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대한독립단
大韓獨立團은 양서지방에서 활동하다 북상한 의병 계열인 朴長浩·趙孟善·白三奎·全德元 등이 1919년 4월 조직한 독립군단이다. 본부는 유하현 삼원포 西溝 大花斜에 두었으며, 국치 직후 의병 계열의 망명지사들이 조직하였던 保約社·鄕約契·農務契 등을 통합 확대한 것이다. 대한독립단의 대표인 도총재에는 박장호, 부총재에는 백삼규가 선임되었으며, 그 아래에 咨議部長 朴治翼, 총참모 趙秉準, 총단장 조맹선 등이 핵심간부로 활동하였다. 이와 같은 중앙본부 산하에 대한독립단은 서간도와 국내 각지에도 수많은 지단과 지부를 두고 군인징모와 군자금 모집활동을 벌여 전력을 강화하는 한편 수시로 압록강 대안의 국내로 잠입, 일제 군경과 교전을 벌여 나갔다.424)
대한독립단은 1919년 5월까지 세력 확장을 위해 군자금 모집과 군인징모 활동에 전력을 기울였다. 그 결과 이 시기 동안 6∼7백명의 장정과 3만원의 군자금을 모집할 수 있었다. 수집된 군자금은 무기 구입에 사용되었으며, 모여든 장정들은 북만주로 보내 군사훈련을 받게 하였다. 그 뒤에도 장정들이 계속 모여들어 1919년 8월까지 그 수가 1,500명에 달하였다고 한다.425)
그러나 대한독립단은 1919년 말 연호 사용문제를 계기로 이념과 노선에 따라 조직이 양분되기에 이르렀다. ‘檀紀’ 또는 ‘隆熙’ 사용을 주장하는, 곧 조선왕조의 회복을 기대하는 복벽주의 세력과 임시정부 연호인 ‘民國’ 사용을 주장하는 공화주의 세력간의 대립이 그것이다. 그 결과 복벽주의 계열은 기원독립단을, 공화주의 계열은 민국독립단을 각각 조직함으로써 단은 양분되었다. 복벽주의 계열은 도총재 박장호를 비롯해 백삼규·전덕원 등 유인석 계열의 노년층 인맥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공화주의 계열은 趙秉準·金承學 등 비교적 소장파 인사들이 중심이 되었다. 그 가운데 민국독립단 계열의 인사들이 대한청년단연합회·평북독판부 등의 독립군단들과 함께 광복군총영을 결성하였고, 복벽주의 계열의 인사들은 계속 대한독립단을 유지하며 항일 무장투쟁을 전개하였다.4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