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니콜리스크
1919년 2월 20일 니콜리스크 한족중앙총회 및 조선인민회의 간부와 기타 조선인들이 광무황제 추도회를 집행하였다. 이 회에 참석한 한인들은 망국의 설음이 크게 복받쳐 회의장은 곡성이 가득하였다. 이 追悼會는 항일의식을 고취하는 데 큰 효과가 있었다.667)
3월 10일 경부터 니콜리스크로 각 지방의 한인들이 모여 들었다.668) 14일 니콜리스크 한족중앙총회 회장 문창범은 오코츠크(Okhotsk) 지회 앞으로 다음과 같은 전문을 발송하였다.
조선이 머지 않은 장래에 독립을 얻는다는 것은 말하기 곤란하나 조선국민의회는 이의 부흥에 대해 모든 방법을 강구하고 있으며, 평화회의에는 대표자 2명을 파견하였다. 기부금은 조선국민의회 앞으로 송부하라(朝鮮軍參謀部,<露國雜件(1919년 3월 21일)>, 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3·1운동편 其3, 1979, 111쪽).
이를 통해 보면 조선독립을 성취할 주·객관적인 현실을 직시하면서 여러 가지 독립을 쟁취할 계획을 강구하고 있었음을 볼 수 있다.
니콜리스크에서는 3월 17일 아침 선언서를 발표하고 다수의 조선인이 모여 운동을 개시하였다. 그 중 일부 약 100명은 라즈돌노예(Razdoloye)에 도착하여 운동을 하려고 계획하고 있다. 3월 21일 라즈돌노예에서 약 300명이 집합하여 일본군대를 습격한다는 소문이 있어 러시아 민병이 이들을 해산시켰다.669)
블라디보스톡에서는 3월 18일 이후에는 조용하였으나, 니콜리스크에서는 14일 옴스크(Omsk)정부의 명령으로 국민의회를 해산시켰고, 18일 경 그곳 한인 중진들이 러시아 당국의 검거를 피해 일시 피신해 있었다. 그런 가운데서도 문창범·김철훈 등은 18일 니콜리스크에 돌아와 있었고, 洪範圖 등 의병출신자들은 국민의회의 명령이라 하여 독립운동의 준비로 분주했다. 이들은 간도방면에서 온 지도자들과 함께 포시에트 지방에서 비밀리에 무기구입에 노력하고 있었다.67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