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로의 합동
형평사는 창립 이후 조직이 급속히 확산되었지만, 곧 이어 앞으로의 전략이나 그 이론적 바탕에 대하여 열띤 논쟁이 벌어졌다. 이 논쟁은 이론적 차이가 무엇인가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역적 대립과 혼재하여 일어났기 때문에 그 논쟁의 중요성이 때때로 흐려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논쟁의 과정에서 중요한 쟁점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차별은 봉건적 잔재인가. 자본주의와 식민통치구조가 결합된 부분인가. 사회주의가 그것을 없애줄 것인가. 이 운동은 누구와 연합하고, 그 연합은 어느 정도 밀접해야 하나. 이 운동은 전체사회에서 자신들의 공동체가 인정받아서 사회주류에 완전히 동화되기를 요구해야 하나, 아니면 단순히 사회가 더 관용을 가질 것을 요구해야 하나. 이러한 쟁점은 전 형평운동 과정에서 끊임없이 제기되는 문제였으며 이러한 운동노선상의 논쟁은 자신들을 위해 일으킨 형평운동을 계속 분열시키는 쟁점이 되었고 그 첫 번째가 형평사혁신동맹의 분립이었다.
형평사는 창립된지 1년도 못되어 분열되어 각각의 전국대회를 개최하고, 상호 비방하며 독자적으로 활동하자, 이에 대한 반성과 두 단체의 합동을 추진하는 움직임 또한 활발하였다. 그리고 분열상태가 계속되는 동안에도 백정에 대한 차별사건은 더욱 다양하게 일어났으나,599) 차별사건에 대해 분열상태의 형평사가 효과적인 대응을 할 수 없었음은 당연했다. 이렇게 되자 지방의 지분사와 차별에 대응해 싸우던 일반 형평사원들은 양파에 적극적으로 통일을 촉구하고 나섰다.
또 당시 지원세력이었던 사회운동단체들의 압력으로 양파는 1925년 4월 24·25일 경성에서 개최된 제3회 전국대회(전조선형평대회)에서 합동을 결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이 대회의 초두에 일시적인 혼란이 있었다. 그것은 1925년 4월 20일부터 개최 예정이었던 火曜會 주최의 全朝鮮民衆運動者大會600)의 참가여부를 둘러싸고 일어났다. 형평사중앙총본부는 발기단체의 하나로 이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 참가를 적극 찬성했으며, 진주·김해·평양 등 17개 형평 지분사도 참가를 표명했다. 그러나 이에 대해 화요회와 대립하고 있던 서울靑年會가 주최한 全朝鮮民衆運動者反對全國聯合大會에 전주를 위시해 김제·강경 등 12개 형평 지분사가 참가를 표명해 총본부의 방침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이 문제는 “금후는 형평사 내부의 결속에만 노력하고 타 사회운동문제에는 적당한 시기까지 관여하지 않는다”는 결정으로 일단 해결을 보았다.
그러나 이것은 이제 형평사가 사상적인 갈등속에서 독자성을 유지하기가 어렵게 되었으며, 일반 사회운동과의 제휴문제가 당면문제로 부각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었다.
≪동아일보≫는 이 제3회 전국대회에 관한 논평에서 “형평사와 청년·노동·농민단체와의 제휴문제, 민족문제와 계급문제에 관한 형평사의 방침이 어떠한가, 이것이 바로 형평사로서는 제일 긴급 필요한 일”이라고 강조하고 있다. 이것은 이제 형평사가 백정에 대한 불평등한 사회적 대우의 차별철폐 운동에만 머물러 있을 수 없게 되었음을 나타낸 것이었다.
또≪開闢≫評壇에서는 전체 백정의 완전한 해방은 무산계급운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형평사의 내부에는 소수의 백정자본가·중산계급과 대다수의 무산백정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 운동이 분열되어 자본가·중산계급은 시민계급으로 가고, 무산백정은 무산계급운동까지 발전하지 아니하면 사실상의 무산백정의 해방은 성취되지 않는다는 것으로, 형평운동의 독자성을 간과한 채 무산계급운동의 일반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1923년경부터 새로이 대두된 각 사회운동은 1924년에 들어와 더욱 광범위하게 전개되었다. 4월에는 노농단체·청년단체의 전국조직인 朝鮮勞農總同盟과 朝鮮靑年總同盟이 창설되었다. 그런데 조선노농총동맹은 4월 20일의 임시대회에서 “형평운동을 원조하는 일”을 결의하였고, 조선청년총동맹도 4월 24일의 임시대회에서 “형평운동을 계급전선에 인도함과 동시에 원조할 것”이라는 주목할만한 결정을 했다. 또한 동년 11월에 조직된 사상단체 北風會의 강령중에서도 노농·청년·여성운동과 함께 “형평운동의 지원과 계급적 훈련”이 명문화되어 있었다.601) 이러한 사회운동계의 움직임은 형평사가 사회운동단체 혹은 그 집회에 참가하는 계기가 되었다. 김제·진주 양 형평청년회가 조선청년총동맹에 가입한 일, 1924년 6월에 일제의 언론탄압에 항의하는 言論集會壓迫彈劾會에 형평사 혁신동맹이 참가하고 있는 것 등에서 엿볼 수 있다. 특히 후자는 일제의 통치정책에 적극적으로 반대 의지를 표명한 것으로 특기할 만하다. 이러한 형평사의 움직임은 부분적인 것이었으나, 확실히 운동의 일보전진인 것으로 사회운동 민족해방운동의 접근이라는 점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었다.
그리하여 분열상태의 양파가 회동한 전국적 규모의 이 제3회 전국대회에서는 형평사와 타사회운동 단체와의 제휴문제가 실제문제로 부각되었다.
또 하나, 이 제3회 전국대회의 중요한 의의는 처음으로 사원의 생활문제가 중시되고 있는 점이다. 구체적인 실천방안과 그 투쟁과정은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① 도수장에 관한 건, ② 수육판매에 관한 건, ③ 우육건조에 관한 건, ④ 도부요금에 관한 건, ⑤ 야태박살에 관한 건 등이 토의되었다. 그리하여 제3회 전국대회 이후 사원들의 생활문제를 둘러싼 투쟁은 더욱 활발해지게 되었다.602)
이와 같이 대립되었던 양파가 회동한 제3회 전국대회 이후, 형평운동은 새로운 단계로 발전해 나갔다. 통일의 회복으로 형평사의 조직도 더욱 확대해 나갔다. 별동기관으로 각지에 형평청년회가 조직되고 그 중앙기관으로서 12월에는 衡平社靑年總聯盟이 결성되어 사회주의적 강령을 내걸었다. 또 아동교육을 목적으로 하는 衡平學友會가 8월에 조직되어 각지에 권학단을 파견하였다. 형평여성단체도 조직되었고, 논조가 과격하다하여 곧 발금처분을 당했지만 기관지≪世光≫도 발행하였다.
599) | 5월에 水原에서는 형평사원이 말씨가 무례하다고 하여 집단폭행을 당하고(≪동아일보≫, 1924년 5월 26일,<衡平社員의 憤起>; 5월 28일<在京衡平社員 水原에 出張>), 慶南 進永에서는 장날에 차별발언을 한 상점주와 말다툼을 한 형평사원을 수십 명의 행상이 뭇매를 때리는 사건이 일어났다(≪동아일보≫, 1924년 5월 17일,<衡平社員과 爭鬪>). 또 7월에는 충남 천안군 笠場面의 사립보통학교에서 백정자제를 퇴학시킨 것을 계기로, 형평사와 학교 학부형간의 대립이 약 한달반이나 계속되었다(≪동아일보≫, 1924년 7월 18일,<白丁子弟의 退學問題>; 7월 21일,<笠場普通學校와 白丁子姪의 退學>; 7월 23일,<警官監視下에 學契員 學父兄大會>; 8월 1일<天安笠場事件의 根本的 解決을 圖謀>; 朝鮮總督府官房文書科,≪朝鮮の群衆≫조사자료 16, 1926, 191∼195쪽;金義煥, 앞의 글, 69∼72쪽). |
---|---|
600) | 전조선민중운동자대회는 일제에 의해 사전 금지되었는데, 대회금지의 구실이 되었던 토의내용중에서 형평운동에 관한 건만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형평운동에 관한 보고 및 의안> ① 형평운동의 근본방침 및 전국면에 관한 건. ② 차별대우에 대한 태도에 관한 건. ③ 형평사원 교양에 관한 건. ④ 기념일에 관한 건. ⑤ 기타. 金俊燁·金昌順, 앞의 책(1969), 273쪽. |
601) | 金俊燁·金昌順, 위의 책, 40·96∼97·145쪽. |
602) | 安成에서는 4월28일에 수육판매조합이 결성되었고(≪동아일보≫, 1925년 5월 4일), 開城에서는 형평사원과 수육판매업자간에 도부요금 문제로 충돌이 생기자 동맹파업을 단행하여 屠夫事를 일체 거부하였다(≪동아일보≫, 1925년 5월 7·9일). 진주에서도 일반민의 購買組合이 형평사의 우육판매가격협정에 대항하여 조직되자 동맹파업을 결의하였다(≪동아일보≫, 1925년 5월 8·9일). 이후 전북 경북도지사대회에서도 피혁문제가 논의되었고(≪동아일보≫, 1925년 6월 14일, 7월 6일), 서울에서는 도부조합(형평사원)과 판매업자(일반민)가 대립하고 있었다(≪동아일보≫, 1925년 11월 23일). 이와 같은 상황에 대해 본부에서는 사원의 생활문제에 관한 조사를 위해 지방순회위원을 선출 파견하였다(≪동아일보≫, 1925년 12월 20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