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통화현
통화현 지역에서는 3월 12일 金斗伙洛의 금두화교회에서 기독교인과 한인청년회가 주도하는 가운데 快當帽子 부근에서 한인 400여 명이 만세를 부르며 시위운동을 전개한 것으로 시작되었다. 금두화락 시위운동에서는 일본 밀정노릇을 해 왔던 계성주를 붙잡아 반역죄로 평결한 다음 3일 뒤 처단하였다. 한인청년회는 독립운동자금을 모금하는 등 본격적인 독립운동을 시작하였으며, 20일까지 운동이 지속되었다. 그러나 이 지역에서는 일제와 중국 관헌의 집중적인 경계와 단속이 심하였기 때문에 대규모 시위운동으로 발전하지는 못했다. 따라서 이 지역 시위운동 주도자들은 서간도 각지에 파견되어 3·1운동을 촉진하였다. 유하현 삼원보, 통화현 哈泥河 지역의 부민단원·기독교인·학생들은 압록강 방면 이주 한인촌, 국내 등 각지에 연락하여 태극기를 게양하고, 五人班 등 독립운동의 하부조직을 만들게 하였으며, 각지에서 독립운동축하회와 독립운동비를 각출하는 등 서간도 독립운동을 새롭게 활성화시켰다.651)
4월 들어 통화현 쾌당모자 금두화락 부락민들은 총기구입과 700벌의 피복을 제조하고, 군사훈련을 하였으며, 우마를 징발하고, 군사비를 거출하였다.
금두화락의 吳成範은 170명의 무장대를 이끌고 4월 10일 압록강 연안의 헌병대를 습격하고자 집안현 동취보 흑소자구에 집결하였다. 12일에는 쾌당모자의 尹德培와 왕청현의 林弼東은 600명의 무장대를 이끌고 집안현 운지구에 집결하여 친일단체 조선인조합 지부와 일제 경찰을 습격하고자 하였다. 삼원보의 부민단의 명칭이 독립단으로 변경되었던 것도 이러한 무장투쟁의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다.
651) | 姜德相,≪現代史資料≫27, 110쪽. 서굉일, 위의 글, 428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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