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 광복군총영
3·1운동 직후 조직된 서간도지역의 여러 독립군단은 보다 효과적인 독립전쟁을 전개하기 위해 하나로 통합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평북독판부 대표인 조병준·金承萬과 대한청년단연합회 대표인 安秉瓚·金贊聖, 그리고 대한독립단의 대표 김승학 등이 1919년 12월 경 寬甸縣 香爐溝에서 회의를 개최한 것은 이러한 목적에서였다. 회의 결과 이들 대표들은 현재의 각 독립군단을 해체하고 통일기구를 조직할 것을 결의하였다. 1920년 2월에 김승학·안병찬·이탁 등이 상해로 파견되어 이 사실을 보고하였다. 이에 따라 임시정부에서는 남북만주에 임시정부 직속기관인 광복군을 설치할 것을 결정하고 그 부속기구로 민정을 관장할 參理部와 군사활동을 관장할 司令部, 그리고 독립군영인 수개의 軍營을 설치토록 하였다.
임시정부의 이와 같은 결정에 따라 관전현에는 1920년 초에 광복군이 조직되었다. 광복군은 성립과 동시에 각 부서를 영도할 지휘관을 임명하였는데 참리부장에는 조병준, 사령부 사령장에는 조맹선이 임명되었고, 邊昌根·吳東振·洪植·崔時興·崔燦·金昌坤 등이 각 군영의 營長을 맡았다.
한편 光復軍總營은 광복군 본부가 조직되고 난 후 얼마 되지 않아 오직 군사적 목적만을 수행할 특수부대로서 조직되었다. 즉 각지에 분산되어 있던 광복군의 각 군영은 일제의 감시와 탄압으로 인해 활동이 위축되고 부대 상호간의 연락이 어려워졌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광복군의 제2영장인 오동진이 휘하 부대를 인솔하고 관전현에 주둔하면서 자신의 부대를 광복군총영으로 개칭하게 되었던 것이다. 광복군총영장에는 오동진이, 그리고 경리부장에는 참리부장인 조병준이 선임되어 이들을 주축으로 활동에 들어갔다. 한편 국내의 천마산대를 광복군 天摩別營, 碧潼과 波瀦江(渾江) 연안에서 활동하던 무장단체를 碧波別營이라 각각 부르고 일제 군경을 상대로 활발한 항전을 벌였다.429)
임시정부 산하의 군사기관으로서 항일전을 전개한 광복군총영은 1920년 한해 동안에도 일본군경과의 교전이 78회, 일제 주재소 습격이 56개소, 면사무소 및 영림창 소각이 20개소, 일제 경찰 95명을 사살하는 전과를 올렸다.430)
이상에 언급한 독립군 부대 외에도 안도현 奶頭山(內島山)에 근거지를 두고 있던 大韓正義軍政司, 북만주 中東線 일대의 野團과 血誠團, 훈춘 일대의 復皇團, 서간도의 光復團·太極團·白山武士團 등 수많은 독립군단이 1919∼1920년간에 만주·연해주 일대에서 편성되어 일제와의 독립전쟁을 표방하고 활동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