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사회적·정치적 정책과 활동
신간회 각 지회의 정책과 활동은 크게 사회적인 것과 정치적인 것으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사회적 범주의 활동은 크게 ① 계몽운동, ② 생활·생존권 수호운동, ③ 반봉건운동 형태로 나타났다.
먼저 계몽운동의 가장 주된 형태는 웅변대회와 연설회 개최 및 야학의 운영이었다. 연설회의 주제는 신간회의 선전과 신간회를 통한 민족 결집의 달성이 주된 내용이었으며, 웅변대회의 주제는 미신 타파, 黑衣 착용, 조혼금지, 斷煙과 아편 추방, 매춘과 풍기문제 등으로 주로 계몽적 성격을 띤 것이었다. 그리고 야학의 교사나 경영자로의 참여나 야학을 지회에서 직접 경영함으로써 문맹퇴치운동을 전개하는 활동을 벌였다.
둘째, 생활·생존권 수호운동은 민중의 더 나은 경제생활 영위를 위한 방편임과 동시에 계층·계급으로부터 생존의 권리를 확보하려는 투쟁운동이었다. 생활수호운동에서 가장 일반적으로 나타나는 것은 소비조합의 설치였다.340) 또한 인구밀접지역인 도시에 기반한 지회들은 주로 借家문제에 관해 활발한 논의를 전개하는 한편, 차가료 인하운동 전개, 차가인동맹 조직, 차가인 보호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생존권수호운동은 대부분 농민운동·노동운동 및 사상운동·신간회운동이 결합된 형태로 나타났으며, 그 성격은 반제운동적인 것으로서 일제의 통치정책 철폐와 수정을 요구하는 형태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그 전개양상은 토지개량조합 철폐, 戶稅 인하, 수리조합 횡포 타파, 수리조합 설치 반대, 酷稅 폐지,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 노동조건과 노동임금에서 민족적 차별 철폐, 각 부 농회 반대, 조선인 착취기관의 폐지, 최저임금제 확립 같은 요구가 대종을 이루었다. 그러나 이러한 반제적 성격을 띤 요구는 일제의 정치 정책의 전환없이는 실현불가능한 문제였다.
셋째, 반봉건운동은 당시 조선의 현실상황을 가장 잘 반영하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은 보편적으로 봉건적 질서가 널리 잔존하고 있었다. 따라서 생존권운동과 농민운동에서 드러나는 지주의 소작인에 대한 노동 착취, 지주의 소작권 임의변동, 수확의 최고 80%에 이르는 소작료 따위 등 현존하는 봉건적 잔재가 일반적 양상으로 엄존해 있었다. 그러므로 토지에 대한 농민적 소유제가 확립되지 않는 한 농촌사회에서 일어나는 농업문제는 필연적으로 반봉건운동이 될 수밖에 없었다.341)
이러한 사회활동과 더불어 전개된 정치적 활동은 일제하 식민지적 상황 속에서 사실상 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신간회 각 지회의 회의에서 주로 논의되는 안건은 정치문제·경제문제·사회문제가 보편적이었다. 이때 정치문제로 포함되는 것 중의 하나는 억압과 착취에서 벗어나려는 자유에 대한 요구들로서, 언론·출판·집회·결사의 자유에 대한 요구, 각종 억압 법률의 철폐, 단결권·파업권 보장 같은 것들이었다. 이것은 결국 민족문제까지 포괄하는 성격의 것이었다.342) 그러나 실제 이 정책안들은 그 지회의 구체적 실천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다. 신간회가 하나의 정치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농민·노동·여성·학생·소년·형평운동 등 모든 부문운동세력을 지도·동원할 수 있는 조직적 연계를 확보하는 것이 선결과제였다. 이러한 사실을 잘 간파하고 있던 신간회 관계자들이었기에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한 신간회지회의 활동은 사회적 활동에 집중되었고, 이 부분에서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회적 활동은 신간회 창립 이전부터 각종 부문운동들이 전개해왔던 활동들이었으므로 ‘정치적 투쟁’을 목표로 했던 신간회 내부로부터 여러 가지 문제가 제기되는 원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