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신한독립당
新韓獨立黨은 만주의 한국독립당(상해의 것과 다름)과 남경의 한국혁명당이 1932년에 통합되어 조직되었다.
만주의 한국독립당은 1928년 12월에 조직된 혁신의회를 기반으로 하여 1930년 7월에 홍진·李靑天·閔武·安勳·黃學秀·申肅·李章寧·金元植 등에 의해 결성되었다.495) 만주의 한국독립당은 중앙에 6개 위원회를 두고 지방에는 支黨部와 區黨部를 두었다. 그리고 이 당은 동북 만주의 의병·유림·대종교 등의 집단을 망라하였다. 당의 간부를 보면 홍진이 중앙위원장이었으며, 신숙(총무)·南大觀(조직)·안훈(선전)·이청천(군사)·崔灝(경리)·이장녕(감찰) 등이 각각 6개 위원회의 위원장을 담당했고, 한국독립군 총사령은 이청천이 맡았다.496) 이 당은 당 내부에 총무·조직·선전·군사·경리·감찰 등 6종의 위원회를 두었고, 당의 조직체계는 중앙당부·지당부·구당부 등의 3급 조직을 두었다. 그리고 한국독립당은 이후 동·북만주의 의병출신과 유림 및 대종교 등의 집단을 망라하여 진영을 강화했고, 따라서 1931년에는 36개의 軍區를 가질 정도로 그 조직이 확대되었다.497)
한국독립당은 창당과 함께 다음과 같은<黨綱>을 채택하였는데, 첫째 民本政治의 實現, 둘째 勞本經濟의 組織, 셋째 人本文化의 建設 등이 그것이다.498) 이 강령은 民·勞·人을 三本으로 삼는 정치·경제·문화정책을 의미하였다. 특히 여기에서 나타나는 ‘민’이나 ‘인’은 곧 당시 만주에서 농업에 종사하면서 독립운동의 인적·물적 바탕을 이루고 있던 동포들이었고, 따라서 한국독립당이 관심을 기울인 부분이 농민 위주의 경제정책이었다고 생각된다.
이 당은 소속 당군으로 한국독립군을 조직했다. 따라서 한국독립당은 자치기관으로서의 한족자치연합회와 군사기관으로서의 한국독립군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는 관계에 섰다.499) 이리하여 한국독립당은 한족자치연합회와 한국독립군을 주도·육성하면서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1931년 일제가 전격적으로 만주를 침공하자, 한국독립당은 1932년 11월 한국독립당 중앙의회의 결의를 통하여 한국독립군의 항일전선에 대한 총동원령을 내리는 한편, 중국의 길림성 당국과 연합 항일전쟁 방안을 협의하기도 하였다.500)
이후 일제의 침공이 더욱 격화되자, 한국독립군 부대는 중국관내로 이전하게 되었다. 이 때 임시정부가 이청천을 초대하여 이청천·趙擎韓·吳光宣·公震遠 등이 상해로 이동하는 동시에 독립군 가운데 군관학교 입학지원자를 선발하여 상해에 보내기로 하였다.501) 이것은 1932년 1월 29일의 윤봉길의거를 계기로 蔣介石이 김구에게 면담을 요청했고 그 자리에서 김구의 요청과 장개석의 찬성에 의해 중국군관학교 낙양분교에 한인특별반이 설치됨에 따른 것이다. 즉 중국관내로 이동한 만주 한국독립군들의 대다수가 여기에 입교하였다.502)
한편 韓國革命黨은 尹琦燮·申翼熙·延秉昊·成周寔·閔丙吉 등이 1929년 남경에서 조직한 정당이었다. 구성원은 임시정부에서 주류를 이루지 못했던 인물들이었는데 근거지를 남경으로 옮겨 임시정부나 한국독립당과는 별도의 정당을 조직했다. 이 당의 목적은 사상의 정화와 독립운동 진영의 단결을 꾀하는 것으로 동시에 산하에 철혈단을 두어 무력행동대로 삼았는데, 그 주요 인물은 安在桓·金昌華·羅月煥 등이었다. 이 당은 기관지로≪우리 길≫을 발간하여 독립사상을 고취하고 단원 훈련과 교양에 이바지하였다. 그리고 1932년 현재의 당원은 40명 정도였으며, 간부는 이사장에 윤기섭, 총무 鄭泰熙, 외무 신익희 등이었다.503)
1934년 2월 25일에 만주 한국독립당의 대표 홍진·김원식과 한국혁명당 대표 윤기섭·연병호가 남경에서 협의한 결과 각 당을 해체하고 ‘신한독립당’을 조직했다. 이어서 3월에 대표회의를 열어 간부선임과 운동방침을 결정했는데, 당수에 홍진, 당무위원에 김상덕·신익희·윤기섭 등이 각각 선임되었다.504) 신한독립당은 당의로 “민족주의를 기초한 정권, 생계문화의 독립과 민주적 신건설 완성, 전세계 인류의 평등·행복의 촉진”을 채택하고, 강령으로는 민주공화국·대의제·토지와 대생산기구의 국유제 등을 채택하여 한국독립당을 비롯한 다른 정당의 그것과 유사했다.505)
이러한 양당의 통합은 독립운동사에서 최초로 이루어진 ‘黨對黨 통합’이라는 데 의미가 있었고, 장차 독립운동계에 있어 정당간의 통합운동을 내다볼 수 있게 해 주었다.
이 당의 세력은 그리 확대되지 못했다. 이런 상황에서 만주의 한국독립당이 만주사변으로 북경으로 남하하게 되면서 합당의 교섭을 벌이게 되었다. 이것은 만주 한국독립당의 당세 만회와 한국혁명당의 세력확대 추구라는 목적이 합쳐져 이루어진 것이었다.
495) | 蔡根植,≪武裝獨立運動秘史≫(大韓民國公報處, 1949), 156∼157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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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6)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5(1973), 598∼599쪽. |
497)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5(1973), 596∼597쪽. |
498) | 申 肅,≪나의 一生≫(日新社, 1963), 94쪽. |
499) | 秋憲樹, 앞의 글, 343쪽. |
500) | 洪永道,≪韓國獨立運動史≫(애국동지수호회, 1956), 281쪽. |
501) | 洪永道, 위의 책, 279쪽. |
502) | 낙양분교에 대해서는 白凡金九先生全集編纂委員會,≪白凡金九全集≫4(1999), 799∼1066쪽. |
503) | 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독립운동사≫4, 727쪽. |
504) | 金正柱,≪朝鮮統治史料≫10, 701쪽. |
505) | 金正柱,≪朝鮮統治史料≫10, 702쪽. |