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근우회의 해소
근우회와 같은 목적, 같은 이념의 운동을 추진하는 신간회의 제반 움직임은 근우회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신간회는 1931년 1월에 이미 利原지회에서 해소를 결의하였다. 신간회 해소는 다른 지회에 급속히 파급되어 갔다. 근우회의 해소론은 단천·북청에서 처음으로 시작되었으나 동조는 약하였다. 근우회 이원지회에서도 1931년 4월 15일의 제2회 정기대회의 의안 토의사항에서 해소문제가 처음으로 크게 논의되었으나 그 문제를 전국대회 때까지 보류하기로 합의하였다.
근우회 해소론은 처음에 지회에서 일어났다. 최초로 해소를 결의한 신의주지회는 1931년 3월 31일 제4회 정기대회에서 “기설 운동단체 해소문제로 근우회운동도 조선 노력부인의 전적 해결을 주기에는 부적당하다”585)는 이유를 들어 해소를 결의하였다. 즉 근우회운동을 통해서는 계급투쟁적인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목적을 달성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1931년 4월 25일 동래지회의 제4회 정기대회 토의사항에서도 해소문제가 논의되었다. 이 지회에서는 “해소는 운동전환의 중대문제인 만큼 당분간 보류할 것”을 결정하고, “금후는 노동여성운동 세력에 대한 강대책을 주 방침으로 세울 것”을 결의하였다.586)
해소론이 비등하는 1931년에 들어서면서 지회 운동은 사실상 아주 약화되어 있었다. 경성지회조차 활동이 거의 중단되어 있었다. 평양·양산 등 몇 지회만이 근우회운동을 추진해 갔다.
당시 해소를 극력 저지하였던 신간회 중앙집행위원장 金炳魯가 지적하였듯이 해소의 원인은, 코민테른(Comintern) 지령에 따라 움직이는 공산주의자의 책동과 더불어 조선총독부 경무국의 탄압 때문이었다. 일경의 계속된 탄압은 조직운동 경험이 약한 여성에게는 큰 위협으로 좌절감을 갖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근우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발기회·창립대회·발회식 이래 행사처럼 따라다녔다. 무장경관과 사복형사가 진을 치고는 축문·축사를 압수하고 의안토의를 금지시켰다. 집행위원회도 자유롭게 진행시킬 수가 없는 형편이었다.
1928∼1930년에 걸친 근우회 연차 전국대회도 탄압으로 한 번도 제대로 진행된 일이 없었다. 1928년 5월 26·27 양일로 예정되었던 제1회 전국대회가 ‘의안의 불온’을 내세워 경찰 당국에서 집회허가를 내주지 않아 의안 없이 7월 14∼16일에 걸쳐 임시대회 명의로 개최할 수밖에 없었다. 그 때 토의하기 위하여 작성된 의안은 ① 중심 슬로건, ② 反戰 결의, ③ 민족운동에 관한 결의, ④ 조직문제에 관한 결의, ⑤ 선전사업에 관한 결의 등이었다. 이 중 조직문제에 주력하여 중심 슬로건으로 ‘노동부인 동원 슬로건’과 ‘학생에 대한 슬로건’을 내세워 근우회운동이 전반적으로 사회주의 경향이 강하면서 또한 반일민족운동적 경향도 짙었는데,587) 이점이 탄압의 초점이 되었다.
1930년 1월 항일민족주의적 학생운동에 근우회 간부가 조직지도에 관련되었다 하여 허정숙·정칠성·박호진·朴次貞 등을 체포·구금하였으며, 강아그니아 등도 공산주의 재건운동에 관련되어 체포·구금되었다. 근우회운동에 대한 일제의 지속된 탄압은 사회주의 여성운동에 동조하지 않았던 지회 운동까지도 힘을 잃고 소멸의 길을 걷지 않을 수 없게 하였던 것이다. 모든 여성운동이 근우회로 집중되었던 만큼 그 해소는 한국여성운동계에 심각한 타격을 주었다. 근우회 해소 이후인 1930년대 여성운동은 일제의 조선민족 말살정책의 강력한 추진 속에서 여성의 자질을 향상시키고 진정한 여성해방을 추구하는 성격의 여성운동은 점차 존재하기 어렵게 되었다.
<朴容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