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독립운동정당의 성립과 활동
(1) 한국독립당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중국관내에서 유일당운동이 펼쳐졌다. 대독립당북경촉성회를 출발점으로 하여 상해·광동·무한·남경 등에서 유일당촉성회가 결성되었고, 1927년 11월에는 이들 관내지역 유일당촉성회 대표들이 상해에 모여 ‘한국독립당관내촉성회연합회’를 결성함으로써 한 발자국 진전시켰다. 임시정부가 민족대당이 완성되면 최고의 권한을 모두 거기에 넘긴다는 내용이 든 개헌안을 통과시키고, 국무위원 전원이 유일당운동에 참여하는 파격적인 자세를 취했음에도 불구하고 결실을 맺지 못하였다. 1929년에 들어 분열의 기미를 보이다가, 결국 1929년 10월 26일에 좌파세력이 유일당상해촉성회를 일방적으로 해체하고 留滬韓國獨立運動者同盟(滬;상해의 별칭)을 결성하여 중국공산당과 연대투쟁을 벌이거나 그 범주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하면서 좌우합작운동은 일단 중단되고 말았다.
상해지역의 좌파세력이 이처럼 독자적인 길을 걸어가게 되자, 임시정부 유지세력은 독자적인 방안을 찾았다. 그 결과 1930년 1월 25일에 임시정부 청사에서 韓國獨立黨이라는 정당체를 결성한 것이다.471) 유일당운동으로 추구된 단체가 정당이요 단일당이었지만, 좌파세력이 결별을 선언한 상태에서 임시정부를 유지할, 즉 이당치국의 존재로서 정당을 결성한 것이다.
이 한국독립당은 李東寧·安昌浩 등 임시정부 유지세력이 “종래의 지방적·파벌적 감정을 버리고 민족주의의 입장에서 新旗熾下에 전선의 통일”을 도모하려는 뜻에서 결성되었다. 안창호는 이를 ‘대독립당’이라거나 ‘한국독립운동을 위한 최고기관’이라고 표현하였다.472)
한국독립당 결성의 주역은 이동녕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핵심세력과 흥사단의 안창호였다. 임시정부 핵심세력은 임시정부의 기능강화와 이에 따른 독립운동의 활성화를 도모코자 했고, 안창호는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독립운동의 최고기관을 수립코자 했다. 그러나 임시정부를 어렵게 고수해 온 이동녕·金澈을 비롯한 임시정부의 간부들은 “과거 10여 년이란 역사를 가진 정부를 해산함은 불가하며, 설령 새로운 기관을 설립한다고 하더라도 반드시 이 보다 유리하다고는 할 수 없다”고 했다.473) 이러한 상반된 견해가 조정되어 한국독립당이 결성되었다. 따라서 한국독립당은 유일당운동이 결렬되면서 민족주의세력이 임시정부를 강화하고 이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의 주도권을 장악하고자 조직한 것으로 임시정부의 여당이 되었다.
한국독립당은 1930년을 전후하여 결성된 제 정당과는 다소 그 성격을 달리했다. 즉 이 당은 정착된 정당조직의 모습을 갖추었는데, 그 이유는 정부와의 관계와 성숙성 및 정강·정책의 완성 때문이다. 한국독립당은 以黨治國의 체제를 갖춘 소위 ‘중국국민당정부’처럼 ‘한국독립당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1930년에 조직되어 1932년 5월 항주로 옮겨간 이 당은 1940년 重慶에서 조직된 같은 이름의 한국독립당과 달리 임시정부의 與黨이라기 보다 임시정부 그 자체였다.474)
당의 중심인물은 모두 임시정부의 주요 직책을 갖고 있었다. 1927년 8월에 조직된 국무위원은 이동녕(국무회의주석 겸 법무장)·金九(내무장)·吳永善(외무장)·김철(군무장)·金甲(재무장) 등이었고, 1930년 6월에 오영선의 사직으로 趙素昻이 외무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11월 8일 의정원 회의에서 임기(3년) 만료로 인한 국무위원 개선에 따라 선출된 국무위원은 이동녕(법무장·주석)·김구(재무장)·趙琬九(내무장)·조소앙(외무장)·김철(군무장) 등이었다. 그 외 주요직은 군사위원회위원장 尹琦燮, 외교위원회와 경제위원회 위원장에 안창호, 임시의장에 이동녕, 부의장에 車利錫이었다.475)
한국독립당은 그 이전에 전혀 볼 수 없던 성숙된 정강·정책을 마련했다. 한국독립당의 정강·정책을 입안한 자는 조소앙이었고, 따라서 그의 三均主義가 당 이념의 기본구조가 되었다. 이 내용의 골격은 결국 민주독립국가의 수립과 균등제도의 실현을 목표로 한다는 것이었다. 조소앙의 삼균주의를 기본골격으로 한 한국독립당의 이념을 살펴볼 때 세 가지의 특성으로 구분해 볼 수 있다. 민족주의·민주주의의 성격, 대일투쟁 방법으로 민중적 항일투쟁과 무력적 파괴의 두 가지를 제시한 점, 토지와 대생산기관을 국유로 한다는 사회주의적 성격 등이 그것이다. 한국독립당의 정강·정책은 1930, 1940년대에 조직된 대다수 정당의 본보기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큰 의미를 가진다.
한국독립당은 투쟁방략으로 민중적 반항과 무력적 파괴를 제시했다. 이것은 만주의 한국독립당과 朝鮮革命黨처럼 군사조직을 갖추지 못한 상황에서 요인암살이나 적 기관의 파괴와 같은 소규모의, 그러면서도 효과 있는 투쟁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던 데에 기인하였다. 그러므로 1930년대 초 한국독립당의 항일투쟁활동은 이러한 무력적 파괴·요인암살 등이 주된 흐름이었고, 당시의 상황으로서는 최선의 방법이었다.476) 그리고 이 투쟁방략은 한국노병회의 독립전쟁준비방략과 병인의용대의 의열투쟁방략을 계승한 것이었다.
한국독립당은 산하 각 부문단체를 통해 활동을 전개하기도 했다. 그 산하 부문단체로는 비밀결사인 한인애국단을 비롯하여 상해한인청년당·상해애국부인회·상해한인여자청년동맹 등이 있었다. 한국독립당의 활동 가운데 중요한 것이 중국국민당의 지원 획득이었다. 1930년 5월 초에 남경에서 개최된 제4차 중국국민당중앙집행위원회의 개회와 張學良이 남경을 방문한 기회를 맞아 중국 거주 한인문제에 관해 청원하기 위해 조소앙과 朴贊翊이 대표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남경에서 蔣介石·장학량을 비롯한 중국국민당의 요인을 방문하고 한국독립당의 주의·강령 등을 극력 주장했다.477)
1931년 5월에 조완구·조소앙·이동녕·김철·김구 등 국무위원 명의로 선언서를 발표했다.478) 이 선언은 남경에서 개최되고 있던 중국국민회의에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의 방침과 정책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이 선언에서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이 요구하는 것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 하나는 옛 한국영토에 민주독립국가를 확립하는 것이며, 또 하나는 역시 그 땅에 균등제도를 실현하는 것이었다. 전자는 과거의 시기로서 첫걸음의 공동목표이며, 후자는 건설시기의 궁극적인 목적이라고 했다.479)
한국독립당의 성립은 한국독립운동사에서 큰 의의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것은 “민족유일독립당이라는 민족운동상의 요구를 구현하기 위해 시도된 중국관내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본격적인 정당 활동이었다”480)는 이유 때문이다. 그리고 한국독립당이 조직된 뒤에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거나 또는 그 범주를 벗어난 위치에서 여러 정당이 조직되었고, 이어서 점차 임시정부를 중심으로 하는 정당정치가 이루어지게 되었던 사실도 그러하다.
471) | 金正明,≪朝鮮獨立運動≫Ⅱ(東京:原書房, 1967), 511쪽. 金正柱,≪朝鮮統治史料≫10(東京:韓國史料硏究所, 1975), 697쪽. 朝鮮總督府 高等法院檢事局 思想部,≪思想月報≫3-11(1934), 16∼1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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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2) | 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1976), 645쪽. |
473) | 위와 같음. |
474) | 1930년대의 한국독립당이 임시정부의 여당이면서 유일당이었다. 때문에 임시정부와 한국독립당은 동일한 인물로 구성된 것이었다. 그러나 1940년대에 조직된 한국독립당은 제1 야당인 민족혁명당을 비롯하여 여러 야당을 경쟁상대로 둔 집권당이었다. |
475)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4(1972), 575∼576쪽. |
476) | 소규모의 국부적인 무력적 파괴만으로 독립운동의 궁극적인 목표인 복국을 달성할 수 없었다. 따라서 윤봉길의거 이후 장개석과 면담했던 김구는 한국청년의 조직적 훈련과 군사력 양성을 위해 중국군관학교에 한국청년을 입교시켜 달라고 요청했고, 이 자리에서 양자합의에 의해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만들어졌다. |
477) | 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1976), 676쪽. |
478) | 위와 같음. |
479) | 國會圖書館,≪韓國民族運動史料≫중국편(1976), 673∼675쪽. |
480) | 秋憲樹,<日帝下 國內外 政黨活動>(≪韓國現代史의 諸問題≫Ⅱ, 1987), 35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