분견소를 습격하였다.

 홍원군에서는 3월 16일 홍원장날을 기해 천도교인이 중심이 되어 7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튿날에도 1,000명의 시위군중이 읍내에서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22일 용포면과 인근 부락민 400여 명이 중평리 사자목 산등성이에 모여 평포 경찰관주재소로 진격하였다. 일경의 발포로 인해 1명이 죽고, 5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58명이 검거되었다. 4월 8일 포청면 삼호리 100명의 어린이들이 손에 태극기를 들고 시위운동을 벌였다.

마) 함경북도

 함경북도의 만세시위운동은 3월 10일 성진, 12일 길주, 15일 명천과 경성 등 함경남도와 접한 군들에서 먼저 시작되어 점차 3월 하순과 4월초에 가면서 회령·청진·부령·무산·온성·경흥·명천 등지로 퍼져갔으며, 대체로 중기에 시작하여 후기에 걸쳐 산발적인 시위운동이 일어났다.

 성진군은 함경북도 독립만세 시위운동의 시발이었다. 3월 10일 그레이슨(具禮善) 목사의 재동병원 앞에 旭町교회 교인을 비롯한 주민들 수백 명이 모여<독립선언문>을 낭독하고 시가행진에 돌입하였다. 제지하는 일본 군경과 시위대 사이에 투석전이 벌어졌고, 나남에서 기병 14명이 증원되어 시위대를 해산시켰다. 이날 臨溟에서도 밤 11시 경 기독교인을 중심으로 3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11일 이른 아침부터 일본인 소방대들이 한국인 거리롤 돌아다니며 닥치는 대로 도끼로 찍고 총을 쏘아 죽거나 부상을 입는 사람들이 속출하였다. 오전 10시 경 기독교인 700명이 재동병원 앞에 집결하여 시위운동을 재개하였다. 일본 군경과 소방대 약 100명이 동원되어 발포로 1명이 죽고 9명이 부상당하였으며, 54명이 구금되었다. 이날 보통학교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200명이 다시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학서면 천도교인 1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12일 학성면 주민 250명이 산위에 올라가 봉화를 올리고 만세시위를 벌였다. 13일 송흥에서 200명의 만세시위가 있었고, 14일과 15일에는 荷川에서 종과 큰 북을 치며 200명의 군중들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길주군에서는 천도교 지도자들이 중심이 되어 3월 12일 길주 장날을 기하여 1,000여 장꾼들과 더불어<독립선언서>를 낭독하고 만세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병 30명이 출동하여 총칼로 시위대를 저지하였다. 13일 덕산면 일신동 주민 30여 명은 산봉우리에 모닥불을 피우고 만세를 불렀으며, 같은 면 300명의 일부 시위대는 海子浦에 있는 일본 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14일 동해면 용원동 일대 주민 1,500명은 독립만세를 부르며 용원시장에서 헌병주재소까지 시가행진을 벌였다. 길주 헌병대에서 응원대가 급파되어 총을 난사하여 3명이 죽고 6명이 부상을 당하며 해산하였다. 15일 웅평면 용천동 사람으로 간도에 이주해 있던 馬河龍이 독립운동 소식을 듣고 귀향하여 웅평면 사무소 앞에서 주민 300명과 함께 만세시위를 주도하다 붙잡혀 옥고를 치루었다.

 경성군에서는 3월 15일 전날 예비검속으로 시위를 계획했던 천도교인 중심의 주동인물 대부분이 체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500여 주민들은 輸城 거리에 모여 시위운동에 들어갔다. 일본군 60명이 출동하여 경계를 펴고 있던 터라 104명이 체포되고 시위대는 해산하였다. 해산한 500명의 주민들은 저녁 8시 경 시위운동을 재개하였다. 20일 어대진 항의 주민 7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으며, 4월 9일 인근 주민 1,000명이 다시 어대진에 모여 시위를 벌였으나 일본 군경의 총검에 의해 해산되었다.

 명천군은 3·1운동 기간 중에 함경북도에서 가장 치열하고 줄기차게 시위운동을 전개하였다. 3월 14일 下加面 花臺洞에 5,000명의 시위군중이 몰려들었다. 함경북도 최대의 시위인파가 모인 이곳 시위대가 독립만세를 부르며 헌병분견소에 이르자 일본 기병 15명이 출동하여 무단발포함으로써 5명이 숨지고 10여 명이 부상을 당하였다. 15일 주민들은 다시 화대장터에 모여 하가면 사무소로 쇄도하여 면장을 끌어내어 만세를 부르도록 요구하고, 헌병분견소로 나아가 압박하였다. 기마헌병이 다시 시위군중에 무단발포를 가하여 4명이 숨지고 남녀 11명이 부상을 입었다. 16일 阿間面 시장에서 400명, 17일과 19일에는 상고면 보촌동에서, 18일 雩社場에서 군중 700명이 시위운동을 벌였으며, 21일에는 雲滿臺에서 수십 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이후 휴지기를 거친 다음 4월 8일과 9일 서면 雩東洞에서 운동사립학교 교사를 중심으로 300명이, 14일 산성동과 고성동에서 각각 300명, 200명의 시위운동이 있었다.

 회령군에서는 3월 19일부터 일제의 주밀한 경계에도 불구하고 각종 격문과<독립선언서>들이 거리에 나붙기 시작하였다. 25일 회령교회 崔景在 장로 등이 교인 30여 명과 함께 우편국 앞에서 시위운동을 시작하자 졸업식에 가던 보통학교 학생들과 교사와 학부형들도 이에 합류하여 순식간에 수백 명의 시위대열을 이루었다. 26일에도 전날에 이어 보통학교 학생들과 교회 신도, 신흥남학교와 보흥여학교 학생들이 합류하여 시위운동을 벌였다. 27일에는 벽성면 영완동에서, 28일에는 봉의면 남산동에서, 29일에는 화풍면 인계동 고령진 등지에서 각각 소규모 시위운동이 있었다.

 청진부에서는 3월 31일 400명의 시위군중이 정오에 신암동에 모여 만세시위를 전개하였다. 尹炳厚 등이 중심이 된 이 시위운동은 주동인물 6명이 체포되면서 해산되었는데, 군중의 일부는 주동인물의 석방을 요구하며 신암동 일대에서 다시 시위를 벌였다. 4월 1일 다시 450명의 시위군중이 인암동에서 시위운동을 벌였다. 이날 또한 포항동에서도 200여 시위군중이 독립만세를 부르며 시가행진을 하다 출동한 청진부 직원과 경찰의 제지를 받고 해산하였다. 그러나 이중 100여 명은 청암면 도동까지 20리 길을 행진하며 계속 만세를 고창하였다. 19일 신암동 주민 150명과 인곡동 주민 100명 등이 다시 시위운동을 기도하였으나 사전에 발각되어 주동인물들은 검거되어 고문을 당했다.

 부령군에서는 4월 1일 道洞에서 천도교인 100명이 만세시위를 벌였다.

 무산군에서는 연사면 四芝洞 모범서당 훈장 南學九의 주도로 4월 1일 서당학생, 연사공립보통학교 학생과 주민들이 시위운동을 벌였다. 7일에는 무산공립보통학교 재학생·졸업생, 주민이 합세하여 시위운동을 전개했다.

 온성군에서는 4월 4일 연흥면 회덕동 회동교에서 250여 명의 군중이 모여 독립만세를 부르며 영춘면 사무소를 지나 北蒼坪 시장으로 행진해 갔다. 일본 헌병들이 총칼로 저지하자 군중들은 돌과 나무막대로 대항하였다. 헌병들의 무차별 발포로 2명이 사망하고 3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명이 체포되었다.

 경흥군에서는 4월 8일 저녁 읍내 경흥보통학교에서 청년 15∼16명이 모여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시작하던 차에 출동한 헌병에 의해 주동인물이 구속됨으로써 해산하였다.

<李廷銀>

  * 이 글의 내용은 집필자의 개인적 견해이며, 국사편찬위원회의 공식적 견해와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