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야학
1927년 이전의 여성운동은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운동이 전부였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각 지방의 교회와 청년회에서 야학을 설치하여 문맹 부녀자에 대한 단기교육으로 큰 성과를 거두었다. 좌파 여성들은 문맹퇴치가 우리 나라 여성운동의 전부일 수 없음을 이미 신랄히 비판하고 여성의 이중삼중의 압박상을 새로 인식하고 이 압박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한 투쟁의식을 진작, 고양하는 것이 근우회운동의 목적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농촌부인 및 도시 근로층 부녀의 대다수가 문맹이었으므로 문맹퇴치를 위한 야학운동은 여전히 절실한 것이었다. 1930년 대회에서 종래 여성해방운동을 비판하고 문맹퇴치운동에 역점을 두어야 함을 의결한 것도 이같은 우리 나라의 현실적 정황을 잘 반영한 것이다. 이것은 또 여성의 인간답게 살 권리를 갖게 하는 것이었다.
60여 지회 중 야학운동을 한 지회는 불과 몇 개에 지나지 않았던 것은 1927∼1930년의 근우회 운동의 이같은 방향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야학을 실행한 지회는 김천·담양·명천·김해·진주·영흥·간도·군산 등의 지회뿐이었다.
이상에서 각 지회의 보편적인 사업활동 중 중요한 것만을 추려 언급하였다. 이밖에 지회의 특성에 따른 특수활동을 하였던 점들에 대해서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최고급 지식여성들로 조직된 동경지회의 경우 1928년 2월 20일 신간회 전국대회를 금지한 데 대하여 일본의 다나카(田中)수상과 조선총독에게 엄중한 항의를 한 것, 또는 軍威 등의 부인직업소개소의 설치운동, 동경·원산 등 지회의 사회주의운동으로 검속 중에 있는 회원가정의 방문 및 여공파업에 대한 개입 등이 그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